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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킹콩 King Kong, 2005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4. 11:19

 

 

 

 

 

1933년작 '킹콩' - 오리지널이라고하겠다 - 은 지금으로 부터 약 70년이 넘은 고전중에 고전인 괴수 '판타지' 영화이다.물리적 시간으로봐도 '킹콩'은 여러도마에 올라 피튀기는 논의의 대상이 되었을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이고 실제로도 그러하다.1차적으로 '킹콩'을 바라본다면 우선 '잘만든 오락영화'임은 확실하나 그렇게 바라보기에 관계하고있는 캐릭터들과 배경이되는 환경이 복합적이다. 복합적이라는 의미는 복합적인 관계성을 창조해내고 그 들만의 의미부여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킹콩'을 바라보는 여러시각은 참 흥미롭다. (필름 2.0 #262에 게시된 내용을 참고하자면) 해리 게덜드와 로날드 고츠만의 <킹콩>비평서에는 '털북숭이 손안의 여자'에서 "<킹콩>은 '흑인의 백인 여성 소유욕'에 대한 백인 남성의 불건전한 판타지를 영상화 한것이다"라 주장했다고 하며 '킹콩'자체가 흑인 남성의 상징이며 그가 날뛰며 짓밟는 것이 백인 남성에 대한 '인종콤플렉스'의 표출형태라 한다. 그리고 또한 오리지널 '킹콩'과 피터잭슨의 '킹콩' 역시 희생자 중 흑인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 정말 놀랍게도! 또 두사람은 백인들이 '흑인 남성들은 백인 여성에 대한 성적 집착을 가지고있다' 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진 점에 근거해, 콩이 앤에 대해 가지는 집착을 '흑인의 백인 여성에 대한 환상'으로 해석하기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내가 본 '킹콩'에 대한 시각과 비슷한데, 우선 '앤'자체가 흰옷(아니면 거의 희다시필정도의 파스텔옷)을 착용하는데 특히, 킹콩과의 만남에서는 절대적이다.이러한 점은 킹콩이 검정에 가까운 브라운색을 띄고있는 고릴라라는 점과 비교해서 '흑인'과 '백인'이라는 시각으로 볼 수 있었다. 만약, '킹콩'이 '미녀'에 빠질때 '미녀'자체가 순수성을 뜻하는 '흰'옷이 아닌 '빨간'색이나 '보라'색 옷 혹은 '검은'색 옷을 입었다면 이는 '소프트포르노'에 가까운 판타지물이 되었을 수 있으며 인종에 대해 비교할 필요는 없었을 수 있다. 하지만 '흰옷'을 입은 금발의 백인 여성이라면 이러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역시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나는 '앤'자체에 대한 '킹콩'을 그저 흑인 남성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계급'적인 문제에서도 볼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니까 최근 본 타 영화를 비교하자면 '킹콩'은 스파이크 리의 '피버 정글'보다 토즈 헤인즈의 '파프롬헤븐'에 가까운 영화였다는 것이다. 단지 피부 색의 차이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 파생된 계급적인 문제로 남녀의 로맨스 내지 공감대를 이야기 한 것이기때문이다. 특히, '킹콩'의 마지막에서 '킹콩'과 '앤'의 언해피엔딩으로 끝이 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백인 남성 ('킹콩'에서는 단지 인간으로 표현되지만, 거의 백인이다!) 들의 '킹콩'에 대한 반발의식과 파괴본능은 그 둘의 공감대를 깨어부시려 하기 때문이다. 그 둘은 애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지만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것과도 같으며, 그렇기 때문에 '킹콩'이란 판타지는 아름다운 정서의 극치가 되었다.

 

또한 '킹콩'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 쓰러진 후 '앤'이 안기는 것은 '백인 남성인  잭 드리스콜'의 품이었다. 그래서 '앤'-백인여성은 인종과 계급의 차이에서 '킹콩'-이라는 남성과는이루어질 수 없으며, '잭 드리스콜'-이라는 같은 인종과 계급의 남성과의 사랑을 완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미화된 부분이 없지는 않으나 충분히 '킹콩'을 바라보는  한가지 시각으로 생각 될 수 있지 않나. 또, 저명한 학자에 의해 '킹콩'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으로는 경제 대공황 시기라는 배경에 의해 해석되기도한다. '킹콩'자체를 '힘 세고 건장한 시골 남성'으로 보며'앤'을 도시여성으로, 시골과 다른 도시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채 비참한 생을 마감한 풍자극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 개인적인 소견은 너무 미화시킨 바가 아닌가 생각되지만!!차라리, 내가 공감하는 또 다른 견해는 이것이다.(아래부분 역시 Film 2.0 #262에 게시된 내용이다.)비평가 R.C 데일이 '꿈의 구조'로 해석한 '킹콩'에 대한 것이다.즉, 인간(특히 남자)의 잠재의식이 형상화 된것이 바로 해골섬의 광경과 콩인데 '킹콩'이 칼 덴햄으로 상징되는 남성의 억압된 본능의 화신이며 이는 비평가 대니 피어리의 견해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콩은 칼 덴햄의 억눌린 자아, 즉 '이드(id)'가 형상화되넋이며 칼이 앤에게 느끼는 성적인 욕망이 콩을 통해 표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콩이 잭 드리스콜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은 잭을 '앤을 자신에게서 �으려는 위협자'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견해가 드러나는 것은 '킹콩' 영화자체에서 칼과 콩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거의 없다는 것이라 하며 '킹콩'은 칼이 그랬듯 남성들이 갈구하는 남성 스러움의 상징이라 하는 것이다.

 

잠시 여기서 나의 생각을 밝히자면 '킹콩'을 자신의 억눌린 자아로 생각되는 것은 칼이 아니라 오히려 잭이 아닌가 생각되기도했다. 물론 그 둘은 서로의 적대적 관계에 있기는 하지만 둘의 성격은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소극적/적극적 이기도 하며 힘이약한/힘이센 이기도 하며 지능적인/본능적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잭이 앤에게 하고픈 행동들을 킹콩이 그녀에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 되는 바였다.   하지만 내가 공감한 부분은 이러한 부분이 아닌  그 다음으로 확장되는 부분에 있다.주로 이렇게 질문되기도하는 부분이다. '킹콩은 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갔을까?' 그 빌딩은 사실 건물의 일부분이라기 보다 뉴욕의 상징이기 보다 남근의 확장에 더 들어맞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개념이다. 킹콩이 빌딩위에 올라서며 자신의 위치라는 것을 확인시키고 그것을 자신의 '크기'적 인 면과 동일시 여기는 부분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무생물이 아닌 자신의 신체 일부인 생물적 견해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생물적 공간위에서 죽음을 당하는 킹콩은 마치 타인에게서 공격을 받아 거세당해 죽어가는 듯해 보이기도하다. 물론 이러한 부분을 피터잭슨은 유도했을리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오마주인 33년작 오리지널을 제대로 옮겨왔으니까. 또한 100% 디지털 테크놀로지인 부분이 상당했다는 것부터 원작에 가장 충실한 내용을 판타지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이러한 시각으로 '킹콩'을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킹콩'자체는 눈물맺힐 듯한 야수에 대한 동점을 앞세운 오락물이니까.하지만 '킹콩'이 뉴욕의 대공황을 배경으로 했으며,'해골섬'이라는 곳을 등장시켜 그곳의 원시적인 모습과 함께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공룡의 세계, 샤머니즘이 강한! 부분 및 뉴욕의 이중성은 그저 단순한 '오락물'이 아닌 '영화'적 작품성이 뚜렷하기에 다양한 해석도 필요하지 않은 건가 생각된다. 사실, 이러한 해석을 붙이지 않아도,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킹콩'은 가장 영화적인  (눈물없이 볼 수 없는 로맨스를 액션과 스릴러로 무장시켜 오락성을 입증시키지만 경이로움의 극치인) '영화'임은 확실하다.

 

* 가장 마음에 들었던 캐릭터 : 칼덴헴

그는 인간이 선할수도 악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다. '킹콩'이란 판타지영화에서 가장 리얼리즘한 캐릭터로 인간을 대변한다.물론, 인간을 대변한다는 것은 이기적인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 뿐만이 아니다. 장사치가 되지 않으려는 그는 예술성을 버릴 수 없지만 결국 새로운 (크리에이티브한) 목표를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세계를 버리는 진취적이고 도발적인 성향을 띈다는 것이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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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유디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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