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선생님
송 광 호
같은 고등학교를 같은 해에 졸업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하나가 되고도 남는다. 나는 강원도 도청소재지인 춘천에서 소위 명문고로 불리는 춘천고등학교를 1972년도에 졸업했다. 그 당시 3학년은 7반까지 편성이 되어있었는데 가물거리는 내 기억으로는 3학년 전교생 수가 425명쯤 되었던 것으로 안다. 전교생수를 일곱 개 반으로 나누면 한 학급당 대략 61명이 된다. 출산율이 년2%대가 채 안되는 지금에 비하면 39년 전 그 당시의 교실은 소위 콩나물 교실이었던 게 확실해진다.
요즘은 진보계열이니 좌파니 우파니 하며 지역별로 어떤 성향의 교육감이 당선 되었는가에 따라 교육정책이 제각기 달라 서로의 주장으로 갑론을박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는 일주일에 몇 시간씩 군사교육을 받는 등 다소 경직성이 있기는 하였으나 교육부가 주도해서 수립한 분열 없는 하나의 교육정책에 뿌리를 둔 학교 교육만이 존재하였다.
1970년대 초 우리 세대는 그런 교육을 받으면서도 씩씩하게 자라며 배웠고 성인이 되어 내가 태어난 고향 땅 강원도와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발전에 결코 작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자부한다. 요즘 들어 이슈가 되고 있는 고교평준화니 무상급식이니 하는 사회적 논쟁은 우리시절에는 대두되지 않았다. 실력이 되는 학생은 자기 눈높이에 맞는 대학교 입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였고 비록 쌀보다 보리알갱이가 많은 점심 도시락임에도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먹으며 형설의 공을 쌓던 순수한 열정이 넘치던 학창시절로 기억된다.
나의 빡빡머리 고교시절을 회상하면 아직도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한 분이 계신다. 국어를 가르치시던 진병도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당시 40대가 갓 넘으신 미남 형 선생님이셨다. 턱수염과 구레 나루가 유난히 많으셨던 선생님께서 언제나 잘 생기신 얼굴에 푸른빛이 날 정도로 깔끔하게 면도를 하셔서 당시 인기가 높던 미국의 영화배우 로버트 테일러처럼 짙은 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받쳐 입으시고 다소 튀는 색감의 넥타이를 매고 다니셨다. 항상 왼쪽에 가방을 끼고 걷는 모습조차 반듯하셨고 어떤 교회의 장로님이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보통 고등학교 3학년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이면 으레 수도권에 있는 좋은 대학에 많은 제자들을 합격시키기 위하여 입시 위주의 강의를 하시게 마련이었지만 진병도 선생님은 그런 선생님과는 사뭇 다른 면을 가지신 분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열심히 강의를 하시다가 책을 탁하고 덮으시며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애들아! 솔직히 대학입학을 위한 입시 공부도 중요하지만 오늘은 너희들이 인생을 살면서 정말로 필요한 내용을 가지고 토론을 해보자 이런 게 진짜 산교육 이란다”하시면서 칠판에 커다랗게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알 듯 모를 듯한 화두를 적어놓으셨다. 그리고는 몇 명의 친구들에게 각자가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를 칠판 앞으로 나와서 직접 써보라고 하셨다. 어떤 급우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적었고 어떤 아이는 사랑은 후손을 낳는 조건이라고 썼으며 어떤 괴짜는 사랑은 마약 같은 섹스라고도 썼다. 선생님께서는 킥킥거리며 나름대로 사랑의 정의를 칠판에 쓴 서너 명의 아이들을 앞으로 불러내어 자신이 생각한 사랑의 정의에 대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발표해 보라고 하시면서 한 명당 5분의 발언 기회를 주셨다.
일일이 그 내용을 모두 기억 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 시간에 평소 느끼지 못했던 어떤 신선한 충격과 흥미가 발동되어 평소의 지루함을 잊은 채 급우들의 엉뚱한 발표내용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선생님은 국어 공부도 좋지만 국어시간에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갖춰야 하는 기본적인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배워야 한다며 앞으로 우리가 성인이 되어서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위해 갖춰야 할 그 어떤 메시지를 알려 주시고 싶어 하셨다.
사춘기에 접어든 빡빡머리 우리들이 말도 안 되는 사랑의 정의를 내리고 앞뒤가 맞지 않는 허튼 설명으로 우왕좌왕했지만 선생님께선 그러는 우리를 비판하거나 나무라지 않으셨고 즐거운 표정으로 우리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분명하게 발표하도록 기회를 주셨다. 그리고 선생님의 의견을 들려주셨다. 그 때 선생님의 강의는 너무 열정적이어서 쉬는 시간 10분을 넘겨 다음 시간 담당 선생님께서 시작종이 울리고도 교실로 들어오시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리시곤 했을 정도였다.
그 당시 국어 선생님의 열정적 강의는 이제 60을 바라보고 사는 내 인생에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명 강의로 남아있다. 최근 들어 교육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이런저런 우려 섞인 보도 내용을 들을 때마나 고교시절 나의 국어 선생님 같이 따듯한 가슴과 열정을 가지신 선생님이 많아 졌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벌써 39년이 되었으니 진병도 선생님이 지금까지 살아계신다면 대략 여든이 되셨을 것이다. 여든이 다되신 은사님을 여러 채널로 수소문 해 보았으나 아직까지 선생님께서 소식을 듣지 못하여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럽다.
흔히들 인생은 평생 동안 배우며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나의 고교시절 국어선생님은 우리들의 인생은 연극무대에 선 배우와 같다고 일갈하셨다. 성공적인 연극과 같은 인생을 살기위해 갖춰야할 보편적인 지혜와 따듯한 열정을 가르쳐 주셨다. 오늘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 또한 39년 전 빡빡머리시절 멋진 진병도 국어선생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선생님 갑자기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습니다. “여든을 사신 선생님께서 오늘 생각하시는 화두는 무엇인가요?” 선생님 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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