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현종 때인 1670~71년 두 해 연이어 큰 기근이 들었는데 그것을 경신년과 신유년을 줄여서 庚辛대기근이라고 한다. 굶주린 사람들은 설익은 밀과 보리까지 베어먹고 떠돌았으며 인육을 먹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보고를 접한 관리들은 ‘올해의 기근은 유례 없는 일’ ‘국가의 장래가 걱정이다’며 위급한 심정을 나타냈다. 당시 조선 인구 500만명의 25%인 100만명이 기아와 역병으로 죽었다.
조선뿐 아니라 이상저온의 소빙기가 전지구를 덮쳐 곳곳에서 변란이 났다. 겨울 추위가 봄까지 이어지고 가뭄 기간이 길어지고 홍수가 나고 폭풍이 몰아쳤다. 중국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해 명에서 청으로 왕조가 교체됐다. 유럽도 도처에서 난리가 났으며 왕조가 바뀌고 인구가 대거 이동하는 사회변화가 일어났다.
처음에 조정은 중앙정부 차원에서 진휼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방관들의 요청을 묵살하고,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며 감사와 수령을 문책했다.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희생이 커졌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진휼청의 위상을 높이고 지방관청과 해상운송 요지에 진휼곡을 비축하도록 하는 등 정교하고 체계적인 사회 안전망을 갖췄다. 그러한 진휼 체계는 조선 사회를 대재앙으로부터 일으켜 세웠으며 영조와 정조대 정치 사회적 안정을 이루는 바탕이 됐다.
진휼 체계에 더해 천혜의 자연조건, 상부상조 정신이 대기근을 이겨낸 조선의 저력이라고 광주교육대 김덕진 교수는 평가한다. ‘100리 안에 비 오고 볕 나는 곳이 다르고 한 고을 안에 마르고 습한 곳이 같지 않아서’ 다행히 듬성듬성 피해를 덜 입은 곳이 었었다. 사노비를 버리거나 고을 수령이 눈물로 호소해도 곳간을 열지 않은 지주와 부농도 있었지만, 대개 지방이나 국가에 적지 않게 기부해 곡식을 공유했다. 지난한 어려움을 극복한 조상의 지혜가 ‘기축대란’을 겪지 않으려면 필요할 듯하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출처 :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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