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되고 살이 된 인터뷰
-‘김만년 기관사의 시와 열차’ 방송 후기-
아마도 김만년 차장님은 5분도 채 되지 않는 프로그램이 하루 종일 쫓아다니면서 본인을 괴롭히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셨을 거다. 아니, 여덟 번의 공중파 방송 출연 중에 단연 으뜸(?)으로 힘들었다고 후에 말씀하셨다. 단순 기차 여행지 소개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인물을 중심으로 기차여행을 소개하자는 기획, 그 첫 번째 손님으로 시인이자 기관사인 김만년 차장님을 모셨다.
출발을 앞둔 청량리역 기관차 앞에서 촬영은 시작됐다. 차장님과는 개인적으로 두 번째 만남. 지난해 홍보실 송년회에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후, 방송을 위한 전화 통화와 메일만 나눈 상태였다. 제사 때문에 전 날 잠을 거의 못 잤다고 힘들어 하시면서도 차장님은 손에 기관사 제복과 곱게 프린트한 시 꾸러미를 드시고,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촬영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묻고 계셨다. 떨리기는 나도 마찬가지. 누군가와 동행하는 여행은 인터뷰를 얼마나 잘 끌어내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전동차 기관실에는 들어가 봤지만, 새마을호 기관차는 처음 경험해보는 터라 기분 좋은 긴장이 몰려왔다. 직접 타보니 기관차는 좁고, 덥고, 들어가고 나올 때는 90도 계단을 오르내려야해 불편한 곳이었다. 기장이나 기관사라면 으레 좋은 환경에서 일하겠거니 했던 마음은 숙연함으로 바뀌었다. 새삼 철도인들의 숨은 고충이 느껴졌다고 할까. 좁은 기관차 안에서 기관사, 부기관사, 김만년 차장님, 피디님, 촬영감독님, 나, 이렇게 6명이 복작대느라 촬영은 순조롭지 못했다. 소위 ‘각’이 안나오는 위치에서 자리를 잡고 찍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워보였다. 그렇다고 6명 중에 기관실에서 ‘내려도 되는’ 사람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운행 장면 촬영 때문에 열차가 몇 분 연착해 관제실에서는 그 이유를 물어오고, 거기다 덥기까지. 땀나는 시간이었다. 중요 인터뷰에, 운전 장면까지 찍을 것은 산더미. 땀을 뻘뻘 흘린 후 기념사진 한 장 박지 못한 채 내려야 할 시간이 되었다.
NG 컷은 드라마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프로그램도 촬영 때 여러 번의 NG가 난다. 멘트를 하는 장면이 아니어도 말이다. 열차에서 이동하면서, 여행지에서 구경하면서,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또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같은 장면을 찍고 또 찍는다. 어색해서, 그림이 완벽하지 않아서, 갑자기 뒤에서 누가 카메라를 쳐다봐서, 여러 각도에서 찍어야 해서 등등 다양한 이유가 따른다. 그리고 ‘베스트 오브 베스트’로 뽑힌 컷들만 전파를 타게 된다. 아마도 차장님은 같은 행동과 말을 여러 번씩 반복해야 한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셨을 텐데, 급박한 상황에서도 싫은 내색 한 번 안내시고 오히려 스텝들을 편안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했다.
철길 사이의 너비는 1.435미터. 전국으로 뻗어있는 철길은 어디에서도 정확하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오차가 있다면 아찔한 일이 벌어지겠지.) 우리 앞에 펼쳐진 끝없는 철길을 바라보며, 차장님은 이 너비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에 비유하셨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 그 거리를 유지하는 게 어렵고 중요하다고 말이다. 오래, 길게 가는 사이가 되려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는 얼마만큼의 거리일까? 나는 문득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싶다” 라는 정현종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그 섬이 곧 1.435미터는 아닐런지.
고향으로 향하기에 차장님에게는 어머니로 비유되는 중앙선 철길을 타고 영주역을 거쳐 봉화까지 가는 길. 요즘 ‘엄마’니까 편하다는 이유로, 내 몸이 힘들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 소홀했던 나는 차장님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에 섬뜩해졌다.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고, 자식만을 위해 기도하다 가신 그의 어머니. 어머니가 없는 세상, 잘하고 싶어도 이제 잘할 수 없는 때가 온다면 그 때 나는 얼마나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까. “그리움이 지극하면 시가 되더라.” 그래서 시인이 되신 차장님은 술술 이야기를 풀어주시고, 나는 어느새 촬영보다는 차장님의 이야기에 더 빠져 내 인생을 돌아보고 있었다.
어머님이 자주 다니시던 청량산의 작은 절 ‘청량사’는 오르는 길이 정말 가팔라 마음먹고 등산을 해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은자의 산’이라는 별명처럼 일반인들에게는 숨겨진 곳이었는데 산꼭대기에 위치해, 아담한 크기에 어여쁜 모습을 하고 있는 이곳이 ‘청량’이라는 말과 어울렸다.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한 꽃분홍색 등들이 우리 가는 길을 반겨줬다. 절 안의 곳곳을 둘러보며 차장님과 나는 인터뷰 겸 촬영을 이어갔다. 특히 절 바로 아래에는 불우이웃을 돕는 목적으로 세워진 전통찻집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 있는데 그 이름과 모습이 독특해 방송에서도 소개하기로 했다. 차장님은 찻집 이름에서 ‘바람’은 나 같은 범인(凡人)들을 뜻하는 것이요, ‘소리’는 ‘스님의 뜻’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속세에 사는 사람들이 절에서 뜻을 접하면’ 정도로 풀이할 수 있을까.
시인의 입으로 ‘지독한 하루였다’고 표현된 이 날 촬영은 봉화의 돼지 숯불구이집에서 친구분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촬영을 마친 시간은 저녁 8시, 서울 도착은 밤 12시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획 의도와는 다른 방향의 방송이 완성돼 속상한 마음이 남았다. 그의 시나 어머니와의 사연 등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채 여행지 소개에만 그친 것 같아서다. 모니터 후 방송 초반에 김만년 차장님과 그의 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있었어야 한다는 평이 남았다. 제작 과정 중 방송 시간상의 제약에서 오는 문제로 원활한 협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은 김만년 차장님도 아쉬워하고 계실 것이어서 아직도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홍보실 시절의 경험, 철도인이자 문학인으로서의 생활 등 오프 더 레코드의 이야기들을 많이 들을 수 있어 개인적으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촬영이었다. 차장님이 어서 주말농장에 나를 불러주시기를 바라며, 고생하신 김만년 차장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방송일 08/05/08, 촬영일 08/05/03)
- 촬영 일정 -
영주역 → 봉화역 → 청량산 → 청량사(산 정상에 위치해 청량산 등산 후에 이를 수 있음) → 유리보전, 삼층석탑, 찻집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모두 청량사 안에 있으며, 찻집은 청량사 바로 밑에 위치) → 어풍대, 총명수(청량사 건너편 산에 있으며 걸어서 1시간 거리) → 돼지 숯불 갈비집(봉화 곳곳에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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