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마음의 내적치유에 관한 연구 19
2. 상한 마음을 드러내기
문제에 대한 인지가 되었다면 이것에 대하 드러냄이 그 다음 단계이다. 우리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은 두려운 경험이 될 수 있다. 우리 대부분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방어벽을 구축하는 데 인생의 대부분을 소모했다. 고립되어 살아가는 것은 더 이상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자신의 드러냄은 고립과 외로움을 벗어나는 회복의 통로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빛 가운데에서 행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빛 가운데의 삶은 자신의 죄와 연약함과 상한 심령의 문제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함, 행복 그리고 평안함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그것은 일종의 겸손한 경험이다. 우리가 완전히 정직해지도록 요청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꾸밀 필요가 없다.
1)믿음으로 드러내기
내적 치유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신자거나 불신자이거나를 떠나서 거의 언제나 회복과 치유의 영적인 차원에 대한 언급을 한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치유의 근본적인 의존을 확인 시켜주는 것이다.
앗시스의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는 "주님,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수용하는 평정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키는 용기와 그것을 분별할 지혜를 우리에게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두 종류의 문제가 있음을 언급하였다.
부모의 거부, 학대, 무시, 음주는 결코 변화되지 않을 것들이다. 우리의 단 한가지의 방책은 하나님의 힘으로 그것들을 수용하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 주실 능력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매순간의 경험이다. 사도 바울은 크리스챤들이 하나님의 비할 수 없는 "믿는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능력"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였다. 그리고는 그는 "그의 힘의 강력을 역사하심을 따라.......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셨다"(엡1:19-20)라고 그 능력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 능력은 우리가 그를 의지할 때에 만 우리에게 역사 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 매일 우리 자신의 자원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매순간을 맞이해야 하는 이유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자유가 있다. 결국 내적인 아픔을 드러내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며 이 용기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라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럴 때 진정한 치유와 회복이 있다.
이것은 또한 구체적으로 두 가지 역사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하나는 십자가의 역사에 대한 믿음이요
*둘째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믿음이다.
첫째로, 십자가의 역사를 믿는다는 것은 내적인 상처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죄가 온 인류에게 가져온 모든 해악들-죄책감뿐만 아니라 슬픔, 고통, 질병, 절망, 두려움, 소외 등 이 모든 것을 다 처리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슴속에서 고통하는 상처의 깊이를 다 헤아리신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을 때 영적으로 그리고 육적으로 가장 잔인하게죽이는 처형술에 따라 죽으셨다. 정서적으로 심판을 당하신 것이다. 실제로 성경기자는 십자가의 고통보다는 그 수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사야53장 3-4절)
예수님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상처와 배척을 당하셨다. 자기 백성?르 찾아 가끼시던 성읍에 오셨건만 그들은 도리어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은 시편 22편으로 자신을 말씀하셨다. 시편 22편은 이렇게 시작된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리고 히브리어 원어로 " 다 이루었다" 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예수님께서는 극에 다다랐을 때에 자기 아버지께서 자기를 뜻대로 외면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슬픔과 애환을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치유되는 것이다. 그 분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온전히 나음을 입는다.
둘째로, 성령의 역사를 믿는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르 완전히 신뢰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Adams는 상담에 있어서의 주역을 성령이라고 한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파라클레이토스를 옹호자, 혹은 상담자, 돕는 자로 번역한 것은 매우 타당한일이다. 예수님은 이 상담자를 성령과 진리의 영으로 동일시 하였다.
로마서 8장 15절에는 성령을 일컬어 양자의 영이라 말씀한다. 이 말은 오늘날 흔히 말하는 양자가 아니다. 유대인이 말하는 양자는 어떤 아들이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도록 이끄는 성숙의 영이라는 말이다.(엡4:15) 성령께서는 이와같은 성숙의 사역으로서 깨어진 심령을 다시 온전케하시는 기름부음의 일을 하신다. 특별히 성령의 사역을 묘사하는 명칭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4:26절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파라클레이토스라는 이름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감정을 치유하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상처 입은 감정으로 가까이 접근하셔야만 한다. 다시 말하며 우리가 성령의 역사 안으로 우리의 상처난 부분을 열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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