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화(定形化)할 수 없는 중생의 체험
이 글은 구원론에 관하여 논(論)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救贖)의 사건을 어떻게 표면으로 끄집어내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속사(救贖史) 중심 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신앙에 접합(接合)하느냐 하는 목적으로 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속 사건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의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표징이 중생의 체험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구원의 체험에 관하여 잠시 논하였습니다.
이 구원에 대해서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내가 받아들이면 구원받는다는 구원의 진리는 단순 명쾌하게 기록되었습니다(롬 10:9,10). 그러나 다른 면 특히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일 때의 외적 체험인 중생의 체험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한가지 형태로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구원의 구체적인 체험이 성경에 정형화(定形化)된 한가지 모습으로 기록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각자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에 의존하기 쉽습니다. 또한 그러다 보니 자신의 체험을 절대화시키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체험을 성경보다 우위에 놓고 성경을 왜곡시키는 잘못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체험을 통하여 구원에 이른 사람을 판단하고 무시하거나 실족케 하기까지 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수년 전에 구원론을 들고 나와서 교계(敎界)에 큰 물의(物議)를 일으킨 구원파(救援派)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체험한 구원의 체험을 절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하는 체험과 틀린 체험을 한 사람들의 중생의 체험을 잘못된 것이라고 함부로 판단하고 이단시(異端視)하는 과오를 범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중생의 체험이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지 아니한 자신들의 체험을 절대화시켜 성경 진리처럼 주장한 것은 커다란 오류(誤謬)였습니다. 이런 점은 이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적(內的) 체험이 강한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상태에 빠질 수 있고 나 자신 역시 이런 점에서 오류(誤謬)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의 믿음의 깨달음이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서 좀더 성경 적이고 객관적인 방향으로 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인도하시는 은혜입니다.
위에서 언급 한대로 하나님의 구원 진리는 단순 명쾌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신의 구주(救主)로 받아들이면 구원받습니다. 누구나 어린이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구원받는 단계와 체험의 단계는 성경 속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성령 님의 주권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명확히 기록되지 않은 중생의 체험적 현상을 자기 개인의 체험을 위주로 절대화시키는 잘못을 범치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개인적인 강력한 체험을 기준으로 하여 다른 사람의 구원을 판단하게 되면 이슬비 같은 은혜로 구원받는 사람들을 구원 못 받은 사람들로 오판하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 생활을 건실히 한 사람은 이런 강한 체험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강한 체험이 없다하여 이들이 구원받은 믿음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어느 한 사람의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만이 하시고 하나님만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 이러한 회심(悔心)의 체험만이 진정 구원받은 회심의 모습이다 라고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하지 않은 이상 자신의 체험과 생각을 우선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진정 하나님께로부터 온전한 축복(신앙, 개인, 건강, 재산, 명예, 자녀의 축복 등등)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집안과 사람들의 대부분이 모태 신앙 인이나 어릴 때부터의 신앙인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은 사도 요한이 하나님께 간구한 것과 같이 영 육간에 축복입니다(요삼 1:2).
세상에서의 복은 영의 축복이 없기에 온전한 복이 될 수 없습니다. 내세에 구원이 없으니 가장 중요한 영의 복이 없습니다. 따라서 영의 축복이 없는 반쪽자리 복입니다. 또한 현세(現世) 생활에서 세상 적인 복이 있더라도 한쪽으로 치우친 복이요. 부족한 문제가 항상 발생합니다. 그런고로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없습니다. 사람은 영적인 생명체입니다. 그러므로 이 근원적인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사람이 진정한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하므로 영 육간에 복이 진정한 복입니다. 이러한 복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아버지의 복을 물려받은 맏아들의 받는 것처럼 모태 신앙인 이나 어릴 때부터의 신앙인의 건실하고 깨끗한 심령(心靈)의 그릇이 받게 됩니다. 죄악 생활에 찌든 생활을 하다가 중도에 회심하여 하나님께 온 사람들은 이런 온전한 복을 받기가 힘들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분 깃을 다 탕진한 둘째 아들과 같습니다. 나중에라도 하나님께 돌아 왔으므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여 주시고 아들의 명분을 회복시키는 은혜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섬기고 자신의 분 깃을 보존한 맏아들처럼 온전한 축복은 받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누가 복음의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교훈입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축복은 받았습니다. 아들의 명분을 회복한 축복 즉,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육적이고 세상 적인 의미의 축복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맏아들에게 한 아버지의 말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인들의 삶의 모습에서도 어느 정도 유추(類推)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 육간에 축복을 받은 사람을 보고 자기 개인위주의 체험을 중심으로 판단하면 잘못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강력한 회개 중생의 체험이 없다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심히 잘못된 태도가 됩니다. 실상(實狀)을 알고 나면 참으로 실소(失笑)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모태 신앙인이 그 신앙을 지키며 평생을 살았다면 그 사람은 인생의 특등열차를 타고 가는 복된 신앙 인입니다. 영 육간에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악 중에 살며 인생의 분 깃을 다 탕진한 뒤에 중도에 회심한 사람은 영적인 축복인 구원을 받았더라도 육적인 축복은 다 탕진하였거나 거의 다 소진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만족할만한 온전한 영 육간의 축복은 받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삼 등 열차를 탄 인생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 등 열차를 탄 사람보다 편안하고 좋은 자리가 아닐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 가는 열차를 탔으니 하나님의 은혜는 받은 것입니다. 천국행 열차를 놓치고 사람의 발로 가면, 갈 수밖에 없는 지옥(地獄)을 향하여 고달픈 나그네길을 가는 사람들에 비하면 큰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인생 짧은 길에서 누리는 온전한 축복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천국가면 다 같은 영화로운 삶을 얻기 때문입니다(고전 15:35-54).
본의 아니게 구원론(救援論)에 관한 서론이 된 것 같습니다. 구원론에 관하여는 전부터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가르침이 아직은 내게 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임하는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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