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 주서택
문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합리적인 말씀 신앙보다는
초자연적이고 신비주의적 신앙체험을 구하는 자세가 아닌가요?
이런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답 :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모든 경건한 크리스천들이라면
반드시 구해야 하는 기본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주측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입니다.
즉 자신의 명철을 믿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명철을 믿지 말라고 얼마나 단호하게 경고하십니까?
아무리 똑똑하고 신앙이 좋다 해도 우리는 5분 뒤의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며
얼마든지 속임을 당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바르게 살고 싶다면,
그리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가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란 단순히 말소리가 아니라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며 안내입니다.
꿈을 통해서, 심지어는 굴러가는 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이시고 우주적인 분이십니다.
우리의 이성의 한계로는 측량 불가능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그분이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며,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개입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 혼자서 행하시지 않고
우리를 통로로 사용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의 이성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한 되어 있으나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처럼 낮추셔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알려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인격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인 우리에게 인격을 만들어주신 것은
인격적인 관계를 나누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관계란 의사소통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이고 친밀한 의사소통 없이는 인격적인 관계의 성장이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달과 별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인격적인 감정으로 깊어질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
그분과의 인격적 교제가 없다면 관계의 성장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을 흠모할 수 있고,
그를 좋아할 수 있고, 닮아가려 할 수 있지만
그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깊이 가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존했던 인물이기는 하지만 죽었기 때문에
현재 나의 삶 속에서 그들과 교재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다만 그들이 써놓은 글을 읽으며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그들의 행적을 통해 그들을 존경할 뿐
그들이 개인적으로 나에게 무슨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그분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현재 살아있는 당신과 나,
즉 '산자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변론해 보자고 그분은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하나님과 의논하고 나누지 않는다면
그분을 마치 스타를 좋아하듯이 혹은 종교적인 대상으로 존경할 수는 있으나
그분으로 인하여 느끼는 만족감과 충족감은 결코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대화가 끊어진 사람은
처음에는 아주 뜨겁게 신앙생활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의식화되고 종교화되어 하나님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그의 삶은 이기심과 안목의 정욕으로 가득 차게 되며
하나님의 교회를 세상과 똑같은 분위기로 만들어 버립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삶의 체험과 대화가 이어져야
나이가 들어가도 속사람은 계속 새롭게 성장하며
신앙에 흥미와 기대를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내게 개인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자세,
이것은 결코 비 이성적인 것도 아니며 비합리적인 것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