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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송광호] 법 없이도 사는 부처님

명호경영컨설턴트 2011. 10. 3. 19:36

 

법 없이도 사는 부처님

 

송 광 호

 

겨울이 추워야 제 맛이긴 하지만 우리 같은 서민들이 살기엔 버거운 계절이다.

먼저 살던 빌라 주인이 월세 좀 밀렸다고 내년3월11일까지 방을 비워달라는 최고장을 보내왔다. 빌라 주인J씨는 어떤 초등학교 교감으로 있다가 지병이던 당뇨가 심해지면서 3년 전엔가 명예퇴직을 하고 받은 퇴직금으로 3층짜리 여덟 가구가 세 들어 살고 있는 빌라의 새 주인이 되었다.

이 3층짜리 빌라의 전 주인 K씨는 마음씨가 착하고 덕망이 있는 D약국의 약사로 전세를 사는 세입자들을 친 가족처럼 대해주어 중간에 전세금을 올려주긴 했지만 조금도 불편 없이 모두 10년 남짓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재작년 겨울 문제의 J씨가 새 주인이 되면서 몇몇 세입자들이 하나 둘씩 혀를 내두르며 이사를 나갔다.

새 주인 J씨가 매월 생활비가 필요하니 지금껏 적용해오던 전세가 아닌 월세로 재계약을 하겠다며 안내장을 보내와 그때 까지만 해도 의정부에 살고 있던 나는 급히 춘천으로 내려와 새 주인 J씨와 임대차 계약서를 앞에 두고 마주앉게 되었다.

27년 전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혼자되신 어머니를 위해 전세금 2천 만 원을 주고 마련한 13평 쯤 되는 빌라는 어머니께서 지금까지 장사를 하시는 가게에서 채 100미터가 안되는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새 주인 J씨가 계약서를 내밀며 “지금부터는 월세지만 집과 관련된 시설물이 고장 나면 모두 세입자가 스스로 비용을 들여 고쳐야한다”고했다. 그러는 그에게 “아니 전세도 아닌 월세인데 그런 일방적인 조건이 어디 있습니까? 먼저 번 주인은 전세계약임에도 보일러까지 고쳐주었는데요?”고 하자 그가 정색을 하며 “아, 자꾸 다른 말 마세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 의견에 동의해서 도장을 찍었으니 이 조건이 싫으면 한달 기한을 줄 테니 집을 비우시요!”한다. 아무리 빌라 주인이라도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하는 말투가 조금 거슬렸다. 솔직히 다른 세입자들이 모두 그런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는 말이 선 듯 믿기지 않았지만 아흔이 다되신 모노를 모시고 엄동설한에 딱히 이사 가기도 마땅치 않고 해서 찝찝한 마음으로 도장을 찍어줬다. 참으로 황당한 계약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재작년 겨울부터 수차례 말썽을 일으키던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가스레인지로 세수 물을 데워 쓰는 그야말로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기술자를 불렀더니 보일러가 오래된 구형에다 너무 많은 부품을 바꿔야하므로 차라리 65만원을 주고 새것을 구입하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월세를 사는 형편에 어떻게 거금 65만원이나 되는 보일러를 사서 쓴다는 말인가? 추운 겨울이 다가오는지라 며칠 고민을 하다가 집주인 J씨를 만나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그가 냉정하게 “계약서대로 해요! 계약서대로 세입자가 알아서 해야지 그런 걸 왜 나에게 이야기하면 어쩌라는 겁니까?”라며 차가운 말투로 반응하는 그에게 내친김에 “며칠 전 저녁에 우리 어머니께서 계단을 오르시다가 넘어지셔서 무릎을 심하게 다치셔서 그러하니 저기 계단 오르는 초입새에 자동으로 점등되는 전구하나 달아주면 안됩니까?”했더니 이런저런 핑계를 들면서 노인네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며 딱 잡아뗀다. 내가 조금 흥분해서 한마디 했다 “얼마 전에 이사 나가는 사람들 말처럼 당신 진짜 대단한 구두쇠네. 당신 같은 냉혈인간이 어떻게 초등학교에서 교감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는지 그 아이들 장래가 심히 걱정 되오” 그랬더니 J씨가 언성을 높이며“남들은 날보고 하나같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부처님이라고 하는데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런저런 소릴 지껄이는 게야!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요!”한다. 이런 양보 없는 언쟁으로 결국 서로 멱살잡이를 하게 되었고 그가 그 때 분함을 삭이지 못하고 명도소송을 운운하며 당장 집을 비워달라는 최고장을 보낸 것이다.

나 역시 몇 차례 내용증명서로 대응을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신뢰가 깨어졌음을 알고 지난해 성탄절 밑에 함박눈을 펑펑 맞으며 서둘러 우리가 어렸을 적 살던 곳 가까운 약사동 연립으로 이사를 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이런 저런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때로는 예수님이나 부처님처럼 선하고 자비로운 인격과 매너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사기꾼처럼 선의로 대하는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올해로 92세가 되신 어머니께서 아직도 출근하시는 가게와 성당 그리고 자식 같은 훌륭한 주치의가 있는 병원이 가까워서 좋다고 하시며 마지막 까지도 이사를 반대하셨던 어머니께 참으로 죄송했다.

 

새로 이사 온 집에서 적응하시느라 열흘 정도를 애쓰신 어머니께서 저녁 밥상을 물리시고 나를 꿇어앉히시며 그 동안 참고 참으셨던 속내를 털어놓으셨다 “내가 어쩌다 100평이 넘는 내 집에 살다가 네 아버지 돌아가신 뒤 네 형에게 재산 다 물려주고 이런 수모를 당한단 말이냐? 내가 이집에서 죽는다면 객사나 다름없다. 난 그게 속상하다” 순간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머니, 그렇게 속상하시면 의정부에 있는 아파트랑 석사동에 있는 땅이랑 팔아서 집 한 채 살 테니 너무 상심마세요”라고 위로를 드렸지만 나와 집주인의 갈등으로 이사를 하면서 받으신 어머니의 상처받은 마음에 결코 큰 위안이 되지 못했다.

 

젊으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대쪽같은 꼿꼿한 자존심을 지켜 오신 어머니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8남매를 낳고 키우셨지만 편한 호강 한 번 못하시고 월세방을 전전하시게 한 자식이 한 없이 부끄럽지만 살아 계시는 동안만큼 이라도 최대한의 사랑과 효도를 다짐해 본다. 지금껏 내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수많은 인연 중에 유독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부처님이라고 자칭하던 그 고약한 빌라주인J씨를 언제쯤 편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정녕 내가 몰라보는 고매한 부처였을까?

출처 : 토지문학회
글쓴이 : 박현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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