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편지8/15]
사람과 사람의 사이는 산길과 같아서 자주 만나고, 전화하고, 어울리면 길은 반듯해져 다시 찾기도 쉬워지고, 살기 바빠 소식이 끊기거나 다툼이나 서운함이 있어 일부러 적조하게 되면 길은 잡초가 무성해져 찾기 힘들게 되다가 나중에는 아예 길이 없어지게 됩니다.
제가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 온지 7년, 10층에 사시는 분이 예전에 조흥은행에서 상무로 계셨던 분인데 퇴직하시고 대학교에 강의도 나가시는데 밀양 매화리에 노후를 대비한 별장을 지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걸 수 있게 사진을 한 점 드렸는데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차를 한 잔 같이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분과 대화중 저와 아주 친한 사람과 옛날에 등산도 자주 같이 가고 소주잔도 같이 나누는 분이었고, 저의 친구도 그 분 이야기를 한 번씩 저에게 해 주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친밀감도 더 느껴지고 마치 인품이 검정된 분을 만난듯하여 유쾌한 대화를 나누고 다음에 다 같이 식사를 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저의 친구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그 분이 우리아파트에 같이 살고 있으며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더니 그 친구는 웬 일인지 좀 시큰둥한 태도로 건성으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는 문득 오랜 시간이 지나 정이 좀 식었나 보다 하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였지만 그들만의 사유는 물어 보지도 않았습니다.
살다보면 한 때 다정하게 지내다가 [그것도 솔직히 이야기 하면 자기의 필요에 의해 다정하게 지내다가] 환경이 바뀌거나 일상에 바빠 소식이 이어지지 못하고, 기억 밖으로 사라져 있다가 언제 바람같이 불현 듯 생각나기도 하고, 누가 이야기 해 줘서 생각해 내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면 모든 사람들이 다 소중해 집니다. 사람을 새로 사귀기는 너무 힘들고 또 말이나 명예나 또 다른 것들로 인해 상처 받기 쉬워 잘 사귀어지지 않고 깊은 사귐도 힘듭니다. 남는 것은 지난날의 추억이고 바람기 어린 무용담이고..... 이제 눈 어두워 지고, 귀 흐려지고, 말도 어눌해 지면 남 앞에 나서기도 싫어지고 또 나서고도 했던 말 또 하고 하여 듣는 사람이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면 모임에 나가기도 싫어지는데 소주잔을 같이 기울일 친구가 있으면 세상살이가 얼마나 즐거울까요?
그래서 지금 알고 지내는 사람을 소중히 해야 합니다. 생각만으론 얼마든지 많은 사람을 사귈 수 있을 것 같아도 내가 조금 어려워지거나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자연히 떠나 갈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이해타산을 따지게 될 것이니까요.
제 친구 중 한명은 전화통화중 항상 저의 어머님이 잘 계시냐고 묻는 친구가 있습니다. 30년이 넘게 항상 같은 질문을 하는 친구를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나중에 남에게서 망각 당하기 싫으면 현재 주위에 있는 분들에게 더욱 더 잘 해드려야 합니다. 내가 지위가 높고, 내가 명예롭고, 바빠 남에게 잘 대해주기 어려울 때 일수록 더욱 더 성의를 다해야 합니다. 그들은 나의 사정을 항상 보고 있습니다.
지금 다정했던 사람들 사이에 잡초가 한 뿌리 자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조금만 귀찮아하면 곧 잡초는 무성해져 길을 없애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