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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의 기원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15. 20:54

도서: 버블의 기원

작가 소개

저자 | 로저 로웬스타인

◆ 지은이 로저 로웬스타인 ROGER LOWENSTEIN

베스트셀러 《워렌 버핏(BUFFET: THE MAKING OF AN AMERICAN CAPITALIST)》, 《천재들의 실패(WHEN GENIUS FAILED: THE RISE AND FALL OF LONG-TERM CAPITAL MANAGEMENT)》의 저자. 10년 이상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자로 일하면서,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증권시장 칼럼 <월가의 이야기(HEARD on STREET)>를 썼고, 1995년부터 1997년까지는 <본질가치(INTRINSIC VALUE)>라는 고정칼럼을 기고했다. 현재 스마트머니(SMART MONEY)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뉴욕 타임스 및 월스트리트저널 등에 기고하고 있다. 세 아이를 두고 있으며, 뉴저지 웨스트필드에 살고 있다.

◆ 옮긴이 이 주형

부산대학교 대학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MIT에서 경영학석사(MBA)를 받았다. SK 텔레콤, KISDI(통신개발연구원), KDI(한국개발연구원)에서 재직한 바 있다. 현재는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FULL FRONTAL PR》, 《판매의 원리 1, 2》, 《은퇴심리》등이 있다.


목차 

1장. 새로운 기업문화의 태동

2장. 호황의 시작과 변화하는 기업

3장. 스톡옵션 광풍

4장. 숫자게임

5장. 무기력해진 규제기관

6장. 신경제의 두 얼굴

7장. 엔론

8장. 거품의 붕괴

9장. 대추락의 해

10장. 에필로그


버블의 기원


1. 새로운 기업문화의 태동

1980년대 초반에 월스트리트에는 새로운 직업 - 고용된 기업 사냥꾼 혹은 기업인수 전문가 - 이 하나 등장했다. 이들은 다양한 산업에서 사냥감을 추적했고, 통상적으로 시장가격의 30퍼센트 내지 40퍼센트의 프리미엄을 지불했다. 자연스럽게 주식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런 기업인수는 경영자, 특히 CEO의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었다. CEO들은 매수합병의 덫을 피하려면 주가를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기업인수는 뜻하지 않게 기업지배구조를 결정하는 한 수단으로 돌변했다. ‘주주가치’라는 새로운 용어가 업계로 퍼져나갔고, 이런 상투적 구호를 외쳐대는 CEO에게 투자자들이 몰려들었다.

기업인수라는 하나의 수단만으로는 충분한 효과를 낼 수 없게 되자, 약탈자는 새로운 무기와 새로운 아이디어로 무장했다. 차입매수(LBO)가 그것인데, 이것은 부채를 조달해서 기업을 매수하는 방식이다. 약탈자가 인수대상 기업을 밝히지 않은 경우에도 차입매수 자금을 조달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단지 인수할 기업을 하나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만 하면 돈이 모였다. LBO가 추진력을 얻기 시작하자 기업 경영진도 절박해졌다. 주가를 끌어올려야만 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어책은 약탈자의 전략을 모방해서 자금을 차입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주주가치라는 미명하에 웨스턴 유니언같은 회사들은 대규모 부채자금을 조달해서 주식을 사들이고 주가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회사를 저당 잡혀 절망적인 상황인데도, 경영자는 기업을 살린 구제자로 추앙받았고, 매수자의 인센티브도 아주 컸다. 물론 기업매수를 통해 기업의 효율성이 증대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LBO 거래는 곧 앞뒤를 가리지 않고 무모해졌으며, 차입규모도 대폭 늘었다. 그럼에도 LBO는 미국주식회사에 적합한 특효약 혹은 만병통치약이라는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매수자가 프리미엄을 지급하고 주식을 산다는 것은 매수 기업이 본질적으로 효율적임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해석했다. 하버드의 마이클 젠슨 교수는 LBO를 통해 매수기업의 효율성이 크게 증대한다고 주장했다.

젠슨 및 다른 사람들의 LBO 찬사 속에서 약탈자는 암묵적으로 1세기 전의 산업자본가, 즉 카네기나 모건 등의 인물로 재현되었다. 기업인수 전문가들은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들로서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하고, 나태한 기업관료 제도를 뿌리 뽑고 미국의 기업가정신을 회복시킨다고 옹호되었다.

하지만 1990년의 경기침체는 약탈자의 야망을 꺽어버렸다. 다수의 매수기업이 파산신청을 했다. 하나의 LBO가 실패하면,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잃고 혁신적인 기술이 사장되는 등 사회는 더욱 곤궁해졌다. 하지만 약탈자들은 그냥 다음 거래로 넘어가면 그만이다. LBO 추진자들은 아무 것도 잃을 게 없었으므로 도덕적 해이에 빠졌다. 그들이 가진 것은 무임승차권이었다. 운이 좋아 성공하면 크게 벌었고, 실패하면 다시 시도했다. 이러한 논리는 스톡옵션을 가진 기업경영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LBO 열풍이 정점에 이르면서 스톡옵션 부여가 증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990년경에는 LBO가 보편적인 해결방안이 아님이 분명해졌으므로 다시 기업경영자에게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들로 하여금 소유경영자처럼 행동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들을 소유주로 만드는 것이 해답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배구조에 관한 새로운 모델, 새로운 특효약, 새로운 기업문화가 탄생했는데, 그것은 스톡옵션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2. 호황의 시작과 변화하는 기업

하버드대학의 마이클 젠슨과 공동저자 케빈 머피는 자신들의 저술을 통해 급여방식을 개선하여 CEO에게 동기를 부여하고자 했다. 중요한 것은 얼마를 지급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지급하느냐 였다. CEO로 하여금 관료처럼 행동하지 않게 하려면, 이들이 회사주식을 상당량 보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다수의 CEO는 부자가 아니었으므로, 스톡옵션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젠슨은 CEO에게 최대 45퍼센트의 지분을 갖게 하고, 가능하면 그 정도의 주식을 소유하게 하라. 그러면 CEO로 하여금 관료의 경직된 모습이 아니라 워렌 버핏과 같은 경영귀재의 재능을 발휘케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젠슨은 ‘기본교훈’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버핏을 주주 지향적 경영자로 만든 것은 그의 주식소유 비율도 아니고 타고난 합리성도 아니다. 핵심 요인은 바로 ‘버핏은 자기 돈으로 주식을 샀다’는 것이다. 젠슨은, CEO가 주가를 부추겨 스톡옵션의 가치를 증식하기 위해 정보공시를 조작할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다지 우려하지 않았다.

하여튼 미국은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급여를 통해 뛰어난 성과를 올리도록 자극했고, ‘성과급’은 주주가치의 증대에 수반되는 보편적인 제도가 되었다. 루거스너가 IBM 회생의 임무를 지고 50만주의 스톡옵션을 받았을 때, 누구도 배 아파하지 않았고 투덜거리며 불평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갈채를 보냈다. 미국인들은 거스너와 같은 훌륭한 경영자의 모습을 보며 힘을 얻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반투자자 대열에 합류했다. 미국은 불황과 걸프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면서 경제도 좋아지고 기업 이익도 치솟았다.

이러한 낙관주의적 사고가 널리 퍼진 것은 시장에 대한 국민들의 새로운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워싱턴도 비슷한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사회의 부’는 주식이 투자자에게 얼마나 매력적인지가 아니라 기업이 판매하는 제품과 그에 의한 수익에서 창출된다. 정치인들도 이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주주의 주식을 일정 부분 은퇴자들에게 배분한다면, 일부는 부유해지고 다른 일부는 가난해지게 된다. 하지만 사회 전체의 부는 늘 일정하다.

CEO의 주가에 대한 관심은 한 가지 개혁조치에 의해 더욱 고조되었다. 1994년 증권거래위원회는, 기업이 위임장 권유 신고서를 제출할 때 연간 주가실적 도표를 첨부하도록 요구했다. 그것도 CEO의 급여를 공개하는 페이지에 붙이게 했는데, 이 도표는 주주에게는 유용한 정보가 되겠지만, CEO에게 주는 메시지는 비장했다. CEO의 급여를 주가라는 한 가지 척도에 명확하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연계시킨 것이다. CEO의 주가 초점은 한 가지 수치, 분기별 주당순이익에 모아졌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분기별 수치는 실제로 경영성과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업전략이 결실을 맺기까지는 수개월이 아니라 수년이 걸리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경영자들은 아주 소심해졌다. 복수 사업을 운영하는 기업들은 월가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신규 주권을 발행하여 독립기업인양 꾸몄다. 하지만 실체를 들여다보면 하나의 기업이다. ‘사라 리’의 자산공동화 결정은 시장의 선호를 따른 것이었다. 코카콜라 회사가 보틀링공장을 분리한 것이나 엔론과 같은 가스회사가 유사한 조치를 취했던 것도 이러한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

게임의 규칙은 이익을 증가시키되,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익을 내지 않고 분기별로 이익실적이 점차적으로 올라가도록 조정하는 것이었다. 투자자들이 이러한 기업에 대해 높은 주가로 보답했으므로, CEO는 그러한 솜씨를 발휘하도록 요구받았다. 당연히 기업에서는 재무부문의 역할이 격상되었다. 은행은 점차 트레이더로 변했고, 일반 기업은 은행으로 변해갔다. 왜냐하면, 제조업자나 마케터 그리고 첨단기술 기업들도 일단의 재무전문가와 트레이더를 고용했기 때문이다. 재무부문의 역할이 격상함에 따라 최고재무책임자의 위상 또한 상승했다.


3. 스톡옵션 광풍

1990년대에는 탐욕을 미덕으로 여겼다. 증시 전문가들은 신과 같은 존재로 숭앙받았다. 스톡옵션이 기업지배구조를 결정하는 수단, 즉 기업이익을 증진시키는 도구로 인정받게 된 것도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적절하게 활용되었더라면, 스톡옵션은 당초의 기대를 충족했을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스톡옵션이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어 왔는지 보다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넬슨 펠츠의 사례부터 짚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펠츠는 트라이아크의 CEO로 취임하는 즉시 60만주의 스톡옵션을 받았다. 스톡옵션은 아주 간단하다. 당시 트라이아크의 주식은 18달러에 거래되었고, 펠츠는 향후 10년 동안 이 가격으로 주식을 매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경영자에게 제공되는 스톡옵션을 대체로 이런 방식을 취했는데, 펠츠가 받은 스톡옵션의 규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펠츠가 집권한 첫 해에 트라이아크는 개선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고, 주가도 지지부진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펠츠는 1994년 3월과 4월에 약 220만 주의 대규모 스톡옵션을 챙겼다. 트라이아크의 사업은 계속 악화되어, 주가는 반토막이 났고, 펠츠의 옵션도 수면 아래로 침잠했다. 그해 말 펠츠는 24만 주를, 1995년에도 15만 주를 추가로 획득했다. 예전보다 낮은 가격을 적용했음은 물론이다.

SBC 커뮤니케이션즈의 회장 겸 CEO인 에드워드 E. 휘태커 2세도 거의 매년 많은 스톡옵션을 받았다. 게다가 급여 및 상여금으로 매년 수백만 달러를 받았다. 또 장기 인센티브 제도를 통해 돈도 받았다. 휘태커는 몇 차례의 기업합병을 통해 지역 벨전화회사를 전국적인 통신회사로 키웠다. 하지만 몇 해가 지난 후에도 성장전략은 이익을 창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사회는 온갖 구실을 찾아가며 그의 급여를 계속 올렸다. 이사들이 그러한 악습을 쫓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답은 미국 이사회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휘태커는 회장 겸 CEO였다. 이사회는 코치와 마찬가지로 현장 경영자를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는 대체로 이사회 회장과 CEO를 별도로 둔다. 사실 미국에서 두 가지 임무를 통합한 것은 명백한 제도적 오류이다.

실제로 경영자들이 스톡옵션을 행사하면, 기업은 그에 상당하는 주식을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사들였다.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회사는 이러한 주식 재매입비용으로 수십억 달러를 썼다. 하지만 이런 비용은 손익계산서에 반영되지 않으므로 월스트리트가 주목하는 숫자에는 어떠한 영양도 미치지 않았다. 재무회계기준위원회(FASB)는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했다. 1933년 이 위원회는 몇 차례의 토론을 거쳐 스톡옵션 비용을 이익에서 공제하도록 하는 규칙을 권고했다. 그러자 미국의 주식회사들이 온통 들고 일어나서 이 규칙을 폐기하기 위해 로비하기 시작했다. 결국 규칙개정은 보류되었다. 회계처리상의 걸림돌이 사라지자 이사회는 자유롭게 스톡옵션을 제공했다.

주가가 등락을 거듭하는 회사의 CEO는 스톡옵션을 받아 단기간에 처분함으로써 큰 부를 축적했다. 행사기간 10년의 스톡옵션도 점차적으로 1년후에 처분해서 이익을 취하도록 허용했다. 이러한 조치는 성과와 스톡옵션과의 연결고리를 끊었다. 왜냐하면, 단기적으로는 주가가 사업실적과 완전히 괴리되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4. 숫자게임

GE의 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했던 비결은 이익의 성장이 아니라, 성장의 일관성이었다. GE가 사용했던 방법 가운데 하나는, GE캐피털이 불량대출에 대해 설정한 충당금(reserve)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실적이 좋은 분기에는 충당금을 적립해서 비오는 날에 대비하고, 실적이 나빠서 ‘수익이 필요한’ 분기에는 충당금을 감소시켰다. 그리고 웰치는 GE가 특정 사업부문에서 큰 손실을 겪을 때마다 다른 부문에서 특별이익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조작은 불법도 아니었고,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를 가진 듯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작 행위를 통해, 본질적으로 등락을 거듭하기 마련인 사업을 순탄하게 성장하는 것처럼 표시했다. 더욱이 웰치도, 다른 CEO와 마찬가지로, 퇴직연금을 활용해서 결산이익을 크게 부풀렸다. 법 규정상 연금에 납입된 돈은 절대로 주주이익을 위해 활용할 수 없다. 그럼에도 퇴직연금을 통해 주식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는 있다.

1998년에 증권거래위원회 위원장 레빗은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에서 기업의 이익보고가 ‘숫자게임'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경고했다. 레빗은 합의된 이익 목표치를 충족시키고, 부드럽게 상승하는 이익곡선을 만들어내려는 경영자들의 집착을 비난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GE의 이익 관리를 경멸하지 않았다. 오히려 웰치의 그런 능력을 숭배했다. 그러다보니 레빗이 염려했던 대로, 회계장부의 숫자조작은 산업계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퍼져갔다.

루슨트는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 대기업의 하나로 간주되는데,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익 부풀리기 기법’을 동원했다. 루슨트는 여러 분기에 걸쳐 지불능력이 거의 없는 제3세계 고객에게서 상당량의 매출을 올렸고, 매출채권이 급증할 때에도 불량채권에 대한 대손상각충당금을 설정하지 않아 이익을 크게 부풀렸다. 기업이 윌스트리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 함에 따라 정보공개는 점점 투명성을 잃어갔다. 특히 파생금융상품 거래가 유행하면서 기업의 재무자료는 점점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파생금융상품의 활용과 더불어 1990년대 후반 무렵, 대부분의 공개회사는 소위 자산유동화 회사(SPV)를 활용해서, 자산 및 채무를 공공연히 은닉했다. 예를 들면, K마트와 같은 소매업자는 신용카드매출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이런 대출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K마트는 매출채권을 별도 법인인 SPV(자산유동화 목적을 위해 설립된 조합)에게 매각한다. 거래가 끝나면, K마트는 현금을 수중에 넣지만, 대차대조표상에 신용카드 매출채권이라는 자산을 가지지는 않는다. 일부 기업은 대차대조표상에서 일부 자산 항목을 제거하여 주가를 부양할 목적으로 SPV를 설립하기도 했다.

한편 1994년 시티코프는 부외거래 활동의 조사에 착수했는데, 부외거래 총액이 450억 달러에 달하는 것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외금융 부문에서 가장 뛰어난 실무자는 37살의 엔론 CFO 앤드류 패스토우였다. 패스토우는 엔론의 대차대조표에서 부채를 줄여 신용평가 등급을 올렸고, 동시에 총자산 규모를 두 배로 증가시켰다. 쉽게 말하면, 엔론은 실질적으로 위험은 증대되었지만, 겉보기에는 보다 안정적인 회사로 포장되었다. 1999년 패스토우는 CFO 매거진의 우수상을 수상했다. 전년도에는 월드컴의 스캇 설리번이 그 상을 받았고, 2000년에는 타이코 인터내셔널의 마크 슈와츠가 수상했다. 세 사람 모두 기소되어, 윌스트리트가 영리한 재무전문가들에게 어떻게 농락당했는지 증언해야 했다.

GE의 일관된 이익증가 패턴을 신중하게 모방해서 이익숫자를 멋지게 끌어올린 기업이 하나 있다. 타이코 인터내셔널의 CEO인 데니스 코즐로스키는 자신의 우상인 GE의 웰치보다 더욱 심하게 숫자를 다루기 시작했다. 1999년 5월 타이코는 레이켐이라는 전자제품 제조업체를 29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합의가 이루어지자마자 타이코는 레이켐에게 서둘러 부채 지급과 충당금의 설정, 그리고 기타 유사한 회계처리를 하도록 지시해서, 곧 자회사로 편입될 기업의 현금흐름과 수익성을 낮췄다. 다음해에 인위적으로 낮아진 수익성이 회복되면, 세상 사람들은 타이코가 또 다른 사업체를 마술처럼 회생시켰다고 감탄했다. 이러한 수법을 ‘스프링 로딩(spring loading)'이라 한다.

스프링 로딩은, 다른 형태의 이익관리 기법과 마찬가지로, 잠정적인 해결책으로서 한번만 이익을 부양할 수 있다. 타이코는 다음 분기에 새로운 주사약이 필요하고, 그러면 필사적으로 다른 인수대상 기업을 찾았다. 이런 과정에서 주주들이 희생당했음은 물론이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포춘 500대 기업의 CEO들은 나름대로 숫자게임을 즐기다가 고통스런 종말을 맞았다. 그들은 변호사나 회계사에게서 특별한 실무교육을 받았다. 바로 주주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말라는 인습을 전수받았던 것이다.


5. 무기력해진 규제기관

증권거래위원회의(SEC) 초대 위원장은 조셉 P. 케네디였다. 케네디의 임무는 SEC를 영속적인 감시기구로 위상을 굳히는 일이었다. 케네디는 업계 사람들을 회유했고, 업계는 새로운 기구를 서서히 존경하기 시작했다. SEC는 점차적으로 월스트리트를 감시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업계의 활력을 약화시키지도 않았고, 자유시장의 인센티브를 왜곡시키지도 않았다. 아서 레빗 2세는 케네디의 후임 위원장들 가운데 월스트리트로부터 환호를 받았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위원장이었다.

기업의 재무보고서를 준비하는 회계감사관, 재무자료를 감시하는 이사회, 그런 자료를 해석하는 증권분석가들을 시스템을 관리하는 데 필수적인 ‘통제자’로 생각할 수 있다. 레빗의 8년 임기는 이러한 통제자들이 각자의 법적 및 도덕적 책임을 다하도록 독려하고 설득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1994년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한 후, 레빗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다음 해 의회는 클린턴의 거부권을 무효화하면서 주주소송을 못하게 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이 법에 의해 고위경영자와 회계사 그리고 그릇된 재무보고서에 서명하는 사람들까지 보호하는 새로운 안전장치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반투자자들은 레빗의 재임기간에 600억 달러에 달하는 공모주를 사들였다. 호황이 점점 힘을 얻어감에 따라 SEC는 기업공개를 조사하고 인터넷 거래를 감독하고, 더욱 복잡해진 정보공시를 검토하느라 허덕였다. 감시의 강도를 높여야 할 바로 그 시점에 SEC는 기업조사 주기를 3년에서 6년으로 연장해야만 했다. 그 당시에도 대부분의 증권분석가는 기업과 한통속이었다. 매도추천이 거의 없었던 것만 봐도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레빗은 월스트리트에서 자율적인 규제기관을 결성해서 증권분석가의 행위규범을 만들자고 제의했지만, 거부당했다. 레빗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수단은 정보공시였다. 1999년, 은밀하게 주고받던 정보를 모두 공개하도록 하기 위해 레빗은 ‘공정정보공개법안'을 제안했다. 정보공개의 개혁으로 증권분석가와 기업 그리고 몇몇 프로들 간의 은밀한 정보교류를 약화시켰다. 그런데 통제자의 직분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는 집단은 사실 기업의 이사들이었다. 이 부문에 대해서도 SEC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곳곳에서 연방법을 만들어 이사회를 개혁하자고 제안했다. SEC의 여러 위원장들도 개혁을 주문했다. 주주민주주의의 아킬레스건이랄 수 있는 허약한 이사회 제도가 결국은 고쳐지는 듯했다. 하지만 SEC는 입법안을 내놓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개혁의 힘은 사라졌고, 이사회의 결함은 계속 말썽을 부렸다.

이사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권한이 없었으므로, 레빗은 상장기업에 대한 기준을 강화했다. 우선 외부감사인은 경영진이 아니라 감사위원회에 보고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다음에 감사위원회는 회계숫자의 기술적 정확성만 검토할 것이 아니라, 정보공개의 의도까지 조사해야한다고 못 박았다. 이것은 상당한 변화였다. 하지만 이 규정은 1990년대의 마지막 달에 채택되었고, 따라서 증시호황의 정점이 꺾일 때까지 효과를 내지 못했다.

또 레빗은 SEC의 관할권 아래 있는 회계 산업에 주목하고 있었다. 회계사의 입장에서 보면, 주가상승은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증거였지만, 레빗 측에서 보면, 그것은 대중을 기만하기 시작한 증거였다. 이들은 합병과 스톡옵션 등 구체적인 회계사건의 처리방법을 놓고 접전을 벌이기도 했고, 회계법인의 독립성과 감시기능 같은 보다 큰 사안을 둘러싸고 다투기도 했다. 결국 분쟁의 핵심은 직업적 양심이었다. 회계사는 누구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하는가?

사실, 회계사는 가장 중요한 통제자이고 전문 직업인인데, 성격이 변했다. 1980년대 초반에 회계업계는 기업통합의 회오리에 휘말렸다. 연속적인 합병을 통해 8개의 대형회계법인은 5개 법인으로 통합되었다. 회계법인은 수익을 쫓아서 컨설팅 업무로 눈길을 돌렸다. 회계감사 고객과의 관계를 십분 활용해서 컨설팅 매출을 올리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러는 동안 감사업무는 단순한 기능분야로 전락한 듯했다. 전통적인 감사업무가 뒷전으로 밀려나자, 회계법인은 사실상 판매조직으로 변질되었다.

1999년, 레빗은 회계법인의 피감사 기업에 대한 여러 가지 컨설팅 서비스 제공을 금지하는 규정을 제안했다. 이것은 전면전을 불러일으켰다. 회계업계는 청원서를 제출하고, 돈을 쏟아 부었다. 돈은 힘을 발휘했다. 격앙된 국회의원들이 레빗에게 전화로 호통을 쳐가며 자유시장에 대한 위협을 성토했다. 마지막에는 SEC의 존립 자체까지 위협했다. 결국 레빗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업계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해서 회계법인이 감사대상 기업에게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허용했다. 1990년대에는 시장에 대한 신뢰는 철저했으므로, 규제완화는 언제나 천사의 편에 있다고 믿었다.

정부기관 가운데 압도적인 인기를 유지하고 있던 유일한 기관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였다. 종종 시장의 비위를 맞추는 조치를 내놓았던 앨런 그린스펀의 덕이라 해도 무방하다. 사람들은 CEO가 회사의 모든 실적에 책임을 지듯이, 앨런 그린스펀이 전체 경제를 책임지고 있다고 얘기했다. 경제의 장기적 성공과 특히 증시의 호황은 모두 그의 덕택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그린스펀은 너무 잘 믿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는 특히 파생금융상품에 매혹되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혁신적인 부외금융 계약은 일종의 자발적인 통제자나 다름없었다.

1990년대에는 미국 경제가 우위에 있다는 점은 논쟁할 여지도 없었다. 국내시장에 강한 자부심을 가진 미국 관리들은 개발도상국에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하라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또한 국제통화기금 그리고 미국 은행들이 원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결국 시장모델이 채택되었고,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자본이동은 자유화되었다. 이들 국가는 저축률이 높고, 오랜 호황을 겪어왔기 때문에 자본부족 문제가 없었다. 투기자들은 태국 등 아시아 국가에 대해 장밋빛 전망을 가지고 돈을 퍼부었다. 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고층건물이 치솟아 올라갔지만, 지역경제의 필요를 감안하면 너무 지나쳤다.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자, 단기자금은 다시 브라질 혹은 러시아 등 세계적 기적을 일으킬 다음 번 국가를 향해 이동했다. 태국의 바트화는 폭락했고, 경제는 붕괴되었으며, 실업이 급증했다. 아시아 시장이 경색되자 월스트리트 금융거래인들은 미국이 아시아독감에 전염되는 것이 아닌지 초조하게 물었다. 하지만 독감은 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하지 않았고, 여러 가지 증세를 종합해 볼 때 미국은 이미 독감에 걸려 있었다.


6. 신경제의 두 얼굴

러시아의 통화위기가 시장을 강타하고 있던 1998년 9월, 인터넷 경매의 황제 이베이가 기업을 공개했다. 최초 공모가격은 18달러였다. 그해 말 종가는 241달러에 이르고 있었다. 그와 같은 광기를 멈출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인물은 앨런 그린스펀뿐이었다. 그는 버클리에서 연설하면서 “인간 본성이 변하지 않듯이, 급증하는 주가가 ‘신경제’의 기적을 반영한 것이 아닐 수도 있고, ‘시장거품'의 산물일 수도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그 당시 그린스펀이 거품에 작은 구멍이라도 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시장을 신뢰하는 것이 그의 본성이다.  그것이 그린스펀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

신경제는 미국기업의 화려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신경제라는 이름은 재무적 현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었다. 조지 길더는 21세기의 전환점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인터넷은 경제적 지역주의의 차양과 안정감, 그리고 모든 금지조항과 장애물을 걷어치우면서 투명한 지구촌을 창출할 것이다. 인터넷통신이 이제 세계경제의 시간 및 공간 축을 변형시키고 있다.” 하지만, 만약에 인터넷에서 누구도 돈을 벌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조면기(목화의 씨를 빼는 기계)에서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혁신은 사회의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지만, 그로 인해 기업의 수익성이 증대되었는지는 명확치 않다. 길더가 예상했듯이 인터넷은 개인 소비자의 힘을 향상시키고, 정보 및 지식의 불균형을 해소했다. 그 결과 소비자는 인터넷을 통해 시장의 틈새를 조사해서 최저가격을 요구했다. 결국 인터넷은 수익을 올려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소시켰다. 월스트리트가 이와 같이 자명한 이치를 망각했다는 것은 놀랍다.

인터넷 기업들은 기존 규칙의 테두리 밖에서 운영되었는데, 특히 회계 부문에서 그랬다. 아마존 같은 회사는 규제기관에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재무 보고서를 제외하고는, 회계규칙을 무시하고 추정재무제표를 발표했다. 즉, 어떤 비용이든 마음대로 삭제해서 이익숫자를 만들었다. AOL같은 회사는 수익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매출액을 부풀렸다.

수익성 없는 닷컴기업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전통적 기업은 구경제의 유물로 불리며 상대적으로 위상도 크게 평가절하 되었다. 윌스트리트의 사람들에게 토이자러스의 1400여개 점포는 자산이 아니라 골칫거리. 주가를 줄기차게 끌어내리는 닻이었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전통적인 기업이 노력을 배가하여 수익성을 향상시키고, 이를 통해 실리콘밸리의 거품 같은 존재와는 완연히 구별되는 기업의 참모습을 보여줬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본능은 다른 방향으로 기울었다. 구경제의 기업들은 서둘러 신경제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일반투자자들은 주식의 직접 소유에서 보다 고차원적으로 투기를 하는 펀드로 옮겨갔다. 이러한 펀드들은 단순한 파생상품증서에 불과했지만, 일반인들은 펀드를 구성하고 있는 주식보다도 펀드 그 자체에 더욱 열광했다. 창업지원회사 또한 인터넷에 필적할 힘을 지녔다. 창업지원회사는 신생 닷컴기업을 만들어내는 사업을 한다. 이들은 기업을 실험실에서 체계적으로 육성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한편 투자은행들은 1988 ~ 2000년 기간 기술주 거래수수료로 39억 달러를 벌었다. 크레디트 스위스 한 은행만 7억 8천 5백만 달러를 벌었고, 그 중에서 쿼트론이 1억 달러 이상을 벌어다 주었다. 크레디트 스위스 은행은 이윤을 창출하는 회사와는 거리가 먼 조직이므로, 이것은 모두 거래수수료 수입으로 볼 수 있다. 쿼트론의 고객 가운데, 네트워크를 서핑하는 이용자에게 돈을 지급해서 수백만 회원을 모집한, 올어드밴티지(AllAdvantage)라는 기업이 있었다. 올어드밴티지는 벤처자본가에게 지분을 팔아서 이 비용을 조달했고, 벤처자본가는 일반투자자에게 자기 주식을 팔아서 이익을 챙겼다.

나스닥지수가 5.000을 돌파하던 바로 그 주에, 크레디트 스위스는  올어드밴티지의 창업자들을 새로운 업무세계로 초대했고, 3주 후 민주당이 실리콘밸리에서 모금파티를 열었을 때, 클린턴 대통령은 올어드밴티지를 신경제 창조물의 모범적인 사례라고 극찬했다. 그때까지 확신을 가지지 못한 유일한 집단은 바로 광고주였다. 그들은 올어드밴티지 회원의 낮은 반응률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올어드밴티지의 광고 고객이 실시한 조사 결과에 의하면, 네트워크를 서핑하는 이용자의 클릭은 대부분 실제 이용자처럼 보이도록 프로그램된 로봇이 보내고 있었으며, 올어드밴티지는 본의 아니게 사기회원에게 매달 수표를 보내고 있었다. 크레디트 스위스는 자신의 고객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7. 거품의 붕괴

새천년이 열리는 벽두의 2000년 1월, 신세대 인터넷 기업의 선두주자 AOL은 구세대 미디어기업의 대표 격인 타임워너와의 합병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AOL은 합병을 성사시키기 위해 거래가 종결되기 전후로 재무실적을 부풀렸다. 돌이켜 보면, 이들 두 기업간의 불행한 결합은 닷컴 거품의 종말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합병계획이 발표되고 두 달이 지난 3월 중순 무선 인터넷 주식이 무너져 내렸다. 불과 한 달 만에 야후의 주가는 반 토막이 났다.

재무부장관 래리 서머스가 CNN에 출연해서 늘 하던 대로 진정하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장이 응하지 않았다. 한때 5,000까지 올라갔던 나스닥지수는 2001년 초에 2,000 이하로 떨어졌다. 인터넷 주식만이 아니라 10여년 지속되어온 낙관주의 문화에도 어두움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월스트리트는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투기의 습성이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통신사업은 또 다른 문제였다. 사람들은 월드컴이나 글로벌 크로싱의 주식을 추락하는 닷컴주식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들의 사업 자체가 악화되고 있었다. 광대역 회선 가격은 낙엽 지듯 떨어지고 있었고, 장거리전화사업자는 요금경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글로벌의 경영진은 주주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킬 수도 있었지만, 번성하고 있는 것처럼 계속 위장하기로 했다.

이것은 당시 업계에 만연된 일반적 형태였다. 위장 수단은 ‘회선임대 교환거래'였다. 2000년 후반에 사업실적이 나빠지면서 기간통신사업자들은, 광대역 회선을 서로 임차 사용하면서 - 현금수수를 하거나 혹은 회계 효과를 발생시키는 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관행을 깨고 - 거액의 현금을 수수하기 시작했다. 동일한 금액의 수표가 양방향으로 오가기만 했으니 순 효과는 없었다. 그럼에도 각 사업자는 교환거래를 매출액으로 계상했다. 20여 개의 공개기업과 통신사업자 및 에너지 기업들이 교환거래를 악용했다. 퀘스트 커뮤니케이션과 360네트워크, 타임워너와 엔론 등이 그러했다.


텔레콤 경영자들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합법성을 주장했고, 다행스럽게도 아더 앤더슨의 도움을 받았다. 숫자를 다루는 능력은 탁월했지만 윤리적으로 결함이 많았던 이 감사법인은 회계사기에 관한 백서 - 회선임대 교환거래를 이용해서 재무보고서를 멋지게 꾸밀 수 있는 방법 - 를 상세히 기술한 책자를 펴냈는데, 2000년 말에 배포된 이 백서는 통신업계의 필독서가 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산업 전반에 걸쳐 내부인의 주식매도가 성행했다. 특히 통신주 주가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널리 일어났다. 닷컴 경영진에게서는 그와 같은 기회주의적 태도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텔레콤 경영자들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았다. 월드컴이 대표적인 예이다. 월드컴도 여타 통신회사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회사 통신망에 접속하는 데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다. 모양새가 나빠지고 있는 실상을 숨기기 위해 CFO 스캇 설리번은 회선비용을 자본화하기 시작했다. 기업회계에서 비용을 자본화하는 것은 부정행위로 간주된다.

엔론의 회계처리 방식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치솟고 있는 주가를 정당화할 만큼 사업실적이 우수하지도 않았다. 엔론의 주가상승을 견인했던 힘은 잘나가는 신경제 기업으로의 놀라운 변신이라는 이미지였다. CEO인 스킬링은 엔론의 이미지를 실리콘밸리 기업으로 만드는 데 주력했다. 사업의 역점을 에너지자산에서 물류사업으로 바꿈으로써 회사의 가치는 파이프라인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창출되며, 결국 전통적인 에너지기업보다 훨씬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엔론도 다른 인터넷 기업과 동일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즉 접속 이용자 수는 많지만, 이익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증권분석가들도 알고 있었듯이, 엔론은 분기마다 필수 자산을 팔아서 정상적인 사업 활동에서 발생한 적자를 매우고, 일관되게 성장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2001년 3월 베서니 맥클린이라는 젊은 포춘자 기자는 한 가지 의문을 던지며 결정적인 기사를 썼다. 다른 사람들이 간과해 왔던 한 가지 질문, 즉 “엔론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곧이어 투자자들도 유사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또 보스턴의 헤지펀드 투자자, 리처드 그루브먼은 엔론 주식을 공매하고 있었는데, 엔론의 거래노출에 관해 질문했다. 그루브먼은 특히 대차대조표의 한 항목, 즉 ‘기타 포괄이익 누계액'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2000년 말에 엔론의 기타 포괄이익 누계액은 마이너(-)10억 달러였다. 그루브먼은 이 항목의 적자폭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다. 스킬링은 현재 그 숫자는 제시할 수 없으며, 법규에 따라 분기 말 45일 이내에 SEC에 자료를 제출할 때 나온다고 답변했다. 그루브먼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월스트리트가 그동안 알아채지 못한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투자자들은 문제가 있다는 낌새를 알아채면 순식간에 태도가 돌변한다. 오직 팔기만 한다. 엔론의 주식이 그런 처지에 빠졌다. 주가는 매달 하락했다. 1월 말에 80달러였던 주가가 5월 말에는 52달러로 떨어졌다. 엔론은 말 그대로 연타를 맞고 있었다. 인도의 발전소에서는 단 하나뿐이던 고객을 놓쳤고, 블록버스터와의 비디오 프로젝트는 조기에 끝났으며, 포틀랜드 수도사업의 매각 계약도 깨졌다. 스킬링은 8월 중순 CEO에서 물러났다. 엔론은 CEO의 사임을 ‘개인적인 의사결정’으로 설명했다. 창업주인 레이가 스킬링의 직무를 다시 말아서 대중을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주가는 계속 떨어졌다.


다음 날 레이는 익명 - 재무부서의 임원인 쉐론 왓킨스는 나중에 자신이 썼다고 밝힘 - 의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엔론의 회계비리 사실이 조목조목 설명되어 있었다. 실용주의자인 왓킨스는 두 가지 선택안을 제시했다. 우선, ‘적발 가능성’이 아주 낮다고 판단되면, 엔론은 조용히 회계처리를 재조정하고 손실을 떠안는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를 공개하고 최선을 다해 사태를 수습한다. 레이는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었고, 그래서 왓킨스의 제안을 따르지 않았다. 2주 후 엔론의 경영진은 이사들과 모임을 가졌는데, 레이는 왓킨스의 문제를 사소한 일로 치부해버리고, 종업원들이 회사의 회계에 대해 질의했다고 막연하게 언급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사들은 엔론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떠났다. 하지만 2달 후, 엔론은 7억 1천만 달러의 세전손실을 입었다고 공시했는데, 대규모 손실을 1회성 사건으로 평가절하 했으며, 회사의 핵심적인 실적은 아주 양호하다고 주장했다. 레이는, 본능적으로, 아마 무의식적으로, 쉐론 왓킨스의 두 가지 제안을 아주 고식적인 전략으로 처리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믿지 않았다. 도미노 현상을 멈출 방법이 없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패스토우가 자산유동화회사를 통해 5천만 달러에 이르는 부당이득을 챙겼고, 그런 일이 엔론을 파멸로 몰아가고 있다는 기사를 썼다. 그러자 SEC도 패스토우의 조합에 대한 조사를 개시했다. 언론과 규제자들은 매일같이 새로운 비리를 파헤쳤다. 회계감사관들은 재무제표의 재작성을 요구했다.

11월 첫째 주에 피치 레이팅(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의 하나)사는 엔론의 신용등급을 정크본드 바로 위의 수준까지 낮췄다. 주가는 이제 한 자리 숫자에서 맴돌았다. 엔론의 거래상대는 모두 담보를 요구했고, 엔론은 사실상 돈줄이 막혔다. 엔론은 한때 보석 같은 존재였던 온라인 거래조직을 폐쇄했다. 11월 28일, 스탠더드 앤 푸어스는 엔론의 신용등급을 정크본드 수준으로 낮췄다. 이것이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채무의 즉시 상환 요청을 촉발시켰고, 엔론은 감당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결국 12월 첫 번째 주에 주주가치 구호의 선봉장이었던 엔론은 파산신청을 했다.


8. 대추락의 해

엔론이 장부를 허위로 기장했다는 사실을 시인한 순간부터 월가와 미국주식회사 관계자들은 완전히 변했다. 더욱 꼴사나운 일도 있었다. 엔론의 1차적 통제자였던 아더 앤더슨은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몇 트럭분의 문서를 조직적으로 폐기했음이 드러났다. 한때 신뢰의 대명사였던 앤더슨의 파렴치한 범법행위를 보고, 일반인들은 엔론 사태가 한 회사의 잘못이 아니라 전체시스템의 붕괴에서 비롯되었다는 심증을 굳혔다. 상승 장세는 이미 깨졌다. 소액투자자들은 다시 증시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투자자들은 주식 뮤추얼펀드에서 돈을 인출하여 채권으로 갈아탔다.

엔론 사태와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9.11 테러’는 부시대통령을 아주 활동적인 지도자로 바꿔놓았다. 부시는 곧 새로운 내각을 발표했고, 정부예산을 대폭 증액시켰다. 일반인들도 전시에 늘 그랬던 것처럼 워싱턴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했다. 미국정부는 국가를 수호하는 기관이라는 이미지를 되찾았다. 사람들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했으며, 시장의 실패로 인해 이러한 추세는 더욱 확산되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전력분배 시장에 무리하게 경쟁을 도입하려다 역효과를 냈다. 유사한 규제완화 조치를 도입하려 했던 다른 주들은 계획을 보류했다.


2002년 1월 글로벌은 엔론의 전철에 따라 파산신청을 했다. 3월경 무선통신회사의 주가가 급락했고, 월드컴과 퀘스트는 자사의 회계처리에 대해 조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공시했다. 아더 앤더슨은 공무집행 방해죄로 기소되었고, 이제 회사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졌다. 금융스캔들은 의회의 조사를 받는 게 미국의 관례이다. 첫 번째 심의는 당연히 엔론에 집중되었다. 2002년 초 상원이 엔론사태에 대한 청문회를 개최했을 때, 의원들은 주로 그 사건의 시스템적인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다.

또 2002년 봄 주식시장이 다시 급락하기 시작할 무렵, 경영자 보상 문제가 대중을 자극했다. 3월 초순에 1만 포인트가 넘던 다우지수가 위임장권유 신고서를 제출할 무렵에 급락하기 시작했다. 회사의 시장가치 하락분과 CEO의 막대한 상여금을 나란히 대비해 놓은 신고서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실 -  CEO의 과대보상 - 을 명확히 깨닫게 했다.

논평자들은 급여문제와 감사스캔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뒤늦게 깨닫기 시작했다. 장려금제도와 회계 왜곡 간의 사악한 연결고리를 처음으로 이해한 사람은 스톡옵션의 학계 옹호자, 마이클 젠슨 교수였다. 젠슨은 모든 인센티브 제도를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회사든 지금과 같은 형태의 스톡옵션을 발행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해 말 젠슨은 기업이 월스트리트에 아부하는 모든 행태, 특히 성장목표나 이익 예측치를 발표하는 행위를 중단하도록 촉구하며 자신의 해결책을 마무리 지었다. CEO급여에 대한 비판이 고양되자 뉴욕증권거래소(NYSE)는 5월에 간단하면서 의미 있는 제안을 하나 내놓았다. 상장회사는 스톡옵션계획을 확정짓기 전에 주주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예상한 대로, 그 제안은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업계와 부시대통령에 의해 거부되었다.

2002년 6월 아더 앤더슨이 기소되었다. 엔론 담당 수석이었던 데이비드 던컨은 이미 부정행위를 자백했다. 앤더슨은 곧 해체되었다. 같은 달 월드컴은 2001년 및 2002년의 사업실적을 수정한다고 발표하면서, 기 보고된 이익에서 38억 달러를 차감했다. 다음 달 월드컴은 파산신청을 했다. 월드컴의 파산은 사람들을 망연자실케 했다. 신문은 기업 윤리가 땅에 떨어졌음을 한탄했고, 여론조사기관은 CEO에 대한 존경심이 추락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는 사이에 엔론, 루슨트 등 많은 기업이 파산하면서 수만 명이 직업을 잃었다. 공기업이든 민간 기업이든 종업원은 모두 은퇴자금에 큰 손실을 입었다.

행정부는 친기업 성향에도 불구하고 기업부정 사건에 대해 활발하게 대응했다. 하여튼 겉보기에는 그러했다. SEC도 위원장의 개인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재무보고 건에 관해 공개적인 논의 절차를 개시했다. 하지만 SEC의 계획에서 한 가지 핵심 요인이 빠져있었다. 무엇이 왜 잘못 되었는지 폭넓게 조사해서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겠다는 포괄적인 구상이 없었다.

월드컴이 파산한 지 3주가 지난 후, 상원은 사베인스의원이 주도해온 포괄개혁법을 통과시켰다. 그 법안은 경영자와 이사회 이사, 사외감사와 기업변호사, 그리고 월가 애널리스트의 책임을 규정하고 있다. 2002년 7월 중순, 앨런 그린스펀도 개혁을 지지했다. 월드컴 비리가 공표된 지 4일 후, 부시는 보좌관들과 회합을 가진 다음, 회계부정에 강력히 대처하기로 결정했고, 기업비리 조사를 전담하는 특별검찰 태스크 포스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여러 개혁안을 승인했다.


7월말 ‘2002년 사베인스-옥슬리법'이 공포되었다. 중요한 규정은 경영진에게 진실준수 약제를 처방한 것이다. CEO와 CFO에게 재무제표의 정확성과 공정성에 대해 맹세하도록 하고, 중대한 오류가 있을 경우에는 구속한다고 위협했다. 또 재무제표의 허위작성이 드러나기 전에 경영진이 주식매도로 취득한 이익은 환수한다고 규정했다. 이틀 뒤 뉴욕증권거래소는 기업지배 기준을 강화하는 조치를 승인했다.

하지만 위기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화이트칼라 계층의 스캔들과 고위임원의 기소가 줄을 이었다. 증시는 계속 가라앉고 있었고, 존경받던 최고경영자에 관해 숨겨진 사실이 드러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웰치의 말 많은 이혼소송이 진행되면서 그가 GE로부터 받은 어마어마한 은퇴패키지가 하나하나 드러났다. 최근에 은퇴한 웰치는 재빨리 그러한 특전의 일부를 포기하겠다고 했지만, 나머지 사항은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여튼 웰치의 성스러운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었다. 얼마 후 그는 버니 에버스나 켄 레이와 같은 불명예스러운 CEO들과 한 부류로 취급되었다. 웰치는 법이 아니라 공정성을 위반했지만, 그의 몰락은 어떤 의미에서 더욱 고통스러웠다. 진정으로 가슴 아픈 일은 역할모델의 몰락이다. 웰치는 이제 과도한 보상을 받았던 다른 CEO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다. 웰치의 악몽은 CEO의 과도한 보수라는 일반적인 문제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더욱 심각한 비리가 있다. 뉴욕 주 검찰총장 스피처가 밝혀낸 사실인데, 모건 스탠리는 경쟁회사에 뇌물을 제공해서 모건의 고객에 대해 긍정적인 조사보고서를 쓰게 했다. 이 사건을 비롯하여 스피처가 폭로한 여러 가지 비리를 종합해보면, 월가의 연구조사가 완전히 썩었음을 알 수 있다. 스캔들의 구름은 아직 걷히지 않았다. 기업비리는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이곳저곳에서 불거지고 있었고,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급속히 전모를 드러냈다. 스캔들의 물줄기가 제자리를 찾아가가려면 워싱턴의 한 거물을 무너뜨려야할 운명인 듯했다. 하여튼 스캔들의 구름은 거기, 증권거래위원회의(SEC)의 위원장인 하비 피트가 있는 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개혁을 추진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지고 공인회계사들을 감시할 새로운 부서를 조직하는 일이 가장 시급했다. 부서장의 선임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처음에 피트가 선택한 윌리엄 웹스터는 큰 비판을 불러일으켰지만, 결국 웹스터의 지명은 승인되었다.

그런데 불미스러운 사건이 드러나면서 웹스터의 발목을 잡았다. 웹스터는 최근까지 US 테크놀로지라는 인터넷 창업지원회사의 감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었다. 아주 말썽 많은 회사였다. 회사는 도산했고, 최고경영자는 형사소송에 회부되었다. 외부감사가 그 인터넷기업에 문제가 있음을 경고하자, 웹스터는 그 감사를 해고했다. 공정한 회계처리를 수호할 국가 공무원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 뒤 피트가 그 회사가 조사를 받고 있음을 사전에 알았으며, 그 문제가 웹스터의 지명과는 무관하다고 결정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피트는 소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웹스터가 어떻게 지명되었는지 조사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선정한 절차를 스스로 조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웃지 못할 비극이었다. 왜냐하면 지난 몇 년간 이해 상충의 문제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많은 교훈을 얻었는데, 정작 SEC의 위원장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듯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도 하비 피트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부시는 기업의 지배구조 문제에 염증이 났고, 끊임없는 스캔들로 그 불씨가 살아나는데 지쳤다. 피트는 위기를 해결할 수단을 강구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기 위한 방도를 내놓았고, 그것으로 그의 관료 생활에 종지부가 찍혔다. 2002년 총선일 밤, 피트는 사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