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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차시배지에 대한 연구논문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15. 09:03
한국의 차시배지에 대한 연구

- 성신여자대학교 다도학과 교수 이상봉 --

Ⅰ. 서 론

1. 연구의 의의와 목적

한국 차문화의 전래와 차종자를 심은 시배지(始培地)에 관한 문헌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 권 10 신라본기 제 10 흥덕왕편에 ‘흥덕왕(興德王)이 즉위했다. 휘는 수종(秀宗)인데 뒤에 개명(改名)하여 경휘(景徽)라고 했다. 헌덕왕(憲德王)과 어머니가 같으며 그의 아우이다. 828년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로 보내어 조공(朝貢)하니 문종(文宗)이 인덕전(麟德殿)으로 소대(召對)하여 잔치를 베푸는데 차등이 있었다. 당나라에서 돌아오면서 사신, 대렴(大廉)이 차종자를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 그리고 차는 선덕왕(善德王)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하였다’ 고 하였다.1)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大廉)이 차종자를 가져오니 흥덕왕이 명령을 내려 지리산(地理山)2)에 심게 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본 장에서 ‘차는 선덕왕때(재위 632-647)부터 있었으나 이 때(828년)에 이르러 성행하였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정사(正史)에서 차종자를 심었다는 것과 차나무가 있었다는 최초의 기록이다. 대체로 학계와 재야 다계(茶界)에서는 이 기록에 근거하여 한국에 차종자를 심은 년대를 흥덕왕 3년(828년)이라고 생각하여 왔으며, 또 지리산 남쪽 쌍계사3)와 칠불암4)이 자리하고 있는 화개동계곡5)을 최초의 차시배지(茶始培地)일 것이라고 짐작하여 왔다. 또, 삼국사기 동자료에 의하여 ‘차를 마시는 풍속도 선덕왕 당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견해가 많아왔다.

1979년 한국차인연합회6)가 조직되고 크고 작은 차모임이 생겨 차문화가 점차 활성화가 되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차문화 전래와 차시배지(茶始培地)에 대한 논란이 일기 시작하였다. 1985년 사단법인 한국차인연합회에서 일부 차문화를 연구하는 학자와 재야 다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화개동을 한국 최초의 차시배지(茶始培地)라고 확정하였다. 그리고 매년 5월 25일을 ‘차의 날’로 선포하고, 같은 날 화개동 쌍계사 입구에 ‘김대렴공 차시배추원비(金大廉公 茶始培追遠碑)’7)를 세웠다. 과연 한국에 차종자를 최초로 심은 년대를 828년이며, 차를 마시기 시작한 풍속과 차나무가 자라고 있었다는 년대를 선덕왕(632-646) 시대로 보는 견해가 타당한가에 대하여는 좀더 구체적인 연구와 토론, 공청회 등을 통하여 여러 다계의 학자들과 다인(茶人)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본 논문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다경, 화엄사지(華嚴寺誌), 쌍계사지(雙磎寺誌), 통도사지(通度寺誌),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조선의 다와 선(朝鮮의 茶와 禪), 한국불교사개설(韓國佛敎史槪說), 공주박물관도록 21 은탁은잔(公州博物館圖錄 21銀托銀盞), 구례속지(求禮續誌) 등의 자료를 근거로 연구하여 차나무 재배가 흥덕왕 시대(828년)보다 74년 정도가 앞서며, 차시배지도 화계동이 아니고 화엄사 장죽전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2. 한국의 차 시배지에 대한 재언(再言)

삼국사기 권 10 신라본기 10 흥덕왕편에 ‘흥덕왕 즉위 3년(828년) 겨울 12월에 사신(使臣)을 당나라로 보내어 조공(朝貢)8)하니 문종(文宗)이 인덕전(麟德殿)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차등(差等)9)이 있었다. 당나라에서 돌아오면서 사신 대렴(大廉)이 차종자를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그리고) 차는 선덕왕(善德王 632-646)때부터 있었으나 이때(828년)에 이르러 크게 융성(隆盛)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신라 42대 흥덕왕 3년(828년)에 ‘대렴이 가져온 차 종자를 지리산에 심었다’고 하는 자료만으로 차 시배 년대를 828년으로 결정하고 화개동을 한국의 최초 차시배지로 결정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다’고 한 기록을 ‘그때부터 차를 마시기 시작하였다’고 해석하는 견해에 세 가지 의문을 제기(提起)한다.


첫째, 중국에서 제다 되어 들어온 차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인가?
둘째, 선덕왕 이전에 이미 차종자가 들어와서 차나무가 가꾸어지며 차가 만들어져서 사용되었다는 것인가?
셋째, 선덕왕 당시에 차 종자를 심었다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러한 의문이 제기(提起)되는데, 여러 측면에서 자료를 신중하게 연구 검토해 보지 않고 만들어진 차가 수입되어 사용하였다고 단정한다거나 흥덕왕 3년에 차 종자를 처음 심었다고 하는 견해는 성급한 판단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지금까지 차 문화 전래와 차시배지에 대하여 학계에 밝혀진 자료는 안타깝게도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흥덕왕편에 그치고 있으며, 차나무가 자라고있었다는 것도 기타 자료에서 아직까지 선덕왕 시대보다 앞서는 자료는 밝혀지지 않았다. 본 논문에서는 여러 자료를 고찰하여 차종자가 흥덕왕 이전시대에 들여와서 재배(栽培)되고 있었다는 것을 밝혀서 차 시배 년대를 바로 세우고자 한다.
본 논문이 발표된 이후 시배지에 대한 여러 논문이 발표되어 시배지와 그 년대가 논란속에 검증되기를 바란다.


1) 興德王立하다 諱秀宗後改爲景徽하다 憲德王同母弟也이다 (中略) 三年冬十二月에 遣使入唐하여 朝貢하니 文宗召對于麟德殿하여 宴賜有差하였다. 入唐廻使大廉이 持茶種子來하니 王使植地理山하였다. 茶自善德王有之하였으나 至於此盛焉하였다.(下略)
2)지리산(地理山) : 지리산(智異山)의 이칭(異稱).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3)쌍계사(雙鷄寺) : 경남 하동군 화계면 운수리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 옥천사를 신라 50대 정강왕(定康王, 886~887)때 쌍계사로 개칭하였다.
4)칠불암(七佛庵) ;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법왕리 지리산 반야봉 남쪽 해발 800m 지점에 있는 사찰, 칠불선원(七佛禪院) 또는 칠불사(七佛寺)라고도 한다.
5)화개동계곡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에 있는 계곡인데 차밭이 연이어 있다.
6)한국차인회 : 한국차인연합회의 전신이다. 전국 각 지역의 여러 다회를 모집하여 사단법인체로 구성한 단체이다.
7)김대렴공차시배추원비 : 생몰년 미상, 신라 공신 대렴이 당나라에서 차(茶)종자를 가져왔는데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었다고 한다. 그가 차종자를 가져오고 심은 것을 기념하는 비. 1985년 5월 25일에 사단법인 한국차인연합회에서 주최하고 진주지부에서 주관하여 세웠다.
8)조공 : 전근대 동아시아세계의 국제관계에서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예물을 헌상하는 행위를 말한다.
9)특별한 대접을 말한다

Ⅱ. 본 론

1. 지리산 화개동 차시배지에 대한 변명(辨明)

대렴이 가져온 차종자를 왕의 명령으로 화개동(花開洞) 계곡에 심었는가를 알아 보는데에는 당시의 화개동 계곡의 여러 여건을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쌍계사지(雙磎寺誌)에 의하면 당시 화개동 계곡에는 옥천사(玉泉寺)와 칠불암(七佛庵) 두 절이 있었다고 전하여진다. 옥천사는 의상대사(義湘大師: 652-702)1)의 제자인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성덕왕(聖德王: 702-736)2)23년(723년)에 당나라에서 육조혜능(六祖慧能)3)선사의 정상(頂上=頭上)을 모셔다가 작은 난야(蘭若)지어 봉안하고, 옥천사라고 이름을 하였다 고 하며, 칠불암은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출가하고 성불(成佛)한 곳이라고 하여 칠불암(七佛庵)이라고 이름하였다 고 전한다. 그러나 가야국의 허황옥 왕비가 아유타국에서 48년에 가야국에 들여왔다는 불교전래설이 역사학적으로 규명되지 않아 칠불암 창건 년대가 분명하지 않다. 또 칠불암은 화개동에서 이십 여리 떨어진 지리산 남쪽 중턱에 자리하고 있어서 차시배지와 연관지어 논하기에는 관계가 멀다고 하겠다.


쌍계사지에 의하면 ‘신라 성덕왕 23년(723년)에 옥천사가 창건되었으며, 그 뒤 117년 동안 첩첩산중에 묻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사찰로 유지되어 오다가 신라 문성왕 2년(840년)4)에 진감국사(眞鑑國師) 5)에 의하여 크게 중창되었다’고 한다.
왕명으로 차종자를 심는다는 것은 국왕의 기념 식수를 심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왕의 기념 식수를 심는데 지리산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의 화엄십찰(華嚴十刹)중에서도 대찰(大刹)에 속하는 화엄사를 제쳐두고, 첩첩산속에 묻혀 알려지지 않은 화개동 옥천사 근교에 차종자를 심으라고 왕이 명령을 내렸다고 보기에는 가능성이 희박하다. 아마도 당시의 화개동 근처 6~7십리 안쪽에는 인가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화개동 계곡 쌍계사 부근이 대렴이 가져온 차종자를 심은 곳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대렴의 차종자를 심었다고 하는 828년의 12년 뒤이면 차나무가 무성하게 자랄 수 있는 기간이어서 차를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옥천사를 중창하였던 840년 경에도 화개동에서 차가 생산되었다거나 지리산 토산차를 달여 마셨다는 기록이 없다. 다만 진감국사가 입적(入寂: 850년)하고 난 뒤 진성왕(眞性王)6) 1년(887)에 왕이 진감국사의 도덕과 법력(法力)을 흠모하여 시호를 진감선사(眞鑑禪師)로, 탑호를 진감국사대공탑비(眞鑑國師大空塔碑)7)라고 내리고 최치원(崔致遠)8)에게 글을 짓고 쓰게 하여 세운 비문에 ‘진감국사가 한명(漢茗)을 땔나무(薪)로 달여 마셨다’고 하는 기록만 있다. 이 무렵과 그 뒤에도 화개동에서 차가 생산되었다고하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선의 다와 선(朝鮮의 茶와禪) 3. 화엄사와 지리산 편 1 차의 유래에 ‘흥덕왕 당시 지리산 기슭에는 주민들이 사는 마을이 극히 드물었으며, 사찰도 화엄사 하나뿐이었다.9) 또 화엄사는 연기(緣起), 원효(元曉), 의상(義湘), 정행(正行) 등의 고승들이 배출되었던 관계로, 크게 융성하고 있던 때이라 화엄사에 차종자를 심으라고 명령을 내렸을 것이라고 본다’고 하였다.


또 3. 화엄사와 지리산편 1. 차의 유래 편에 ‘대렴이 가져온 차종자를 흥덕왕의 명령으로 지리산에 심게 한 80여년 뒤 신덕왕(神德王 : 912-917)때에 이르러 무성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주목(晋州牧)조에 ‘차는 성덕왕(聖德王: 702-737)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성행하였다’고 하였다. 또 그리고 소주석(小註釋)에 성덕왕과 신덕왕(780-785)은 동일(一作)한 왕이라고 잘못기록 하였다. 그 잘못 기록된 주석에 의하여 성덕왕과 신덕왕을 동일한 인물로 보게 되었는데, 그 잘못된 주석을 인용한 것이다.10) 즉 성덕왕대에 차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다는 말이다. 그리고 대렴이 차종자를 가져온 것은 최초가 아니며 신품종을 새로 들여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기에 밝힌 것과 같이 차나무는 선덕왕때부터 있었으며, 경덕왕때 충담사와 같은 선승들이 널리 유포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차나무는 선덕왕 시대부터 있었으며, “차나무가 무성하기 시작한 것은 신덕왕이 아니라 선덕왕과 경덕왕 사이에 있는 성덕왕 때(702-737)부터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840년 진감국사가 옥천사를 중창하고 나서, 중국에서 가져온 차종자를 심었다고 하는 내용이 쌍계사지(雙磎寺誌)에 전하고 있는데, 이 기록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현재 자라고 있는 차나무가 진감국사가 심은 차나무라고 봐야할 것이다. 또 화개동에 840년 이후에도 신품종 차종자가 여러 차례 심어져 가꾸어졌을 것이라고 본다. 그 까닭은 화개동 계곡은 차나무가 자라기에 알맞는 토질과 알맞는 기후조건이 갖추어져서 천하의 차명산지(茶名産地)로 알려져 왔으며, 차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지역을 소중하게 생각하여 왔기 때문이다.


초의선사도 동다송(東茶頌)11) 23송에 ‘지리산 화개동 차나무는 4~5십리에 연이어 자라고 있는데 동국(東國)에 있는 차밭으로 헤아려보면 이 차밭보다 더 넓은 차밭은 없다’고 하였다.
혹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2)이 ‘대렴공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종자는 화개동 계곡에 심었다’고 하였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산이 저술한 모든 문집과 기타 기록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갖 허언(虛言)으로 간주될 뿐이다.



2. 화엄사 장죽전 차밭과 차시배지

화엄사(華嚴寺)는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 17교구 본사이기도 하다.
화엄사지(華嚴寺誌)에 인도의 고승(高僧) 연기조사(緣起祖師)가 화엄사를 창건하고, ‘장죽전(長竹田)에 차종자를 심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연기조사가 장죽전 차밭에 차종자를 심었다는 내용을 밝히려면 화엄사 창건 연대를 밝히는 것이 차시배지에 대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일 것이다. 한국 다사(茶史)에서 화엄사 창건연대는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12)에서 화엄사 창건에 대하여 ‘시대는 분명하지 않으며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기록되어 있으며, 1936년에 지은 대화엄사사적(大華嚴寺事蹟)과 기타 여러 사적기에는 ‘진흥왕(眞興王)13) 5년(544)에 인도승려 연기조사(緣起祖師)가 화엄사를 세웠다’고 하였다. 또 구례속지(求禮續誌)에는 ‘진흥왕 4년(543)에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창건하였으며, 백제 법왕(法王: 599-600)14) 이 승려 3,000명을 화엄사에 입주(入住)하게 하여 수행을 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또 화엄사지에 신라 선덕왕(善德王: 632-646)때 자장율사(慈裝律師)15)가 화엄사를 증축(增築)을 하였으며, 문무왕(文武王: 661-680)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장육전(丈六殿)을 건립하였다고 하였다. 또 통도사지에 ‘인도 승려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짓고 나서 인도에서 가져온 차종자를 장죽전에 심었다’고 하였다. 위의 자료에서 밝힌 화엄사 창건과 증축에 대한 기록에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진흥왕과 선덕왕 때이면 삼국시대이다. 삼국시대에 화엄사는 백제 영토이었으며 국경에서 서로 팽팽하게 맞서있는 적국사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신라왕의 연대를 사용할 수 있었겠는가?
둘째 자장율사가 적국의 영토에 들어가서 중건(重建)할 수 있었겠는가?
셋째 의상대사가 건립한 장육전(丈六殿)의 사방의 석벽(石壁)에는 사십화엄(四十華嚴)경 내용이 화강암에 석각(石刻)되어 장식되었다. 이 화엄경석(華嚴經石)에 새겨진 화엄경은 원성왕 원성왕 : ?~798. 신라 제 38대왕. 재위 785~798년.성은 김. 이름은 경신(敬信)이다. 13년(797)에 번역된 정원본사십화엄(貞元本四十華嚴)이었다. 즉 장육전 돌벽에 새겨진 정원본 사십화엄경은 의상대사가 입적한 95년 뒤에 번역되어 신라에 들어왔으므로 의상대사가 장육전을 건립할 때는 사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넷째는 화엄사라는 절이름은 대방광불 화엄경에서 인용되어 지어진 이름이며, 화엄경의 사상을 종지(宗旨)로 삼아 수행하겠다는 뜻을 세운 수도사찰에서만이 가능한 이름이다. 그런데 화엄경사상은 인도의 대중부(大衆部) 불교 사상이 중국에 전하여져서 중국적 대승불교 화엄학(華嚴學)으로 발전된 경전이다. 인도에는 대승불교 철학은 있지만 화엄경이나 또 화엄종16)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다. 그리고 연기조사는 인도사람이므로 절을 짓고 화엄사라고 이름을 지을 수도 없으며, 화엄종(華嚴宗) 불교를 펼 수도 없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화엄경석을 포함하여 현존하는 화엄사의 석조물(石造物)들은 모두 8세기 후반부터 9세기에 걸쳐 조성되었다. 고 보는 견해가 학계의 정론(正論)이다. 그러나 의상대사는 625년-702년(77세)까지 살았으므로 장육전을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면 화엄경석도 7세기 초부터 8세기 초(625-702)에 만들어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화엄사에 현존하는 석조물과 화엄경석은 8세기 후반에서 9세기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의상대사가 장육전을 건립하였다는 연대와 약 150여년 이상의 차이가 있어 의상대사의 년대와 석물의 년대가 서로 맞지 않는다.

이러한 다섯가지 의문으로 오래전부터 화엄사 창건과 중건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이와같은 의문은 1979년에 신라 경덕왕대에 작성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17)이라는 화엄경사경(華嚴經寫經)이 발견되면서 화엄사 창건과 중건에 대한 모든 의문이 확연하게 풀리게 되었다.
이 사경의 발문에 의하면 연기(緣起=煙氣)는 서라벌에 있는 황룡사(皇龍寺)의 승려이며, 경덕왕 13년(754년) 8월 1일부터 화엄경사경을 시작하여 이듬해 (755년) 2월 14일에 완성시켰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연기가 실존인물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화엄사 창건년대가 진흥왕 때가 아니라 경덕왕 때이며, 자장율사가 중축하고 의상대사가 장육전을 건립하였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화엄경사경 제 1축 발문(跋文)에 ‘천보(天?) 13년(경덕왕13년 = 754년) 갑오년 8월 1일에 (화엄경 사경을) 시작하여 을미년(경덕왕 14년 = 755년) 2월 14일에 1부를 두루 이루었다.18) (사경을)이룬 서원의 취지는 황룡사(皇龍寺)의 연기법사께서 하신 것으로, 첫째는 아버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이루었으며, 두번째는 법계(法界)의 일체중생들이 모두 불도(佛道)를 완성하게 하고자 하시어 이룬 경(經)이다’ <중략>이라고 하였다.


황룡사 연기법사에 의하여 장육전이 건립되었으며, 정원본 사십화엄(貞元本四十華嚴)이 장육전 석벽에 새겨져 세워져 세워졌다는 것이 확실하게 밝혀졌다.
연기조사에 대한 실체가 밝혀짐으로써 화엄사 장죽전(長竹田)에 차종자를 심은 년대와 사람도 자연스럽게 밝혀졌다. 의상대사의 제자인 ‘연기법사가 차종자를 장죽전에 심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또 연기법사가 장죽전에 심은 차종자는 어느 나라에서 들여온 품종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중국의 화엄종에서 수학한 의상대사와 연기법사의 연관성과 연기법사가 중국에 가서 화엄학 유학을 하고 돌아온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인도보다는 중국에 가깝다는 것을 알수 있다.


즉 연기법사가 화엄학을 배우러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차종자를 가져왔으며, 화엄사를 창건하고 나서 장죽전에 심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대 화엄사 사적에 ‘연기조사가 차종자를 가져와서 절을 세우고 동시에 절 부근과 절 뒤의 긴 대밭(長竹田)에 차종자를 심었으며, 흥덕왕도 이곳에 차종자를 심으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또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19) ‘대렴(大廉)이 가져온 차종자를 장죽전(長竹田)에 심게 하였다’고 하였다. 연기법사가 중국에서 차종자를 가져와서 장죽전에 심었을 뿐만아니라 대렴이 가져온 차종자까지도 장죽전에 심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장죽전에 차종자를 심은 755년이 한국에 차종자를 심은 최초의 연대가 확실하다고 보며, 장죽전은 한국의 최초의 차시배지라고 하겠다.


대화엄사사적(大華嚴寺事蹟)에 장죽전(長竹田)의 위치를 화엄사 근처 산림내(山林內)절 뒷쪽이라고 하였다. 또 조선의 다와선 1. 차의 유래에 저자(모로오카 박사)가 장죽전을 가보았는데 ‘화엄사에서 1km정도 떨어진 산기슭 밑에 있는 황전리(黃田里)마을 부근에서 길 오른쪽 계곡을 건너 200m 정도에 있다. 현재(행정구역은) 마산면 황전리 (馬山面 黃田里)이며 면적은 3정보(9000평)정도이며 남서쪽 방향으로 약 20도 정도의 경사이었다’고 하였다.


또 1973년에 조사한 권태원(權兌遠)의 조사기록에 의하면 ‘화엄사 뒷산 계곡을 따라 잠시 올라가면 장죽전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 고장 사람들이 긴 대밭(長竹田의 뜻)이라고 부른다.’ 라고 하였다.
또 화엄사 대웅전과 장육전 주변의 긴 대나무 밭이 장죽전이라고도 하며, 화엄사 아래쪽 1km 지점 왼쪽 계곡 건너편 현재 호텔이 서 있는 주변이라고도 한다.


1)의상대사 : 신라 시대의 고승, 우리나라 화엄종의 개조(開祖). 성은 김씨이며 한신(韓信)의 아들이다.
2)성덕왕 : 신라 33대 왕. 재위 702-737. 성은 김씨. 이름은 본래 융기(隆基)였으나 뒤에 흥광(興光)으로 고침. 신문왕의 둘째아들이다.
3)육조혜능 : (六祖慧能 638-713) 중국 당나라때 고승. 중국 선종의 대성자로서 5조 홍인(弘忍)의 법을 이었다. 남해 신흥(南海 新興)사람이며 속성은 盧氏이다. 보리달마조사의 법을 여섯번째로 이었다고하여 선종(禪宗) 동토(東土)의 제 6조라고 한다.
4)문성왕 : ?~857 신라 제 46대왕. 재위 839~857.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경응(慶應)이다.
5)진감국사 : 774~850. 830년(흥덕왕 5년 당에서 귀국하여 상주, 설악산, 장백사에서 선(禪)을 가르치니 배우는 사람이 구름같이 모였다고 한다. 840년 옛 옥천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한국불교에서 최초로 범패 음악을 도입하여 쌍계사의 암자 국사암(國師庵)에서 중흥시켰다.
6)진성왕 : ?~897. 신라 제 51대 왕. 재위 887~897. 신라시대 3인의 여왕중 마지막 여왕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만(曼)이다
7) 진감국사대공탑비 : 진성왕 1년(887) 옥천사를 쌍계사로 고쳐 부르게 하고 최치원(崔致遠)에게 글을 짓고 쓰게 하여 세웠다. 국보 228호
8)최치원 : 857~?. 신라 말기의 학자이며 문장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라고 한다.
9) 화엄사와 지리산 1 차의 유래편 주석에 ‘화엄종(華嚴宗)대찰로는 화엄사(華嚴寺)가 유일하지만, 당시 지리산에는 현재 차나무가 자라고 있는 4사찰 중에 연곡사(燕谷寺: 544년 창건)가 있었으며, 천은사(泉隱寺)는 흥덕왕 3년(828년)에 창건되었으며, 쌍계사(雙磎寺)는 723년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창건한 사찰 기초에 830년 진감국사가 건립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감국사가 문성왕 2년(840년)에 크게 중창하였다.
10)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至聖德王(一作神德王)始盛焉
11)동다송 : 조선 후기의 고승. 초의(草衣)가 차문화와 다도(茶道)의 진수를 송(頌)형식으로 지은 책. 책을 지은 정확한 연대는 1837년이며 대둔사 일지암에서 찬술한 것으로 알려으며 모두 31송으로 되어 있다.
12)다산 정약용 : 1762~1836.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미용(美庸)이며 호는 다산(茶山)이다.
12)동국여지승람 : 1481년(성종 12년) 50권으로 편찬되었는데 1477년 편찬한 팔도지리지에 동문선에 수록된 동국문사(東國文士)의 시문을 첨가하였다.
13)진흥왕 : 신라 24대왕. 재위 540~576. 성은 김씨. 이름은 삼맥종(三麥宗), 지증왕의 손자로 법흥왕의 아우 입종갈문왕의 아들이다.
14)법왕 : 재위 599-600. 제 29대. 휘는 선(宣) 또는 효순(孝順), 즉위 원년에는 민가에서 기르는 매를 날려보내었으며 2년에는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다.
15)자장율사 : 590~658경. 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성은 김씨 속명은 선종랑(善宗郞) 신라 남산종의 개조이다.
16)화엄종 : 화엄사상을 천명한 불교종파.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고승 의상이 661년 당나라에 가서 화엄교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671년 이후에 시작되었다.
17)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 신라때 백지에 먹으로 쓴 대방광불화엄경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경(寫經). 국보 제 196호로 지정되어 있다.
18)<제 1축 발문>
天寶十三載甲午八月一日初 乙未載二月十四日에 一部周了成內之하였다.
成內한 願旨者는 皇龍寺의 綠起法師가 爲內賜하여 第一은 恩賜 父가 願爲 內? 하며 第二
法界一切生이 皆成佛欲爲賜以成賜乎이다-<중략>
19)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 선덕왕 5년(636)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에게 가사와 사리를 받아 643년에 귀국하면서 가지고 와서 선덕왕 15년(646) 통도사를 창건하고 탑에 사리 가사를 안치하였다는 내용을 기록한 사적(寺蹟)이다.

Ⅲ. 결 론

1. 차종자의 전래와 차시배지에 대한 이모저모


신라 백묵서 대방광불 화엄경 발문에 의하여 화엄사를 창건한 년대가 755년이며, 창건주가 의상대사의 제자 연기법사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연기법사가 차종자를 심은 장죽전이 한국 최초의 차시배지라고 확신 하는 데에는 경덕왕(742-765) 시절을 즈음하여 있었던 일을 기록한 차문화에 대한 여러 자료에서 나타나고 있다.


육우 다경 상권 1. 차의 근원 4장1)에 ‘차잎을 딸 때 절기에 맞추어 하지 않으며, 차를 제조할 때 정성을 들여 섬세하게 하지 않아 잡풀이 섞인 것을 마시게 되면 질병이 생긴다. 차가 (사람에게) 허물이 되는 경우이다. 또한 인삼도 차와 같아서 상품은 상당현(上黨縣)에서 생산되며, 중품은 백제와 신라에서 생산되며, 하품은 고구려에서 생산된다’고 하였다. 당 육우가 천목산 소계에서 760년경 부터 765년 까지 은거하며 저술한 다경에서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구려에서 차생산과 품질을 인삼에 비교하여 논하였다는 것이다. 혹 이 기록을 인삼만을 논한 것이지 차를 같이 논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다경 하권 7. 차의 옛일 37장에 ‘동군록(桐君錄)에 서양, 무창, 노강, 석릉에서 (사는 사람들이) 차(茗)마시는 것을 좋아하는데, 모두 동인(東人=東夷)들이 만들어 마시는 청명(淸茗)차를 만든다’고 하였다. 동인(東人)은 동이(東夷)2)를 뜻하며 옛 조선 사람들이 청명차를 즐겨 마신다는 것을 말해 주며, 차와 인삼을 비교하여 논한 자료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일본 동대사지(東大寺誌)에 ‘백제승려 행기보살(行基菩薩: 668-749)이 동대사에 말세의 중생들을 위하여 차종자를 심었다’고 하였다. 행기보살이 일본 동대사에 건너갈 무렵은 50세(718)경에서 60세(728)경으로 추정된다. 이 자료는 718~728년경에 백제에 차나무가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1971년 7월 8일 공주 무녕왕릉(武寧王陵)3)에서 발굴된 금관 등 약 2500여점의 부장품이 출토되어 공주 박물관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2500여점의 부장품 가운데 은탁은잔(銀托銀盞)이 있다. 이 은탁은잔이 찻잔이었다고 본다. 왕비의 머리부분 남쪽에서 발견되었는데, 잔대(盞臺)와 잔(盞), 뚜껑(蓋) 세부분으로 나누어졌으며 만든 재료는 모두 은(銀)으로 되어 있다. 잔대(盞臺)는 중앙에 높은 받침이 있고, 얇고 넓은 굽이 있는 접시형인데, 하단(下端)을 중심으로 연화문대(蓮花文帶)가 돌려져 있다. 이 은탁은잔이 백제 무녕왕시대 왕비가 사용하던 차잔으로 사용하였다고 생각한다.


잔(盞)은 높은 굽이 달린 다완모양(茶碗形)이며 굽이 작아 잔대(盞臺)받침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표면에는 구연(口緣) 바로 아래에 구름 문양(雲文)이 있고 그 밑으로 길게 동체(胴體)를 휘감은 용 3마리가 음각되어 있다. 이 아래로 일조(一條)의 음각(陰刻) 횡대(橫帶)를 돌리고 굽을 중심으로 하여 여덟개의 연잎과 연꽃을 돌리고 자방(子房)이 솟아 있는 형식이며 이 꼭지를 중심으로 주위에 연꽃과 여덟개의 잎이 조각된 금판(金板)이 붙어 있고 그 아래 다시 중판형(重辦形)의 연꽃이 음각 되었으며, 이 연꽃 밑의 전면(全面)에는 고사리형의 문양이 산모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돌려져 있고, 이 사이에 날개를 편 수금(水禽) 한 마리가 음각되어 있다. 전체적인 문양의 선이 몹시 부드럽게 표현돼 있어 당시의 예술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잔의 모양과 장식과 문양과 발견된 위치등을 고찰해 보면 차잔이었다는데에 믿음이 간다.

또 8-9세기경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이와 동일한 모양과 형식의 녹색 유약을 한 잔탁과 잔(綠釉托盞?반환문화재. 국립박물관 소장)이 출토되었다. 이 녹유탁잔과 비교하여 보면 이 녹유 잔탁과 은탁은잔은 차잔(茶盞)이었다는 것에 더욱 믿음을 준다. 그리하여 무녕왕 시대에 왕실과 사원(행기보살 차생활)에서 차 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백제에 차나무가 재배되었다는 것도 시사(示唆)하여 주고 있다. 혹 술잔으로 사용되었을 상황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술잔으로 사용되었다면 잔의 형태가 다르고 뚜껑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왕비의 머리부분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왕비가 사용하던 다기(茶器)이었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하겠다. 또 이 은탁은잔은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정원다(貞元茶)라고 명문(銘文)이 새겨진 다완(경주 박물관 소장)과 형태가 비슷하여 백제와 신라에서 같은 맥락의 차그릇 형태를 취하여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 경덕왕 시대의 차문화

신라 경덕왕(景德王: 742~765) 때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시킨 100년 정도 되어가는 시기이었다. 100년 동안 전쟁이 없는 평화 시대가 이어지고 풍년들어 마을의 거리마다 태평가가 흘러넘쳐 신라 1000년 역사 중에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신라 전지역이 구주(九州)로 나누어 다섯 작은 도시(五小京)를 두고 117개의 군(君)과 293현으로 구분하여 전국을 수일(數日)내에 총괄할 수 있는 행정체계를 완비하였으며, 나라의 제도와 관직을 다시 편제(編制)하고 당나라와 일본 등의 외국과 교역(交易)을 하여 산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러한 평화시대와 산업발전으로 문물이 풍요롭게 되었는데, 그 영향에 따라 차문화도 크게 발전하였다.


대체로 그 앞시대까지는 수입한 차에 의지했던 차 공급을 이때부터 국내 생산으로 점차 자리잡게 되었다고 본다. 차생산뿐만 아니라 신라의 고유정신 문화와 학문도 높이 받들어져 크게 발전하였다.
신문왕(681-692)과 효소왕(692-702)대부터 화랑과 낭도들을 지도하였던 네국선4)(四國仙)의 활동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경덕왕 대에 이르러서 큰 결실을 보게 된다. 네 국선의 지도를 받은 화랑과 낭도의 풍류도(風流道)5) 정신은 명산대천(名山大川)과 동해안변 등 전국 곳곳에 찾아다니면서 차생활과 더불어 수련하였다. 그들이 수련한 곳이나 지나간 곳에는 반드시 돌샘(石泉), 돌부뚜막(石?), 돌절구(石臼), 돌솥(石釜) 등의 다구(茶具)들을 볼 수 있었다.


화랑의 정신과 덕목, 그리고 세속오계, 자연과 조화하여 멋과 인격을 다듬은 풍류 차생활은 신라인의 자랑일 뿐 아니라, 한국 오천년 역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정신문화, 풍류예술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경덕왕대의 정신문화와 경제성장은 동양 최대의 동종 성덕대왕 신종을 주조되고, 불국사, 석굴암, 굴불사 등 크고 작은 수많은 사찰들이 건립되고 경주 남산에 수천의 석불, 마애불, 석조물들이 만들어지게 하여 신라 문화의 찬란한 금자탑을 쌓게 하였다.


경덕왕 10년(751년)에 문관을 지낸 김대성(金大成)6)이 토함산 남쪽 기슭에 불국사(佛國寺)를 창건하여 현세의 부모님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전생의 부모님을 위하여 석굴암(石窟庵)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연기법사가 화엄사를 창건하고 장죽전에 차종자를 심어 신라인의 차양식을 자급자족(自給自足)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당시의 사람들이 차문화에 얼마만한 가치를 두었는가 살펴보고자 한다. 석굴암은 중앙의 부처님을 중심으로 하여 세보살상, 십대제자, 두 천왕, 사천왕 등이 중앙에 안치한 석가모니불을 둥글게 서있는 자세로 모시고 있다. 석가모니불 오른쪽 제석천 옆에는 찻잔을 든 문수보살상이 있다. 문수보살은 석가모니불의 깨달음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이 지혜의 보살이 중앙의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다소곳이 다가가서 차를 올리려는 동작을 시작하려는 듯이 서있다. 입체 양각으로 조성된 문수보살상의 오른손에는 찻잔이 들리어 가슴 상단으로 향하여졌는데 마치 차의 빛깔, 향기, 기운을 먼저 감별하고서 올리려는 눈초리가 찻잔에 내려와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활처럼 휘어진 긴장미가 있는 선의 자세와 늘씬하고 부드럽게 흐르는 신체와 천의 자락에는 우아한 율동이 흘러 넘친다. 그리고 목과 전신(全身)에 걸친 호화로운 장식이 당시의 신라경제의 부유함을 간직한 채, 무궁한 재보(財寶)를 가지고 중생에게 가없이 가피력을 펴는 보살의 자태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찬사(讚謝)를 아무리 크고 거룩하게 하여도 오히려 모자란다. 문수보살상의 손에 찻잔이 들려 있다는 것은 석굴암에서만 볼수 있는 희유한 모습이다. 이것은 신라의 풍류도의 예술성과 차문화 정신이 낳은 걸작으로 차를 달여 부처님께 올리려는 숭고한 신앙정신을 보여준 것이며, 고대인도 불교에서 부여한 알가(閼加)7)에 담긴 의미, 미묘근원(妙原)을 밝힌다는 뜻이 담겨 있다.


경덕왕대의 화랑도 문화는 신라 어느 한 지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라 전지역의 귀족과 서민들 사이에 퍼져 있으므로 화랑과 낭도들이 차를 마셨다는 것은, 신라 사람들 모두가 차를 알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한 견해가 아닐 것이다. 또 길일(吉日)에는 부처님께 차공양을 올릴 줄 알았으며, 존귀한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것이 최상의 대접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풍속 문화가 석굴암 문수보살 손에 찻잔을 들게 한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풍토가 경덕왕대에 연기법사가 차종자를 들여와 장죽전에 심게되였으며, 그뒤로 입당회사(入唐廻使) 대렴과 진감국사 등, 중국을 왕래하는 학자 승려 관료들에 의하여 차종자가 계속 들어와서 차나무가 자랄수 있는 곳이면 전국 각처에 심어졌다고 본다. 다만 차종자를 심은 사실을 기록하지 않거나 처음부터 기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본다.


1)다경 1. 차의 근원 4장 : 採에 不時하며 造에 不精하여 雜以卉莽을 飮之하면 成疾한다. 茶가 爲累也이다. 亦猶人參하여서 上者는 生上黨하며 中者는 生百濟와 新羅하며 下者는 生高麗한다.
2) 동이 : 중국의 동북방에 분포한 민족을 중국인이 부르던 명칭. 특정한 종족을 지칭하기보다는 중국의 한문화와 상대적인 문화개념으로 호칭된 것이다.
3)무녕왕(武寧王: 501~523)은 백제(百濟) 제 25대 왕이다. 무녕왕은 중국에 백제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으며, 일본에도 측근의 황족(皇族)을 보내어 다스리게 했던 임금이다.
4)네국선(四國仙) : 영랑(永郞) 술랑(述郞) 안상(安祥) 남석행(南石行)
5)화랑이 지켜야 할 도덕. 유(儒), 불(佛), 선(仙) 세 교의 정신을 받들고 오계(五戒)와 삼덕(三德)을 신조로 하여 애국애족을 표방하였다.
6)김대성(?-774). 신라 경덕왕 때의 정치가. 대정(大正)이라고도 한다. 불국사의 창건 공사를 주관하였으며 이와 관련된 연기설화가 삼국유사에 실려있다.
7)고대 인도불교에서 茶를 閼加(Argha)라고 하였다. 그리고 Argha에는 始原, 原初, 妙原, 無着波羅密이라고 해석한다.

자료출처 http://www.teabox.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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