바라만 봐도 넉넉하다. 나도 모르게 빙그레 입가가 벌어지는 것이 든든하기까지 하다. 늙은 호박 한 덩이를 보면서 이런다면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르지만 늙은 호박을 보면 난 정말 그렇다. 집안 어디에 두어도 훌륭한 인테리어 소품이 되어 주기도 하는 늙은 호박. 추석에 가져 온 늙은 호박 하나로 나는 그렇게 풍성한 가을을 보냈다.
새알 대신 고구마를 넣어 호박범벅을 해먹을까? 채쳐 호박전을 구우면 아이들이 너무 좋아할 텐데. 아마 일주일 내내 간식으로 줘도 질려하지 않을 거야. 아님 호박빵? 단풍 구경하느라 그을리고 거칠어진 얼굴에 팩도 해야지. 늙은 호박은 비타민 A가 많아 손상된 피부의 재생을 돕고 거친 피부를 매끄럽고 맑게 해준다는데. 비타민 A가 많으니 눈에도 좋을 거고. 게다가 호박씨 까먹는 재미까지. 이러니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보기 좋고 마음 넉넉하다는 이유로 아끼고 아꼈는데 아뿔싸, 너무 아꼈나보다. 한쪽 귀퉁이가 심상치 않은 걸보니. 그런데 뭘 하지? 늙은 호박 한 덩이로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으니 뭘 할지 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 도전해 보는 거야. 늘 한 번 해봐야지 하면서도 선뜻 하지 못했던 떡을, 호박떡을 해보는 거야.
하루 전에 쌀은 불려 두었고 호박 껍질이야 감자 깎는 칼로 쓱쓱 해결. 하지만 방앗간 가지 않고 쌀을 갈아보려니…. 믹서를 이리저리 흔드느라 손가락이 빨갛게 부으면서 만들었건만 실패였다. 너무 달고 딱딱한 호박떡에 기운이 쑤욱 빠져버렸다.
그 때 떠오른 광고 카피.
‘나는 호박떡 만들기에 실패한 아줌마였다. 하지만 나는 나를 넘어섰다.’
꿈에서도 호박떡을 만들었지만 역시 실패였다. 잠에서 깨자마자 쌀을 씻어 불릴 수밖에 없었다. 쌀을 불리는 시간 동안 다른 일을 하면서도 원인 분석 또 분석. 믹서로 쌀을 갈기 위해 불린 쌀의 물기를 잘 제거해야겠어. 남아 있던 물기 때문에 갈리면서 바로 반죽이 되려고 하고 갈기도 힘들고 체에 내리기도 힘들고. 호박에 뿌리는 설탕도, 쌀가루에 섞는 설탕도 각각 10g씩 줄이고. 쌀가루에 물을 뿌리지 말고 소금과 설탕을 바로 섞어볼까?
늙은 호박은 이 좋은 가을에 내게 선물을 주었다. 호박떡에 성공했다!
이러다 CF 찍는 거 아냐. 나는 호박떡 만들기에 성공한 아줌마다, 하면서.
◇재료=쌀 4컵, 늙은 호박 600g(중간크기의 ¼쪽 정도), 설탕 60g, 소금 1작은술
◇만들기=①쌀은 10시간 이상 불려서 물기를 제거해둔다.
②호박은 껍질을 벗기고 씨를 제거한 후 얄팍하게 썬 뒤 설탕 30g과 골고루 섞는다.
③불린 쌀을 믹서에 곱게 갈아 체에 친다.
④설탕과 섞어 둔 호박은 수분을 제거한 뒤 쌀가루를 조금 뿌려 버무려 둔다.
⑤쌀가루에 소금과 남은 설탕을 섞는다.
⑥찜통에 물에 적신 천을 깔고 쌀가루와 호박을 켜켜이 놓고 찐다. 찜통 뚜껑에 맺혔던 물이 떡 위로 떨어지므로 위에도 천을 덮고 물의 양이 너무 많으면 끓으면서 물이 떡에 닿으므로 바닥에서 틀까지의 ⅔정도 넣는다.
⑦젓가락으로 찔러 보아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으면 다 된 것이다.
2004년 10월 26일 매일신문 요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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