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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늘의 성경관과 성경의 권위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0. 7. 11:21
오늘의 성경관과 성경의 권위



서언:한국장로교회와신학에서성경관의문제

한국에서 100년 남짓 짧은 기간동안 장로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한 근본 요인은, 초창기부터 성경 중심의 목회, 성경 중심의 신학 교육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그리스도인의 모든 신앙과 생활과 신학의 가장 중심적인 규범으로 삼는 것은, 개혁교회 전통의 신앙과 복음주의 신학의 일대 특징이다. 한국의 장로교회와 그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 믿고 가르쳤으며, 한국의 장로교인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믿었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신앙과 생활에 힘썼다. 한마디로 한국 장로교회는 성경의 권위에 기초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파하는 분명한 복음주의 성경관과 장로교회의 신학 노선이 그 주류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 역사에서도,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신학이 생겼고, 성경에도 오류가 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1920년대에 이미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서고도(徐高道)의 영향을 받은 조희엽 목사는,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문학적 오류는 물론, 다수의 역사적 오류와 과학적 오류가 있다”라고 주장하여 큰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김양선,『한국 기독교 해방 10년사』, 1956, 186쪽). 한국 장로교회에서 성경의 유오성에 관한 주장은 1934년 제23회 총회에서 모세 5경 저작 문제와 여권(女權)과 관계된 바울 서신 해석 문제를 통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했고, 아빙돈 단권주석이 번역 출판됨으로써 한국 장로교회는 이러한 성경 유오성 주장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는 김재준이 신정통주의 성경관에 입각하여 성경이 구원을 얻는 도리에서는 신앙과 행위에 불오함(Infallibility)을 믿으나, 역사적 과학적 문서로서는 무오(Inerrancy)하지 않고 오류(Errors)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 장로교회는 분열의 역사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95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대분열은 교회사적으로는 1920년대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겠으나, 신학적으로 미국 장로교회나 한국 장로교회가 분열된 그 근본적인 뿌리는 성경관의 차이에 놓여있고, 그 성경관의 차이란 크게 보아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성경무오설이냐 성경유오설이냐로 나누어지는 것이었다.
현대 성서학에서 보수주의(Conservatism)란 성경 본문의 통일성과 기록된 사건의 역사성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는 입장인데 반해, 자유주의(Liberalism)는 성경 본문 상호간의 모순점들(또는 오류들)을 지적하고 그 기록된 내용의 역사적 사실성과 정확성에 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입장이다(James Barr, History and Ideology in the Old Testament:Biblical Studies at the end of a Millennium, Oxford, 2000, 20쪽 참조).
요컨대, 개혁교회 전통의 보수주의는 성경무오설을 말하고, 자유주의는 성경유오설을 주장한다. 그런데 21세기 현대 기독교 신학에서 성경관은 단순히 보수냐 자유냐의 양대 구도로 정리되지 않고 보다 다양한 입장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여러 가지 성경관들의 입장을 분석해 보면서 오늘 우리는 성경적인 올바른 성경관의 확립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경관의 유형들

21세기 기독교신학, 특히 성서학에서 성경관은 다소 복잡하고 다양하게 나타나지마는, 그 중요한 차이점들은 4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개혁교회 전통의 성경관이며 보수적인 신학의 입장이다. 비록 성경에는 사탄의 말, 뱀의 말, 거짓 예언자의 말, 우상숭배자들의 말도 기록되어 있으나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도구들로써 하나님이 사용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둘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성경관으로 알려진 것인데, 성경에는 인류의 보편적인 진리가 담겨져 있으며, 이러한 보편적인 진리(예컨대, 사랑, 자유, 평등 등)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유대 종교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저급한 도덕­윤리나, 편협한 종교적 독선 등도 발견되는데, 성서학자는 이러한 종교 발전 역사를 시대별로 잘 연구하여, 성경에 포함된 보편타당한 진리를 찾아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관은 소위 신정통주의 신학의 입장인데, 역사적으로 성경은 본래 히브리 종교의 고대 문서이지만, 오늘도 하나님께서 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각자의 체험을 통해, 성경은 오늘도 우리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신정통주의 성경관은 개개인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만남”의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넷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급진주의의 입장인데, 성경은 다만 오늘 우리에게 역사적인 참고서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며, 과거에 실패한 역사적 교훈을 되살려서 다시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게 하는 전거일 뿐이라고 본다. 주로 현대의 급진주의 신학과 “행동”신학(Doing Theology)에서 나타나는 성경관인데, 여기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의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그 “실천”(Praxis) 자체가 “본문”(Text)이고, 그 “실천” 속에서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초기 민중신학의 서남동이나 안병무에게서 나타나는 입장이다.
교회사적으로는 주후 2세기 이단이었던 마르시온이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했고, 이러한 마르시온적인 급진주의가 독일 신학자 하르낙이나 현대의 불트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과 신학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성경(신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성경관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앞서도 잠깐 언급한대로, 서구의 자유주의 신학 사상의 영향과 특히 1930년대 이후 신정통주의 신학이 들어와 1950년대 기독교 장로회(한신대)가 분립하면서, 한국 장로교회 내에도 성경관 논쟁과 그로 인한 신학적 입장의 혼란 양상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여기서 먼저 한가지 언급해 둘 것은 한국 장로교회의 보수적 성경관은 1930년대로부터 1950년대 장로교회 대분열을 거치면서, 근본주의적 입장과 복음주의적 입장으로 그 입장이 구별된 점이다. 보수적인 성경관에 있어서 근본주의나 복음주의의 내용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으나, 그 분기점은 그 입장을 나타내는 “태도”에서 구별된다. 한철하는 이 점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보수신앙 전통이 1930년대에 와서는 그 성격을 달리 하기 시작하였다. 앞서 언급한대로 보수주의가 내용적 신앙적 보수주의에서 태도상의 보수주의로 변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미국에서 벌어졌던 보수신학과 자유신학의 싸움의 여파가 한국까지 파급되어 온 데 기인한다”(한철하, “보수신학의 어제와 오늘”,『기독교사상』, 1970, 99쪽). 여기에 대해 박용규도, “(초기 한국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성경관에는 성경의 이중적 성격, 즉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적인 요소와 성경이 인간 저자들을 통해서 기록되었다는 인간적인 요소가 잘 조화를 이루고 균형이 맞추어져 있는 것에 비하여 박형룡 박사의 성경관에는 이것이 다소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라고 시인하였다(박용규,『한국장로교 사상사­한국교회와 성경의 권위』, 총신대학출판부, 1992, 240쪽).
같은 개혁교회 전통의 정통­보수신학을 계승 발전시키면서도, 한국 장로교회의 복음주의 성경관 입장은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에 대해 인내와 대화의 자세로 연구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입장을 취한 데 반해, 근본주의는 “축자영감설”을 내세워, 자신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 모든 상대적 입장들을 백안시하거나 적대시하고, 전투적이며 배타적이고 분리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정통주의 성경관을 가지고 성서유오설을 끝까지 주장하여 자유주의 신학의 대변자로 알려진 김재준이나, 성경무오설을 내세워 끝까지 전투적으로 맞서 싸움으로써 한국의 메이첸이란 이름을 얻은 박형룡이나, 명분은 성경적인 “성경관”을 내세운 진리 싸움이었으나, 사실은 자기의(自己義)를 위한 다툼의 성격이 더 농후하였다. 그래서 김양선은, “만일 김재준 교수가 계속적으로 보수주의 신학을 강렬히 비판하지 않았다면 금일과 같은 장로교회의 분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김양선, 위의 책, 197쪽)라고 했으며, 비평학자 자신들도 이 당시 성경관 논쟁에 관해, “영감설과 무오설에 저항하고 충돌과 분열을 야기시켰으나 그 귀중한 댓가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학문적 연구의 개척을 위한 거점도 확고히 하지 못했다”고 통렬히 반성했다(허혁, “한국에서의 역사비판학의 제문제”,『신학사상』, 1973, 제3집, 70쪽).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 장로교 신학의 보수주의 성경관에서, 근본주의 성경관과 복음주의 성경관을 구분해 보아야 한다. 근래에는 복음주의 입장에서도, 역사­비평적 방법이 가져온 성서연구의 결과를 어느정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소위 “신복음주의 입장”이 등장했으며, 이에 따라 신복음주의 성경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소위 “에큐메니칼” 성경관을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주로 WCC의 “신앙과 직제” 분과에서 성경의 권위와 그 사용과 해석 문제에 관해 세계 여러 교단들(로마 천주교까지 포함하여)의 대표들의 의견들을 수렴하여, 하나의 공통된 이해를 찾아보기 위해 출판한 소책자 “The Bible:Its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in the Ecumenical Movement”(ed. by Ellen Flesseman-van Leer, Faith and Order Paper No. 99, 1980, Second printing 1983; 한글번역은, 이형기,『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와 해석』,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참고)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문건에서 취급하는 내용은 하나의 완성되고, 인준된 “성경관”이 아니고 세계 교회들이 협력을 이루어 나가는데 한 중요한 기반으로서, 성경의 권위와 그 해석과 사용에 대한 공통된 이해를 추구하기 위해 첫 발을 내디딘 시도에 불과한 것이다. 루카스 피셔는 그 서문에서, “… 이 보고서들 속에서 인식할 수 있는 의견수렴들은 아직도 하나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그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이형기역, 위의책, 9쪽). 그러므로 현재로서 에큐메니칼 성경관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소책자에서 성경관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증언과 복음전승을 중요시한 나머지 그 “복음 전승”(대문자 T를 쓰는 “전통”)을 성경의 기원으로 보고 성경의 권위와 병치시키는 데 있다. 인용하면, “그 보고서의 중요성은 전통과 성경이 두 개의 독립적인 실체들이 아니라는 인식에 놓여있다. 그것들은 너무 얽혀 있어서 그것들 중 어느 하나도, 비록 본질적인 것으로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권위있는 것으로 사용될 수 없다”(이형기역, 위의책, 14쪽; “2. Scripture, Tradition and Traditions”, 18쪽 이하, 특히 20쪽 참조). 이것은 로마 천주교가 교회의 전통을 성경의 권위보다 앞세우려는 새로운 형태의 에큐메니칼 공작에 불과하다.
최근 윤철호는 “해석학적 복음주의” 성서관이란 다소 새로운 입장을 소개했는데, 이것은 성경이 “… 하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의 경험에 대한 초기 신앙공동체의 원초적이고도 다양한 증언들로서 후대의 교회의 신앙과 삶과 신학을 위한 ‘규범적 전거’(normative reference)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윤철호, “에큐메니칼 개혁 신학과 신학 교육”,『교회와 신학』, 2001 여름호 제45호, 19쪽). 이때 해석학적 복음주의 성서관에서 성경은 “상대적 적절성”(relative adequacy)을 지닌다고 한다(위의글, 17쪽, 특히 각주 2번 참조). 이러한 성서관은 결국 성경의 문자적인 절대적 진리주장의 명제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으로 여겨진다. 성경본문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며, 무시간적이고 비역사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상대적 적절성”이라는 이해는 가능한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진리주장이 교회의 “규범적 전거”로서 상대적인 성격만 가지고 있고 절대성이 없다고 할 때, 과연 오늘의 종교 다원주의나 포스트 모더니즘에 맞서서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구원의 진리의 절대성이나 성경의 권위를 주장 할 수 있겠는지 염려된다.



성경의 권위:계시와 영감

개혁교회 전통에 선 복음주의 성경관에서 보는 성경의 권위는 계시와 영감에 근거한다.
먼저 계시(Revelation)란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온 용어인데, 성경이 계시되었다는 뜻은 성경의 기원이 인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서 온 것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성경의 계시성에 대한 주장의 근거로서 우리는 베드로후서 1장 20-21절의 말씀을 생각할 수 있다:“성경의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아서 한 것입니다.”
아모스 3장 7절에서도,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했다. 이것은 성경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속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나 하나님과 성령의 하신 일에 대한 경험을 증언하는 내용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말한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윗이,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2)라고 한 것이나, 구약의 예언자들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렘 1:4; 호 1:1 등)라고 한 것도 성경의 기원이 인간의 “증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 방법을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행동(역사와 일상에서의 사건들)과 말씀(이야기)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말씀하시며 행동하신다. 성경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해 주고 있다. 예컨대, 성경에는 출애굽사건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출 3:2-10; 겔 20:6-10 등 참조). 그러므로, 히브리서 1장 1-3절에서는,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시켜서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의 자력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건을 이해 할 수도 없고 스스로 증언할 수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주장이다(롬 1:18-25 참조).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통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아는 일반 또는 자연계시 만으로는 하나님의 경륜과 구원의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없기 때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을 “특별계시”로 인류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관을 말할 때, 성경의 계시성을 인정하는가? 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이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하신 분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인간의 상대적이며 다양한 “증언들”이라는 설명도 일리는 있으나, 성경의 권위를 말하기에는 미흡한 입장이다. 예수님 자신도 그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하신 일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셨다:“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다 그들에게 주었사옵고 또한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았사옵니다”(요 17:8). 그래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밝히셨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며 계시된 진리로 이해해야 그 권위가 비로소 바로 드러나게 된다. 성경을 과거에 인간들의 종교적 경험들을 통한 다양한 증언들로서만 이해하면 기껏해야 종교학이나 종교철학, 종교심리학의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성경을 계시로 수납할 때만 진정한 성서신학이 성립된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은 그 자체가 진리 말씀이며 진리는 스스로 권위를 가지고 있고 증명이 필요 없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그 진리를 옹호하거나 그 권위를 세우려는 노력은 잘못이라고 한다. 일리가 있는 견해이다. 그러나 성경의 계시성이 부인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진리와 권위가 도전 받을 때, 양심있는 신학자들이 과연 수수방관만 하고 짖지 않는 벙어리 개처럼 쳐다만 보고있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성경의 계시를 말하는 것은 성경의 기원과 저자가 하나님 자신이며, 인간은 그 기록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둘째로, 성경의 귄위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영감(Inspiration)을 말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인간들을 위해 기록한 것이라면, 그 말씀은 정확한 사상과 분명한 언어로써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오류와 모순 투성이로 기록되어 있고, 부정확하고 믿을 수 없는 꾸며낸 이야기들이라면, 성경의 권위는 설자리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계시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된 내용을 지시한다면, 영감은 그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인간 기자들을 통해 올바로 전달되며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행동방식을 지칭한다.
전통적으로 성경의 영감을 말하는 성서학자들은 그 근거를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이끌어온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요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의로 교육하는 일에 유익한 책입니다.”(새번역 신약전서, 1973, 1987). 여기서 영감에 관계된 핵심적 용어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번역된 희랍어 “데오푸뉴스토스”이다. 이 용어의 본래적인 뜻은 “하나님에 의해 숨이 불어넣어진 것”(God-breathed)이다. 즉 기록된 성경 말씀은 죽은 문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viva vox Dei)이라는 것이다(히 4:12; 엡 6:17 참조). 그런데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딛 1:2; 민 23:19; 히 6:18 등 참조), 성경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가 없고 모순이 없다고 해야 한다.
물론 성경에 하나님이 직접 기록하신 경우는 드물다(출 31:18; 신 9:10; 출 32:16; 34:1 참조). 하나님께서는 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다(출 17:14; 신 31:9; 수 24:26; 렘 36:4; 눅 1:1-4 등). 그래서 비평하는 사람들은 인간 기자의 실수나 한정된 지식과 능력 때문에 성경의 기록에도 오류나 모순이 발견된다고 한다. 여기서 성경의 친필원본(Autographs)의 문제가 제기된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사본들뿐이며, 성경의 사본들에서는 필사자의 오류나 다른 읽기나, 본문 배열상의 차이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창환은, “5,500여 개의 신약 사본들이 하나도 예외가 없이 다 서로 다르며, 따라서 원본과는 차이가 있는데, 그런 대로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이 어느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이다”(박창환, “텍스투스 리셉투스의 정체”,『성경원문연구』, 1997년 8월 창간호, 22쪽)라고 밝히고, 본문 비평 작업의 필요를 주장했다. 그러면서 오늘까지, “아무리 변개가 심한 사본일지라도 교리를 바꾸게 할 만큼 심하게 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본문 비평학자들의 정설이다”(위의글, 31쪽)라고 현재의 상황을 올바로 지적하였다. 이것은 구약 사본들과 본문 비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사본상이나 번역본들에서는 필사자의 실수나 번역상의 오류가 다소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친필원본의 경우는 어떠한가? 친필원본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단정하기 곤란한 문제이지만, 오늘날 아무리 변개가 심한 사본이라도 교리를 바꾸게 할 만큼 심각한 문제는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친필원본에서 오류나 모순이 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본문의 의미파악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단어의 일 점, 일 획, 토씨까지 친필원본에서는 영감되었기 때문에 잘못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소위 문자적­기계적 “축자영감설”은 성경적으로나 역사적 현실로 성립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가 말하는 성경관이 아니다. 개혁자 쟝 칼뱅도 기계적 축자영감설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사본이나 본문 전승 과정에서 필사자의 오류는 제한된 범위에서 언급하였으나, 오늘날 자유주의나 신정통주의가 전제하는 역사­비평적 방법의 관점에서 성경의 오류를 말한 적이 없다. 칼뱅은 그가 가지고 있는 성경 본문이 본래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보여준다고 믿었고, 성경 본문의 계시 내용에 “진정한 오류”를 인정하지 않았다(K. S. Kantzer, “Calvin and the Holy Scriptures”, Inspiration and Interpretation, ed. by J. W. Walvoord, Eerdmans, 1957, 144쪽 참조). 그래서 쟝 깔뱅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역사­문법적 방법”(Historical- Grammatical Method)의 창시자가 되었고, 이후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는 “역사­비평적 방법”에 맞서서 “역사­문법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성경의 권위를 앞세우는 데 있어서, 성경의 영감성을 말하는 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비록 인간 기자의 손을 통해 기록되었으나, 그 성경의 기록은 오류나 모순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 기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때, 그의 사상과 언어와 표현력까지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계시가 왜곡되지 않게 하셨다고 본다. 이것이 언사(또는 언어)영감설(Verbal Inspiration)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것을 “축자영감설”로 번역하거나 설명하면 문자주의에 빠지게 되고, 근본주의 성경관이 된다. 또 하나님께서 인간 기자를 사용하실 때 결코 무의식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받아쓰게 하신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고, 인간 기자의 신앙인격과 그 개인의 성격, 장점, 특징을 그대로 사용하셨다고 본다. 이것이 기계적 영감설에 대한 유기적 영감설(Organic Inspiration)이다. 나머지 또 한가지는, 성경을 기록할 때 기자의 인간적인 생각이 많이 들어갔다는 주장을 우리는 거부한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전해주고 있으며, 어느 부분만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흔히 신정통주의나 루터교파에서는 고린도후서 4장 7절을 인용하여,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물이 담겨 있습니다”를 성경관에 연관시켜서 성경 내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이분법적 위계질서(Hierarchy)을 조성하는 것(루터교파의 “Kanon im Kanon”)은 다분히 인위적인 것이다. 성경은 부분적으로 영감되 부분적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모든 성경이 영감되었으며 이것이 완전영감설(Plenary Inspiration)이다. 그러므로 성서학적인 관점으로 종합해 보면, 오늘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 성경관에서 영감설이란, “언어적­유기적­완전영감설”(Verbal­Organic­Plenary Inspiration:VOP Inspiration)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다.
이제 복음주의 성경관은 문자적 근본주의 성경관(축자영감설)이나, 성경이 보편적 진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한다는 자유주의 성경관이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인간의 증언으로서 역사적으로는 오류와 모순이 있으나 성령께서 “지금 여기서” 그 성경 말씀을 하나님 말씀이 되게 하셔서 그 하나님 말씀과 만나는 체험을 통해서만 하나님 말씀이 된다고 하는 실존주의적 신정통주의 성경관과는 차별화되는 입장이다.
오늘 한국 장로교회 신학에서 문자적인 근본주의 성경관은 점차 그 “태도”의 잘못으로 인하여 곤경에 처해 있다. 한편, 자유주의 성경관이나 급진주의 성경관도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는 신학적인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오늘의 성경관의 문제는,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 성경관에 대한 인식이 투철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흔히 신정통주의 성경관을 논쟁적인 관점에서 자유주의 신학으로 매도하거나, 그와는 정반대로 개혁신학 전통의 복음적인 것으로 착각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신정통주의는 그 “신”자가 의미하는 대로, 개혁교회의 신앙과 신학전통을 부활시키고 발전시켰다고 하기보다는, 그것을 수정한 수정신학이며, 수정된 성경관이 확실하다. 춘계는 현재 한국 교회내에 근본주의 성서관, 자유주의 성서관, 바르트신학의 복음적 성서관의 세 가지유형의 성서관이 있다고 전제하면서 신정통주의 “복음적 성서관”을 지지하고 있는데, 춘계 자신이 이 점에서 오랫동안 의심을 받아 오던 베일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신학적 입장이 신정통주의라고 분명히 한 점은 잘한 것이다(박용규는 이미 춘계의 신학적 입장이 신정통주의라는 점을 밝힌 바 있다:『한국장로교사상사­한국교회와 성경의 권위』, 총신대학출판부, 1992, 306쪽). 그런데 춘계가 바르트로 대변되는 신정통주의 성경관이 21세기의 과학주의와 인본주의와 맞서 싸우는데 있어서 성경의 권위를 지켜나갈 수 있는 복음적 성경관으로 보고있는 것은 바르트와 신정통주의 성경관에 관한 심도있고 철저한 연구와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이종성, “21세기에 있어서 성서의 신언성이 유지될 것인가?”, 2001년 2월 15일, 기독교학술원 강연자료, 특히 5쪽 이하 참조).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 장로교회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되어 온 것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성경에도 오류가 있다”고 가르치는 신정통주의 성경관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신정통주의 성경관이 무엇인지 아래에서 좀더 그 정체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성경의 오류와 모순 문제

18세기 서구의 계몽주의 이후 자유주의 성서신학은 소위 “역사­비평적인 방법”(Historical-Critical Method)을 도입하여 성경도 일반 고대 종교 문서와 꼭같은 기준에서 해석하고(고등비평작업), 성경은 사상사적으로 고대 히브리종교의 진화의 산물이며 성경에도 사상적­역사적­과학적­지리적­연대기적 오류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소위 종교사학파로 알려짐). 그런데 신정통주의 성경관 역시 칼 바르트의 제안에 따라 역사-비평적 방법을 성서해석의 예비 지식으로 전제하여, 성경본문의 역사적-인간적 오류를 인정했다. 그런데 여기서 신정통주의 성경관이 난관에 봉착한 것은 성경내용의 어디까지를 오류로 보아야 하는가? 라는 부딪힐 돌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신정통주의 성경해석은 그럼으로 성경본문이 진술하는 역사성(Historicity)에 관해 축소주의(Reductionism)로 나가는 것이 그 특징이다. 신정통주의가 역사적인 오류가 있는 성경본문에 신학적인 해석작업을 한다는 방법론적인 비약(또는 초월)을 선언했으나, 그것은 이미 성경본문의 역사적 오류를 전제한 고등비평과의 마찰과 방법론적인 불일치 때문에 크게 어색함을 드러내었고, 그 스스로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신정통주의 성서연구는 서구신학에서 1945년 이후부터 “성서신학 운동”으로 알려졌으나 1960년대에 이미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성경의 귄위”는 크게 위축 또는 약화되었고, 신정통주의 신학은 1970년에 이미 신자유주의 신학(성서신학의 경우는 소위 “케뤼그마 신학”으로서 구약의 폰 라트와 신약의 불트만 신학)에 자리를 내어 주고 말았다. 그래서 신정통주의 성서신학자 촤일즈(B. S. Childs)는 이점을 통렬히 반성하면서 방법론적인 대안으로서, 소위 “정경비평”(Canonical Criticism)을 제안하였다. 촤일즈는 20세기 현대 구약신학이 전반적으로 “역사­비평적 방법”을 하나의 기본(a base)으로 받아들인 것은 근본적인 실수(the one basic fault)라고 반성했다(James Barr, The Concept of Biblical Theology-An Old Testament Perspective, SCM Press, 1999, 49쪽 참조).
신정통주의 신학이 쇠락의 길로 들어선 핵심적 이유는 신정통주의가 개혁신학 전통을 이어받아 구자유주의에 맞서 싸운 많은 장점과 업적­이것은 주로 조직신학 분야에서 이루어졌다­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는 그 성경관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한국에서 신정통주의가 왜 신신학으로 매도되었고, 자유주의신학과 동일시되면서 보수신학자들에 의해 공격의 대상이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신정통주의를 대변하는 칼 바르트의 성경관은 무엇보다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켰는데, 즉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라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대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경험에 근거한 다양한 “증언들”에 초점을 맞춘점과, 영감의 경우 2중적인 “사건(실제)영감설”을 주장함으로써 개혁교회 전통의 성경관을 수정한 잘못에 기인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신정통주의 신학의 기수 바르트의 성경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성경은 계시와 구별되며, 성경은 참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증언”이고, “성경은 단지 계시에 대한 인간적인 말일뿐이다”라는 명제이다(오토 베버, 김광식역,『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5. 성서와 교회”, 대한기독교출판사, 1992, 59-75쪽, 특히 59쪽 이하 참조; 데이비드 L. 뮬러, 이형기역,『칼 바르트의 신학사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리:기독교적 신학의 규범”, 양서각, 1986, 56-66쪽 비교). 이 성경의 인간적인 말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그 말씀을 통해 인간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영감은 계시의 행위지만 그것은 성서의 인간 증인들과 그 증언을 듣는 현재 “우리 자신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전체성 속에서 이해해야한다. 이 때에도 “성서적 증인들의 인간적인 불완전성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바르트는 주장했다. 이것은 개혁신학 전통의 복음주의 성경관을 부활시킨 것이 아니라 상당히 수정한 것이며, 영감설의 경우 전문용어를 사용하자면, “언사영감설”(Wortinspiration)에서 소위 “실제(또는 사건)영감설”(Realinspiration)으로의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오토 베버, 위의책, 62쪽 이하). 박봉랑도 이 문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다:“바르트에게 있어서 말씀의 형식과 계시 자체 사이에 문자적인 동일이 있을 수가 없다. 성서와 설교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동, 즉 계시의 사건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박봉랑,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의 개념”,『신학연구』, 1960 춘계, 57쪽; 코닐리어스 밴틸, 이상근역,『칼 바르트』, 한국개혁주의 신행협회, 1971, 특히 “성경”, 12-24쪽). 이러한 신정통주의 성경관은 결국 성경 권위의 약화를 초래했고, 성경의 유오성(Errancy)을 주장하게 했다. 결국 신정통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던져진 폭탄이 아니라 폭죽임이 드러났다. 박형룡도 신정통주의의 장점들과 자유주의와 구분되는 그 성격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계시성을 수정하고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신정통주의 성경관을 “괴상한 성경관”이라고 했다(박형룡, “성경관의 제상”,『신학지남』, 1954, 23-1호, 11쪽). 신정통주의는 성경은 역사적으로는 100% 인간의 책이기 때문에 인간 기자들의 기록은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고, 자유주의 성경 해석 방법인 역사­비평적인 방법을 도입하여 성경의 오류와 모순을 인정했다.
신정통주의를 이어받은 신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확인에 관해서는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했고, 성경에 전승된 기독교 신앙의 생명은 그 신앙고백적인 언어현상에 있다고 전제하고(하이덱거의 언어철학에 고무됨), 사실역사는 아니라 할지라도 “믿어진 역사”(Geschichte)로서 성경을 해석했으나 역시 설득력을 잃었다. 왜냐하면 실제사건 없는 해석은 공허감만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독교 성경해석에 실망한 현대 서구지성은 18세기 계몽주의 노선에 다시 복귀하여 포스트 모더니즘을 발판으로 신학적으로는 종교다원주의로 나가고 있으며, 성경본문의 다원화를 주장하고 있는 현실이다.
신정통주의 칼 바르트의 성경관을 한국장로교회가 이해하는 데는 다소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의 오류문제에 있어서 이중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재준이 한국장로교 총회 앞에서 밝힌 그의 성경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장공은 신정통주의 성경관에 입각하여, 성경이 구원을 얻는 도리에서는 신앙과 생활의 규범으로서 불오(Infallibility)를 믿으나, 과학적­역사적인 문서로는 무오(Inerrancy)하지 않고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성경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가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과 신학에 끊임없는 혼란과 불확실성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바로 인식해야 한다. 신학교 강의실에서의 강의 내용과 교회강단에서의 선포하는 말씀 사이의 이중성과 괴리현상도 그 뿌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개혁교외 전통의 복음주의 성경관에서 오류 문제에 관한 입장은 보다 성경적이고 논리적이다. 즉 성경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과학이나 역사 교과서의 목적으로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을 이러한 관점에서 오류 운운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요 20:31 등).
박형룡이 바로 말한 대로, “비평가들이 지적하는 소위 성경의 오류들은 난관들이요 증명된 오류들이 아니다”(박형룡, “성경관의 제상”,『신학지남』, 1954, 23-1호, 12쪽).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사람이라는 기독론의 명제에서, 우리는 예수가 백퍼센트 참 사람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고, 죄가 있다고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참 저자는 하나님이고 성경은 백퍼센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성경의 정경성), 또한 성경은 100% 인간의 책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다고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마 22:29; 막12:27; 벧후 1:16 등 참조).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 성경관에서는 성경에 “모순”이나 “오류”가 있다고 말하지 않고, 성경에 “난제들”이 있다고 말한다. 역사적, 과학적, 지리적, 연대기적인 차이들도 “오류”라고 선뜻 규정하지 않고,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성경시대와 우리시대 사이에 역사, 언어, 사고방식과 문화적인 시공의 거리감에서 당연히 기대되는 상대적 지식의 정도나 관점의 “차이들”로 인식한다. 그것은 오늘 21세기 우리의 이성적 판단과 과학적, 역사적 지식이 성경의 오류를 최종적으로 판정할 만큼 만고 불변의 절대적 지식이 아니라는 성찰 때문이다.



오늘의 성경관과 성경의 권위

21세기는 20세기의 연장선상에서 기독교가 쇠퇴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무신론과 불가지론이 더욱 인류의 마음을 혼란하게 하고 당황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틈을 타서 성경보다는 전통과 교권을 앞세우는 로마 천주교나, 미신신앙과 우상종교들이 종교연합운동이나 종교다원주의라는 미명하에 기독교 구원의 절대성에 도전하며,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를 상대화하는 시도들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 장로교회는 바른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 성경관에 굳게 서서, 성경중심의 목회, 성경중심의 신학을 바로 고수해 나가야 한다. 이미 아모스 예언자가 예언한 대로,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핍됨으로써,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골수에 병든 증상들이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21세기를 복음화해야 할 사명이 있다. 이수영은 장로교회 또는 개혁교회의 개혁정신이 보다 총체적이고 철저한 이유를 “성경적 신앙개혁의 철저성”이라고 했는데(이수영, “장로교회 신앙의 기본정신”, 미간행 강연자료, 2001, 3쪽 이하), 이러한 점에서도 분명한 성경관을 정립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 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역시 얻지 못하리니, 그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 8:11-13; 사 55:1-3 비교).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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