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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서 강해 1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5:39

 

 

 

 

 

 

 

 

 

로마서 강해 1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목차>

 

로마서 1강(롬1:1-7) 복음이란
로마서 2강(롬1:1~2) 하나님의 복음
로마서 3강(롬1:3-6) 복음의 ABC
로마서 4강(롬1:3-4절) 강력한 복음
로마서 5강(롬1:8-12절) 성령을 추구하는 복음
로마서 6강(롬1:16-17절) 하나님의 손길로서의 복음
로마서 7강(롬1:16-17절) 하나님의 의(義)
로마서 8강(롬1:18-19절) 하나님의 진노
로마서 9강(롬1:18-23절) 불의와 진노
로마서 10강(롬1:18-19절) 불경건과 불의 

 

 

 

 

 

 

 

 

 

 

로마서 1강(롬 1:1-7)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 4권이 있고 그 다음에 어떻게 이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었는가 하는 사도행전이 있으며 그 후에 서신서들로 되어 있습니다. 그 서신서들 중에 로마서가 처음에 있는 이유는 제일 길기 때문이거나 제일 먼저 기록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을 편집할 때 로마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서신서의 맨 앞부분에 로마서를 편집한 것입니다. 로마서가 다른 서신서에 비해서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내용과 다루는 부분의 포괄성, 균형성, 이런 데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서 등은 바울이 자기가 세운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음을 듣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또는 어떤 문제를 권면하기 위하여 쓴 서신서들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서신서들은 일단 바울이 자기가 세운 교회에서 복음에 대한 모든 것들을 전하고 그 중에 문제가 됐던 어느 부분을 다루고 있다면 로마서는 전혀 상황이 다르게, 바울이 세우지 않은 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쓴 서신서입니다.


 


로마는 당시 이교도의 수도이고 전 이방의 대표적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르며, 모세를 부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모르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안에 있는 복음에 관한 소개와 기독교인이 지켜야 하는 내용들은 그런 의미에서 복음에 관한 전체적인 시각 그리고 균형감각 속에서의 중요한 부분들을 살펴 보기에 적절한 서신서가 되었습니다. 로마서에서 설명하는 복음에 관한 설명을 이해하는 것은 신앙인들이 알아야 하고 지켜야 하는데 우선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감각인 것 같습니다. 1:11에는 이 글을 쓰는 대표적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롬1:11). 여기서 신령한 은사란 무엇이냐 하면 복음입니다. 이것을 은사라고 설명합니다. 은사란, 말 그대로 은혜로 베풀어 주는 것, 공짜로 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이해의 균형감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 한국교회는 별로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의외로 복음과 구원 자체는 은사로 생각지 않고 구원을 얻은 이후에 덧붙여 주시는 어떤 특별한 다른 선물을 계산하기 일쑤입니다. 방언이라든가 신유의 은사라든가 환상을 본다든가 특별한 어떤 체험을 한다든가 하는 것을 은사로 생각하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 자체를 은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그리고 로마서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 복음이라는 것,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은사로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는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서신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썼을 때 사도 바울이 기록한 이런 표현들은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은사이며 충격적입니다.


 


왜 충격적이냐 하면 원래 인간이란 그 사고방식에 있어서 어떤 신이 있다고 믿지 않는 족속들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휴머니즘이라고 합니다. 휴머니즘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우리말로는 적당한 번역을 할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말로 ‘인간애’라는 말로 많이 씁니다만 그것은 휴머니즘이라고 보통 쓰는 용어의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영화 광고에 나오는 ‘넘치는 휴머니즘’ 그럴 때 휴머니즘은 인간애입니다. 짐승과 다른 인간의 고급한 어떤 정신력, 도덕성, 인간미 넘치는 어떤 긍휼과 남을 위하는 사랑 이런 것을 휴머니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학적인 용어로 휴머니즘이란 전혀 다른 용어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전가치체계를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인간을 최고의 권위로 놓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휴머니즘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 휴머니즘밖에 없는 사고와 사상체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우리가 믿는 이 기독교를 선언할 때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복음을 설명할 떄 이 복음이 복음 된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이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식으로 복음을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으로 초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는 사실입니다. 뭐가 다르냐 하면 인간이 휴머니즘이라는 사고체계 속에 있으면 구원이라는 문제는 의를 찾는 것입니다. 완전한 의를 찾는 작업, 철학이든 도덕이든 완전한 의를 찾아 나가는 가장 고급한 목표요, 종교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인간이 의로워지는가, 어떻게 해야 사람이 사람다운가? 이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 갖는 종교요 윤리요 도덕이요 사상이요 인간된 가치라고 설명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설명을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는가”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결국 휴머니즘적 사고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아니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세계를 향하여 이 복음을 말할때 이것이 왜 복음이냐, 구원은 너희가 무엇을 하여야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다. 즉 어떻게 구원을 얻는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을 베풀었느냐를 설명하고 그것을 목표를 하여 쓴 서신이 로마서인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다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느냐와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을 베풀었느냐의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느냐 하면 한쪽은 앞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사고방식과 모든 정신체계의 궁극적인 권위가 인간 자신인 것과 모든 사고체계와 모든 존재의 최고 권위에 하나님이 계신 것과의 차이입니다.


 


영원하시고 전능하시고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상과 인간이 최고라는 사상 사이의 이 넘을 수 없는 체계가 두 사상체계 사이의 대립되는 개념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 모든 신자에게까지도 종종 틀리기 쉬운 문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로마서를 배우면서 특별히 사도 바울의 강조함을 따라서 분명하게 우리 신앙의 근거로써 깔아 놓아야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하려는 작업이 무엇이냐 하면 “복음이 무어냐”,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다. 그래서 복음이다”라는 것입니다. 16절에 가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이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구원이라는 것은 어떻게 구원을 얻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구원을 베풀었느냐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고린도 교회에 가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지금식으로 이야기하면 설교했을 때, 설교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도리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훨씬 일차적으로 떠오릅니다. 그러나 영어로 이야기할 때 설교(preaching)라는 것은 라틴어의 어원이 ‘설득’, 아니면 ‘공포’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을 선포하러 왔지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좋은 거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좋은 약이니 하나씩 사 먹으라는 식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오늘날 예수를 믿었다는 개념이 훨씬 많습니다. 난 믿었다. 난 선택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런 의미에서는 복음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믿은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요 다 양 같아서 자기 길로 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대사면령을 내리고 복귀를 선언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의 죄값을 묻지 않겠다. 너희를 처단치 않겠다. 너희를 용서하겠다. 다 집으로 돌아오라.” 그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라는 것은 죄가 다 사하여졌고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인정했기 때문에 떨어진 명령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이지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어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마치 어떤 나라에 왕을 배반하고 도망가서 살고 있는 나쁜 사람들의 마을에 왕의 사자가 와서 포고문을 읽는 것과 같습니다. “왕께서 이번에 득남하신 기념으로 여러분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기로 했으니 앞으로는 죄 짓지 말고 충성된 백성으로 살아라.” 이렇게 공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런 식의 표현은 성경에 참으로 많이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2:38로 가보십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 2:38-39).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라’ 이것을 누구에게 주었다구요?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그러니까 구원의 시작, 구원의 역동성, 그 능력의 출발과 그 효력이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느냐 하면 반응자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행하시고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교도들에게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고 인간이 전부인 줄 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갑자기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의가 무어냐 구원이 무어냐 복이 무어냐 하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 작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존재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 된 것, 이 관계가 일차적으로 정리되지 않고는 복음 구실을 못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신앙의 최고 취약점이 무엇이냐고 할 때는 언제나 우리가 얻고, 우리가 약속받은 것들의 근거를 자신 안에서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언제나 우리의 신앙은 흔들립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게을리했거나 어떤 죄를 지었거나 혹은 어떤 실패를 맛보면 우리는 갑자기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의심하게 됩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이 흔들리는 한 그 위에 무엇을 쌓아 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신자의 신앙이 약한 가장 큰 이유는 자주 지진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지진이 일어나는 땅 위에다 건물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지반이 튼튼해야 2층을 짓든 20층을 짓든 200층을 짓든 건물을 지을 것 아닙니까?


 


강한 신앙은 결국 좋은 기초 위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읽었던 본문 로마서 1장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너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느냐, 너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 할 때도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6-7)


 


부르심을 입었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구원의 주도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구원 문제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나 같은 것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찬송이 있습니다.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이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 같은 것을 부르셨는지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을 뿐 아니라 최악의 상태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너무 크고 그 은혜와 사랑의 약속이 너무 영광된 것입니다. 받을 만하지 못한 자에게 그것이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아는 그 찬송가 제목이 Amazing Grace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합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은 붙고 공부 못하는 사람은 떨어졌다는 그런 것을 복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떨어져 마땅한 자를 붙여주고 장학금도 준다가 복음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복음 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된 소식이라는 말에 복됨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자기의 믿음과 신앙에 대하여 전전긍긍하는 곳으로 자기도 모르게 쉽게 떠밀려 내려가고 맙니다.


 


신앙을 확인하는 방법 중에서 과연 나에게 복음이 복된 소식인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바로 복음이 무엇이냐를 설명하는 중에 지금 말씀드린 이것과 함꼐 한 가지 더 중요한 부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구원의 교리가,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얻은 바 이 구원이 그리스도인의 미래 전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이 복음된 가치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죄인된 우리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영원한 우리의 영광된 운명으로 결정된다는 데에 복음이 복음된 가치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구원일 뿐만 아니라 그 구원이 절대 취소되거나 약화되지 않고 다른 것으로 방해되지 않고 영광된  열매를 맺고야만다는 데에 이 구원의 복음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절대 취소되지 않습니다. 방해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구원한 그의 자녀들을 어떻게 영광 된 자리에 앉히시고 말 것인가 하는 것, 그것이 로마서를 쓰게 된 동기이고 모든 신자에게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두가지를 이제 분명하게 하나의 결론으로 확인하려고 합니다. 구원은 내가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 운명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에게 허락된 이 구원은 왜 취소되지 않느냐 하면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쪽에서 조건을 갖고 하셨지 내 쪽에다 조건을 묻지 않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구원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즉 가장 최악의 조건 속에서 얻어진 구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는 것은 보통 어느 때조? ‘내가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큰 죄를 졌는데도 하나님이 내 편이란 말인가?’ 그것이 우리를 흔듭니다. 그것이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그때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자책감, 내가 이렇게 죄를 지었는데도 불구하고라는 것은 그 전에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라는 것에 비교하면 무척 괜찮은 상태입니다. 그때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을 상태입니다. 그때 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분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하물며 지금이겠습니까? 이것이 로마서에서 우리에게 밝히려고 하는 중요한 복음의 성격입니다.


 


두 번째로 기억할 것은 이 복음의 방식상 우리는 우리가 얻은 구원을 취소받지 않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11).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셨던 방법이 어떤 방법이냐 하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도 함께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부활과 함께 우리도 함께 부활시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 있는 이유가 그 안에 주의 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지 못합니다. 성경식으로 표현할 때 나는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사는 자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으며 그리스도안에 내가 있는 자입니다. 신자는 더 이상 자기 혼자가 아닙니다. 나를 건드리는 자는 주를 건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회심히가 전에 예수 믿는 자를 핍박했고 하나님을 편든답시고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 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을 때 무어라고 꾸짖으셨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를 믿는 자를 핍박하느냐가 아니라 나를 핍박하느냐는 이것이 구원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닙니다. 나는 나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내가 지옥에 가면 주님이 따라 가셔야 될 지경인 것입니다. 주께서 하늘 나라에 계시면 우리도 거기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과 함께 하늘 보좌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과 영원한 운명이 말입니다. 이것을 방해할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 속에 포함되어 있는 성격입니다.


 


복음은 그런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자는 아직도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잘 아시는 요한일서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아직 복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시인하는 것이 갖는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두려움을 몰아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오늘날 신자의 가장 큰 약점이 무어냐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을 스스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누가 이렇게 물을 수는 있습니다. “야 너 따위 것이...”, “니 까짓 것이...” 이럴 때 분명히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내 까짓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Amazing Grace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사랑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 복음이 복음 된 사실이 우리의 운명으로 고정된 방식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성령께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지키시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고 방해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이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6-28).


 


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죠?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들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도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편을 들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잘되는 것이 망하는 것이 됩니다. 부자라서 나빠지고 또 거꾸로 가난해지고 실패하면 실패해서 막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실패하면 실패해서 약이 되는 것입니다. 잘되면 잘된 것이 약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같은 사건을 보고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으로 본인이 어떤 영양소로 습득하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천차만별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유익하게 이해하고 각성하며 습득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못가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내고 그렇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채찍질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특권들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면 복음이 무어냐, 이것을 허락하신 이가 이 일을 이루시고야 말 것이라는 그분의 의지력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강약은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이냐면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이며 이것을 허락하신 이가 누구냐를 아는 싸움입니다. 그분의 의지를 이해하는 것만큼 신자의 신앙은 커집니다.


 


그것을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37-39).


 


이것이 로마서를 쓰게 된 사도 바울의 깊은 뜻입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가 분명히 알기를 원하고 그의 신앙의 가장 큰 기초로 놓기를 원하는 성경의 주장입니다. 이 근거가 흔들리면 아무것도 그 위에 쌓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연약함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허락한 것을 이루실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를 향한 변치않는 사랑과 그 집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실패하면 하나님도 실패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연약하면 하나님도 연약한 것으로 생각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불성실하면 주님도 우리와 관계를 끊는다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혼자 울고 불고 삐치고 도와 달라고 그러다가 좋은 시간들을 다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복음을 복음 되게 간직합시다. 그것은 정말 복된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며 모든 좋은 것으로 허락하셔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거기에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우리가 쓸데없이 무엇인가 더 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자 된 것을 감사할 줄 알기로 합시다. 그리고 신자다운 싸움을 이제 시작하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운명을 영광된 자리에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요구합니다. 신자답게 사십시오. 구원을 얻기 위하여 의롭게 살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되었은즉,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으 받았으니 의롭게 사십시오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이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너희의 영원한 운명이 하나님 앞에 있으니 그분의 기뻐하심을 따라 살아라’입니다. 조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조건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었으므로 요구되는 우리의 권리입니다. 우리의 우리된 신분이요 마땅한 특권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하나님의 허락하신 은혜 안에서 굳게 하시고 성실히 신자 된 삶을 누리셔서 세상의 헛된 유혹과 시험에 지지 마시고 여러분의 인생을 낭비하지 마시고 신자 된 삶으로 열매맺는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2강(롬1:1~2) 하나님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로마서에서 기록된 내용은 이스라엘에 국한되었던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그 신앙이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방인에게 설명되어지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서신서는 기독교의 복음이라는 내용에 관하여 그 어느 서신서보다도 정확하게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복음을 제대로 추적해 보면 신앙에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뜻밖에 보통 신자들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즘 들어서 특히 기독교 신앙은 너무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이라서 틀릴 것은 없습니다. 또 틀릴 것이 없다는 것 자체가 좀 우습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본문에 보시면 복음이 일차적으로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1-2).


 


우리가 복음을 성부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느냐 성자 예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의 신앙의 색깔을 굉장히 차이나게 합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같은 하나님이지만 구별된 분입니다. 성경에서 한 하나님이라고 그럴 때는 권위와 능력이 동등하시다는 의미에서 하나라고 그러지 숫자적인 개념의 하나라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다른 분들입니다. 그 세 분은 한 분이 이런저런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이상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성경이 그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즉 성자 하나님을 중심적으로 한 신앙을 가지면 신앙이 자꾸 감상적인 형태를 띠게 됩니다. 원래 성부 하나님은 노하시기를 잘 하시고 벌 주기를 기뻐하시는 공포의 하나님이고 성자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시고 우리를 치마폭에 감싸주시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라는, 분위기상 그렇게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교회 역사상 구약의 하나님은 전쟁의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 공포의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은 그 독재자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구해 낸 구세주, 이렇게 구별한 이단운동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중심적으로 신앙을 가질 때 그 신앙이 이런 식의 분위기를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골고다 길을 십자가를 지고 한발한발 올라가시는 예수님, 눈물이 글썽글썽해 가지고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이런 찬송을 부르며 눈물 흘리고, 이런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의 감동과 이해 속에 감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면 난처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로마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복음을 설명할 때 가장 굵고 중요한 근거로서 제시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주권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은 예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그 일을 즐겨, 성부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시고 기쁘게 순종하셔서 대속 제물로 오신 것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성경은 복음에 관한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입니다.


 


우리는 ‘복음’그러면 눈물이 앞을 가리는 무슨 신파배우들 같습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회개, 눈물 이런 것의 시작은 아닙니다. ‘구원’ 그러면 높으신 하나님, 온 천하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가장 크고 놀랍고 영광스러운 그리고 열심 있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으로 가 보십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후에 제자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입니다. “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눅 24:13-23).


 


제자들이 와서 실망한 고백이 무어냐 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인 줄 알았는데 안 그렇더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인 줄 기대했던 것과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대속 사역을 이루신 것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제자들이 기대했던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일하심에 관한 기대가 하나님의 약속과 다른 우리 나름대로의 생각이라는 것을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을 우리 마음대로 상상하고 우리 혼자 정하고 기대해 놓고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슬퍼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는 것을 혼자서 기대하고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주님의 답변을 잘 보십시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눅 24:25-26).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너희를 구원하실 때에 너희가 하는 식으로 하겠다고 했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키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내어 너희 죄를 대속케 하기 위하여 그를 죽여 너희 죄값을 그들에게 지우기로 하지 않았느냐!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지 않았느냐! 도대체 너희가 무엇 때문에 이것을 모르느냐! 왜 너희들 마음대로 생각하느냐?


 


복음을 말할 때 기억할 것은 내용 이전에 하나님이 정하시고 계획 하신대로 수행하고 있다는 하나님의 주도권입니다. 하나님의 주도권, 하나님의 근거되심 이것을 놓치고는 믿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장 잘못된 신앙의 실패는 우리가 신앙이라고 믿는 것들이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것과 동떨어진 내 상상과 내 기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혼자서 넘어지고 비탄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 시대에 있으면서 성경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을 정말 “찬송하리로다”라고 맞이했어야 할 사건이 아닙니까? 주님이 무어라고 그러면서 운명하십니까 “다 이루었도다”입니다. 오늘날도 똑같이 이 신앙을 성경적인 신앙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소유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기분에, 자기 필요에 의한 신앙을 설정하고 혼자서 실망하고 울고 불고, 한탄하고 그리고 도망가고 그러는 셈입니다. 같은 누가복음 24:44을 보시면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나타나셔서 다시 한 번 이렇게 강조합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4-48).


 


강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죽기 전에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 그것입니다. “내가 우연히 하려던 어떤 일이 실패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약속대로 계획대로 된 일이 아니냐 내가 같이 있을 때 이것을 가르치지 않았느냐? 죽으러 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는 대접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나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러 왔다고 내가 분명히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내가 약속대로 죽었고 약속대로 살아나지 않았느냐?

 

 

 

구원과 회개는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느니”(눅 24:47)에서와 같은 것입니다.


 
대개 구원 얻는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의 결실입니다. 49절을 봅시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사도행전 1:8의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우리는 성령을 받는 문제도 우리가 먼저 구원을 받아서 이제 주를 위하여 무엇을 보답할까, 그리고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성령을 받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좀 조심해서 들으십시오.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되는 것은 우리쪽이 아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쪽이 아쉬운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좀 우습습니다만 여러분의 이해부족 때문에 할 수 없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쪽의 집념이고 열심입니다. 성령을 부어주시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쪽에서 그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갖고 계신 그분의 깊은 목표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 일을 해야 할 책임과 빚을 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우리에게는 아무런 능력과 조건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한하신 은혜와 긍휼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일이 시행되었고 그리고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고 장차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그러면 기억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 우리의 기쁨, 우리의 영원한 천국과 기업 이것만이 아니라 온 천하만물을 지으시고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이가 세상과 역사의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을 무엇으로 갖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전파입니다. 세상 역사라는 것은 문명이나 문화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그리스문명, 영국문명,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즉 아리스토텔레스, 세익스피어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역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 그의 아들을 보내사 모든 인류를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 속으로 부르신 이 구원 역사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그 나라의 군사력이나 정치력이나 경제적 측면에서 찾으면 안됩니다. 복음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따로 불러서 심은 모판을 이제 모내기하는 작업입니다. 그 나라를 멸망시켜서 그것이 하나의 민족주의 속에 파묻혀 있는 이 기독교 신앙을 전세계에 퍼뜨리기 위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킵니다. 로마의 흥망은 그 모내기를 하기 위한 경운기입니다. 로마를 통하여 전세계에 복음이 전파됩니다.


 


19C에 이르러서 구라파 열강들이 전세계를 식민지로 하고 식민지 정책을 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모든 나라에서 수탈을 했습니다. 어느 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그 나라의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그 나라가 영원무궁토록 잘 먹고 잘 살지는 않았습니다. 해 지는 시간이 없는 영국이 이미 거렁뱅이가 된 지 오래 되었고 미국도 지금 깡통차기가 일보직전입니다.


 


모든 나라는 복음과 연결되어서 성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알아야 하냐면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이 역사와 국가, 인류, 아니 한 인간, 개인의 존재와 인생과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시대와 국가, 아니 전역사가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움직이고 계시고 그 일을 추진하는 한, 복음 속에는 모든 안전 보장이 되어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안녕을 위하여 우리 나라가 잘되고 그래서 이번에 중동전쟁이 안 터져야 되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별로 바람직한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가 못살게 된다고 해서 여러분 개인의 영혼에 무슨 손해를 입을 것도 없고 우리 나라 경제가 부흥한다고 해서 여러분 영혼이 그것으로 인하여 이익을 볼 것도 없습니다. 한 나라가 잘 사느냐 못사느냐, 전쟁을 하느냐 평화를 갖느냐 하는 것은 복음과 무관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역사를 움직이거나 역사의 핵심되는 줄거리는 아닙니다. 모두가 들러리입니다. 모두가 엑스트라들입니다.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요 그것을 믿고 추종하는 자뿐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핵심되는 줄거리입니다.


 


세계 역사는 부시 대통령이나 고르바쵸프가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신앙이 좋았다, 나빴다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개인의 기분이 좋은 것으로 인하여 신앙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개인 기분이 저하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열심히 식는 것도 아니며 한 나라가 공산화된다고 해서 복음이 끊기는 것도 아니고 한 나라가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그 나라의 영적 부흥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것과 세상에서 관심을 두는 것과 실제로 역사의 줄거리가 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세상에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여러분의 신앙이 흔들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이 흔들릴 것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11장으로 가 보십시다. 성경에 이미 이와 똑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마 11:2-3).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당신이 메시아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척 아이러니컬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그의 존재 자체, 그의 탄생 자체가 저 분이 메시아다 하는 것 때문에 탄생한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를 배고 있던 어머니 엘리사벳이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된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기뻐서 복 중에서 뛰놀았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성경적으로 인류 역사상 세례 요한보다 영적으로 뛰어난 자는 없습니다. 철들기 전에, 그 정도가 아닙니다. 젖 떼기 전에, 그 정도도 아닙니다. 복 중에서 이미 영적인 은사와 조명을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라고 증거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주는 특권을 부여받았던 자입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감옥에 갇혀서 제자들이 전해 주는 소식, “예수님이 이러이러한 일을 합니다”라는 이야기, 그 이야기가 무어냐 하면 누구 집에 가서 식사했다는 이야기가 제일 많습니다. 세례 마태네 집에 가서 식사하고 마르다네 집에 가서 식사하고 가나 혼인 잔치에 가서 식사하고 맨 쓸데없는 것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고 산에서 설교하시다가 떡을 나누어 주시고 맨 그런 것만 하시는 겁니다. 요한쪽에서 보면 메시아가 무엇을 하리라고 기대했던 것입니까? 이 나라를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민족적으로 다시 한번 세워서 다시 한번 신성국가를 완성하시고 하나님을 반대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혔던 로마를 물리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아무런 준비가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이 그래서 헷갈린 것입니다. “당신이 오실 그이가 맞습니까

 

 

예수님이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4-5). 메시아의 사역을 충분히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기대한 것은 무엇입니까? 비밀 결사를 만들고 정치적인 지위를 얻고 이스라엘 민족들, 백성들 앞에 추앙을 받고 그를 정점으로 하여 다시 한번의 민족적인 재결합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논쟁만 벌이고 더 도망다니고 숨어 버립니다.


 


우리가 보는 인생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또 우리가 예수를 믿고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 나라 국민의 사분의 일이 신자라는데 얼마 신자가 있지도 않은 일본에게 왜 밤낮 지는가? 왜 우리 이렇게 사는가? 사회적인 이 흉포함은 왜? 다른 것은 그만 두고 왜 우리 아이는 대학에서 떨어지느가? 그렇게 열심히 가서 기도했는데 기도해도 감기 하나 안 낫는가? 이것이 우리의 억울함이라구요.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타납니까? 소경이 봅니다. 귀머거리가 듣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자들이 하나님을 알고 그의 인생이 하나님을 목표로 하여 변화하는 이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한번도 그의 구속 사역을 잊으신 적이 없고 그 일을 위하여 모든 사람을 즐겨 순종하는 자들을 쓰실 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자들도 하나님께서 쓰사 이 일을 이루어 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세상의 어떤 나라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없이 할 수가 없습니다.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두 쪽이 나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갖는 인생관이요 세계관이요 역사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일차적인 근거, 복음이라는 단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가장 큰 위안이 무어냐 그러면 개인적인 우리뿐이 아니라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운명과 현실이 결부되어 있는 온 우주와 그 질서와 그 나아감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은혜와 복주심이라는 뜻에서, 하나님의 그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대학을 실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녀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한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은 무엇으로도 실패받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병들어 아플 수 있고 여러분의 사업이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주를 믿고 복음 안에 있는 이상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와 인도하심과 그리고 함께하심 속에서 마침내 도달하고 지금도 누리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들은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런 차원에서 일차적으로 근거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개인적인 내 필요, 사소한 요구 이런 것과 결부되는 것은 너무 복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더 크게 전우주를 놓고 전역사를 놓고 여러분의 마음 속에 흔들릴 수 없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존재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2장으로 가서 이 말씀을 가장 대표적인 예로 끝을 맺읍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복음의 이 일을 인류에게 개인적으로 맨 먼저 시작하신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2:1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 12:1-3).


 


이것은 아브라함 한 사람에 대한 축복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시고 복주실 모든 이들과 사랑하시고 복주시려는 모든 자녀들에게 대한 축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범위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십시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


 


그러니까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시대에 제일 유명하고 제일 중요한 인물은 아브라함인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여러 왕이 있었습니다. 소돔에도 왕이 있고 고모라에도 왕이 있고 그때 일어났던 전쟁을 보면 나오는 여러 왕들이 있습니다. 그 왕들이 그 시대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주인공입니다. 그와 만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복이고 가장 중요한 운명이 것입니다. 세상에서 왕이 되느냐 세상에서 거지가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복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시대에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 당시에 신문에 오르내릴 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실상은 그가 주인공이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날 신문에 오르내리는 사람은 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이거나 경제인이거나 하여서 신문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주인공은 아닙니다. 소돔 고모라의 멸망은 소돔과 고모라 왕의 신실함이나 종교적 열심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의인 열 명이 있느냐였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한 나라와 시대를 어떻게 인도하실 것이냐는 거기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 연결되는 것이지 거기에 있는 정치인이나 경제인하고 연결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여러분이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십시오. 복음이 왜 복음인가를 아십시오. 여러분은 전우주적입니다. 영원한 운명이라는, 시간적으로 이야기하면 영원이고, 공간적으로 이야기하면 전우주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대단한 신분으로 여러분은 초대받았고 운명이 확보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을 건드릴 자 없고 여러분을 실패하게 할 자가 없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여러분이 흔들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마침내 도달할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하나님의 열심과 의지력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을 굳게 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갈보리 산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것까지 하셨는데 나머지 문제는 무엇인들 아끼시겠습니까? 그것이 우리 믿음의 최고의 근거인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합니다. 우린 미련합니다. 우린 연약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과 베푸시는 은혜와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복음을 알게 되고 그 안에 부름을 받게 되었다는 복된 여러분의 신분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승리하십시오

 

 

 

 

 

로마서 3강(롬1:3-6) 복음의 ABC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롬 1:3-6)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할 때 복음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가장 중요한 선을 우리의 믿음에 분명히 못 박아 두기 위해서 1절부터 7절에 있는 말씀을 오늘로 세 번째 생각합니다.

처음에 우리가 확인했던 것은 구원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같지만 그 속에는 어떤 중요한 부분이 있느냐 하면 ‘인간이 세상에 있는 존재 중에 제일 권위있고 지식적이지 않다, 하나님이란 존재가 있다, 창조주가 있다’ 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이 구원은 그의 성실하심과 신실하심과 또 그의 의지로,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구원하시고야 말며 어떤 방해도 받지 않으시며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 자신이 변개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은 영원한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복음 안의 중요한 내용 중에 하나인 하나님이란 분은 절대 권위적이다 하는 것을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로 우리의 생각 속에 갖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식으로 설명하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요소는 인간의 위치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이다, 예수를 믿는 기독교적 신앙이다, 구원이다 그러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느냐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느냐 하는 차원에서 생각하기 바쁘지 그 안에 우리의 어떤 사고와 결정의 원리와 핵심 되는 근거가 숨어있는가는 놓치고 있는 적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행복하다든가 주를 믿으면 못할 일이 없다든가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든가 기쁘다든가 하는 것으로 복음을 소개하고 있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란 쪽으로 복음을 설명하고 우리에게 그런 기준을 먼저 설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쪽은 굉장히 약합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성경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잘 보시면 5절에 있는 바와 같이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한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성경은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핵심 되는 단어가 무어냐 그러면 순종이란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 되는 단어는 행복도 아니고 감격도 아니고 복도 아닙니다. 신앙의 핵심 되는 단어는 순종입니다. 2절부터 다시 보면, 우리가 확인하려고 하는 신앙의 가장 핵심 되는 것 중 하나인 순종이라는 것이 왜 어떻게 주어지는가를 알게 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롬 1:2-5).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는 누구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우리식 이해로 조금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부자지간이라는 것은 넘을 수 없는 권위의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담 중에 친구가 와서 “야 아버지께서 오셨는데 차린 것이 이것밖에 없느냐”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다, 아들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신과 나 사이에 굉장한 차이가 있다, 내가 훨씬 높다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쓰는 표현, 성경이 쓰는 표현에서 아들이라는 말은 신분상 동등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엇과 구별되느냐 하면 1절에 있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표현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즉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다 같이 동등하시고 우리 인간은 그의 종입니다. 이 시대의 종이라는 것은 요즈음 어떤 사람을 돈주고 쓰는 것과는 다릅니다. 개인의 사유물입니다. 생사 여탈권을 그 주인이 가지고 있습니다. 사고 팔 수 있으며 죽이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6절에 보시면 예수 믿는 자를 무어라고 표현하는냐 하면,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소유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복음이 무어냐 그럴 때 지금 표현은 복음스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복음의 핵심 되는 것은 그의 존재와 그의 권위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시는 사랑 그리고 그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이 왜 복음이냐 하는 것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게 됩니다. 그분이 하나님이다. 우리가 그의 종이다 하는 개념을 성경이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것을 봅시다. 사도행전 2:33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3-36).

 

 

 

우리는 보통 ‘하나님’ 그러면 성부 하나님이라 생각하고 ‘주님’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히브리어로 하나님이라고 쓰는 것을 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헬라어로 주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주님’ 그러면 그리스도는 히브리어의 메시아란 단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고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왕이 되거나 제사장이 되거나 선지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공식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역하는 자라는 신분의 표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큰 일을 맡아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종으로서 쓰임을 받기 위하여 오셨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그럴 때에는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대속물이 되시고 우리를 대속하시는 제사장으로 오셔서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시기 위한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섰지만 그분이 또한 하나님인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이렇게만 써 먹지만 말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얻게 해 주는 주문, 대가로만 취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 구경하기 위하여 몰래 얻어 낸 극장표, 열려라 참깨가 아닙니다. 우리가 경배해야 될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는 무엇이냐 할 때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주님이시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 그것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3:37-38).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러니까 죄사함을 받는 것 구원을 얻는 것은 지금 이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결국 내가 예수님밖에, 하나님밖에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소유로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택해서 하나님 소유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피로 값주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말은 “그의 소유가 되라” 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설명하는 성경적 표현법이란 말입니다.

 

 

 

요즈음 식으로 잠이 안 오십니까? 예수를 믿으십시오. 사업에 실패하셨습니까? 예수를 믿으십시오. 슬픔과 비탄에 젖어 있습니까? 그러면 예수를 믿으십시오도 맞습니다. 틀림없이 예수를 믿으면 우리에게 행복이 있고 영원한 확신이 생기며 영생에 대한 소망이 생깁니다. 그러나 성경이 설명하려고 하는 복음의 복음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기쁨과 감격이 우선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이냐?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버려졌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하시고 그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여기가 중요한 대목입니다. 내가 기쁘면 하나님도 좋아 보이고 내가 슬프면 하나님이 미워 보이는 식으로 복음을 이해하지 말아 달라는 말입니다. 내가 성공하면 하나님이 복 준 것 같고 내가 어려움에 처하면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셨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성경이 설명하는 복음의 ABC가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로마서에서 배우는 복음입니다.

 

 

 

다시 본문에 오시면 베드로의 설교에 나타났던 복음의 핵심과 일관된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롬 1:2-6).

 

 

 

무엇이 복음입니까? 그의 소유가 된 것,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것, 그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을 행복이니 기쁨이니 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성경이 어떤 차원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강조하는가? 믿지 않은 것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대표적으로 무엇과 대조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을 성경상에서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그 대조가 왜 우리에게 복된 것이 되는가를 봄으로써 복음을 성경적으로 한번 정립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10).

 

 

 

지금 8절, 9절에 있는 말은 복음에 대하여 우리가 두 번째로 생각했던 것과 같이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하나님쪽의 주도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도권 속에는 첫 번째 살펴본 하나님의 존재라는 것이 이미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결국 우주만물의 존재 중에 인간이 최고냐, 인간이 전부냐라는 싸움과 인간 말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있느냐는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의 싸움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관문이 됩니다. 그런데 이 두 대조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 때는 2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라는 불순종이 이 세상 삶의 가장 두드러진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3절에 있는 바와 같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모든 가치와 모든 결정의 궁극적 권위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바로 이것과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소유입니다. 우리의 최고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혹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이 불신앙과 대조될 때 불신앙이란 자기가 결정권을 가지는 것이고 신앙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권위 아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것이 왜 복음이냐 하는 것은 조금 있다 설명하겠습니다. 이 대조를 잊지 마십시오. 신앙이란 무어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어냐 그럴 때 이제는 더 이상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며 내 인생과 어떤 사람의 원리와 목표를 내가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결정과 하나님의 요구 아래 있기로 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하심이니라”(엡 2:10). 우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것이 왜 복음이냐 하는 것은 여기 나오는 바와 같이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고 그 안에서 행하도록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왜 복음이냐를 이렇게 설명합시다.

 

 

 

우리가 이 문제를 설명하는데 제일 도움이 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톰소여와 허클베리 핀입니다. 톰소여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이 허클베리 핀입니다. 그는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기가 자고 싶을 때 자고, 자기가 놀고 싶을 때 놀고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 피우면 됩니다. 그러나 톰소여는 무엇이 불편합니까? 원치 않는 일을 해야 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되고 학교를 가야 되고 세수를 해야 되고 밥 먹을 때 잔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사람은 그런 일에 제약받는 것을 무척 싫어합니다. 학교에 간다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디를 갈 때 어떤 예의를 지켜야 된다, 교양을 지켜야 된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영광입니다. 학교를 간다는 것은 복입니다. 학교를 못 가고 놀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안 다닌다는 것에 비하여 여러 가지 구속과 어려움을 감수해야 되는 것인 만큼 손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자유라는 것은 무척 오해되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훈련이 되지 않았다고 하고 방종이라고 그럽니다. 방종이란 무어냐 하면 그가 하는 일들이 가치있는 목표를 향하여 일관되지 않은 행위일 때 그것을 방종이라고 그럽니다. 우리가 여기서 부산을 간다고 그러면 아무리 느리게 가고 가다가다 아무리 쉬어도 남쪽을 향해서 가면 그것은 일단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됩니다. 하루에 세 걸음 가고 쉬었다 가도 세 걸음만큼은 부산을 향하여 진전을 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루에 몇십 킬로씩 가도 그것이 동으로 갔다 북으로 갔다 서로 갔다 하는 것이면 분주했지만 하나도 목적지를 향해 진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방종이고 허황된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모르는, 즉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모든 삶이 왜 허무하냐 그러면 그가 부지런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불성실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가 가치있는 목표를 세울 수 없고 가치있는 목표를 향하여 쌓아지는 일로 하루하루를 연결해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히 살며 남보다 더 악착스럽게 사는데 그 모든 것이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그를 진전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것도 희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못해도 됐다, 됐다하는 부모는 좋은 부모가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 그의 소유가 되었다라고 하는 것이 왜 복음이냐 하면 우리는 비로소 이제 영원한, 가치있는 목표를 갖게 되었고 그 길로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 길에 우리를 실패시키지 않게끔 방종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 우리 보호자를 만났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무어라구요? 여러분이 놀고 싶을 때 놀게 하고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을 다 들어 주고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여러분을 이제는 영원한 가치와 필요한 일을 위하여 간섭하는 손길 속에, 그리고 그 길에서 여러분이 실패되지 않도록 여러분을 붙들고 계시는 전능하신, 그리고 성실하신 뜻에서 구원은 복음인 것입니다.

 

 

 

조금 더 진전해 봅시다. 에베소서 4:17입니다. 불신자와 신자의 삶 중 성경이 어느 쪽을 더 강조해서 이야기하는가를 잘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어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으로 행하되”(엡 4:17-19).

 

 

 

이것이 바로 불신자의 삶입니다. 불신자의 삶에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모든 일을 결정권자입니다. 자기가 목표를 세우고 자기가 방법을 세우고 그 일을 하기도 했다, 말기도 했다 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모르는 자의 목표와 방법이 무엇입니까? 허망하고 헛된 것을 구하고 참다운 것이 아닌, 가치가 없는 것을 목표로 세웁니다. 그리고 무지하고 마음이 완악합니다. 한번 고집을 부리면 틀린 것을 알고도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나 이제 믿고 나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20절을 보십시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 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5:20-24).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 안에서 의와 거룩과 진리로 살고 그 마지막엔 영광 된 자리에까지 들어가게 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다, 주의 것이 되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이 왜 복음인지 우리식으로 이야기해서 ‘학교 다니게 되었다’ 그런 겁니다. 좋은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무엇이 이익입니까? 열심히 공부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좋은 학교란 돈을 조금 받아서 좋은 학교가 아니고 가르치는 것이 실력이 있어야 됩니다. 열심히 가르치고 학생들이 게으름 피우지 못하게 단단히 붙들어 두는 학교가 좋은 학교입니다. 그리고 그런 학교를 다니는 것을 영광으로 압니다. 서울대학교 뱃지를 달았으면 왜 못생겼어도 모두가 쳐주고, 서울대학교 뱃지를 달면 얼굴이 달라 보인다는 것 아닙니까? 머리가 부시시하면 “봐라 저런 것은 관심을 두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 아니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머리 잘 빗고 옷을 잘 입으면 “봐라 공부를 잘하니까 저렇게 단정하지 않느냐.” 뭐든지 갖다 부칩니다. 신앙이란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알게 되고 그 안에서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이제 뒤집어도 바로 놓아도 어떻게 놓아도 여러분은 바른 길로 들어선 특권 속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에베소서 5:3에는 이 문제를 조금 더 진전시켜 놓고 있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 5:3-5).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 누추함, 어리석은 말, 희롱 이런 것을 하는 자들은 기업을 얻지 못한다, 이런 말을 하면 천당 못 간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복음의 시각을 갖지 못하면 이 본문은 오해하기 꼭 좋게 되어 있습니다. 즉 희롱하는 말이나 탐욕이나 누추함이나 어리석은 말 같은 것은 우리가 이제 하나님 안에 부름을 받고 약속되어 있는 그 복된 자리로 가는 길을 진척시키는 데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성령을 좇는 것과 육체를 좇는 것은 늘 동시에 되지 않습니다. 내가 오락실에 가서 논 시간을 시간에서 빼고 공부하기로 결심하다고 해서 새로 12시간이 생기지 않습니다. 12시간의 여유 중에서 오락실에 가서 6시간 놀면 공부할 시간은 6시간밖에 남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보통 60-70년이라 볼 때 그 중 여러분이 세상을 향하여 나가며 여기 기록된 것같이 무슨 더러운 일이나 욕심을 낸 것들은 그 시간 속에서 손해 본 시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허락된 시간은 영광된 목표를 향하여 진척시키는 우리의 발걸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은 한 번 얻어진 다음에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것이고 하나님의 열심과 그의 성실함과 능력으로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락된 이 길을 우리가 얼마나 더 깊이, 더 많이 더 풍성히 가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싸움입니다. 그럼 신자를 어떻게 권면하느냐? 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9).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느냐’ 이것은 도덕과 윤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부름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훌륭함을 위하여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가 열심히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5-17).

 

 

 

신자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노력하는가를 제발 좀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면 헛된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부산으로 가야 되는데 백운데는 왜 갔다가 가느냐 말입니다. 백운대는 북쪽에 있는데 기왕 꼭 산에 가고 싶으면 관악산을 가야죠.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거룩한 것을 요구하고 세상적인 것을 절제하라는 것을 말하는 이유는 우리의 영광이 무엇이며 우리의 목적지가 무엇이며 무엇이 우리의 유익인가 하는 시점에서,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는가 하는 시점에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름받은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의 소유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느냐, 주를 믿었으니 마땅히 이 정도는 해야지, 그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신자 된 복이고 그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거룩과 진실함으로 진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2-17).

 

 

 

우리가 누구의 소속이며 누구의 것이며 누구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신분이냐를 알고 거기에 맞는 자로 살아라.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이 너희에게 복이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는 중요한 기초 중의 하나닙니다. 우리에게 순종이 요구되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살필 것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책임입니다만 그 책임은 복된 책임입니다. “공부 열심히 해라. 그래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 이 말이 학교 다닐 때 최고로 듣기 싫었던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보다 더 진리가 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입니다. 열심히 주를 섬기시고 그를 따르시고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고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을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의 책임이고 영광입니다

 

 

 

 

 

로마서 4강(롬1:3-4절) 강력한 복음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3-4)

 

 


이른바 신앙의 본질, 소위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교훈이거나 어떤 개념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주권이 먼저 강조되어야 되는 것이 성경적인 설명법이라는 것을 지난 몇 시간에 걸쳐서 상기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과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계시다’, ‘그 하나님이 온 천하만물을 만드셨다’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 보는 바와 같이 복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할 때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롬 1:2)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유교나 불교나 다른 모든 종교들이 선이나 도나 고귀한 어떤 이상을 좇는데 반하여 기독교적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이 예수가 누구냐 그러면 ‘다윗의 후손이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말은 무척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종교적인 본성이 언제나 관념론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그러면 사랑의 종교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은 핵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기독교가 무엇이냐 그럴 때 은혜의 종교라는 것도 기독교 맥락의 한 핵심을 붙잡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사실은 그렇게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정답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개념으로 이해하느냐 인격으로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가 오늘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본문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을 봅시다. 3절에는 그의 육신에 관한 이야기, 5절에는 그의 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오늘은 먼저 3절에 있는 말씀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분입니다.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 하는 것은 오해하기 꼭 좋게 기록되고 말았습니다. ‘나셨다’라는 말은 ‘되셨다’라는 말입니다. 후손이 되셨다, 나셨다라는 말이 틀릴 것은 없습니다만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사람의 존재의 시작은 출생부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때 ‘나셨다’하면 그때 존재가 시작되셨다, 이렇게 오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이런 식의 싸움이 언제나 기독교 역사 속에는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냐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거룩한 율법과 요구를 최초로 만족시킨 사람, 그래서 인간 중에서 유일하게 최초로 신의 반열에 오른 자’ 이렇게 오해한 이단이 너무 많이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이 쪽 사상은 보통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말하는 범주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싸움거리는 기독교의 복음이 교훈과 도에 관한 싸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부터 그 존재를 시작하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께서 가장 만족하신 지위에 오른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어떤 낮은 자리로부터 출세하시고 성공하시며, 완성되신 분이 아닙니다. 그는 본래부터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성경 어디서나 이 문제는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나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11).

 

 

 

육신의 모양으로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 육신으로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 차이가 되느냐 하면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한 인간에서부터 완성된 분으로 생각하면 그가 어떻게 그 완성의 경지에 들어갔느냐 하는 깨우침의 싸움이 됩니다. 그럼 기독교가 불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예수와 석가의 만남’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되고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인도에 가서 수업을 하고 왔다느니 하는 책들이 등장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다같이 어떤 대오각성의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존재로부터 우리가 아직 깨우치지 못한 어떤 경지에 들어가신 분이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기도 중의 한 내용입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요 17:5).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영화로운 분, 존귀한 분, 하나님이였고 이 땅에 오셔서 그 사역을 마치시고 돌아간 곳도 본래의 자리인 영광의 자리로 가신 것이지, 오시기 전에는 뭔가 부족했는데 오셔서 완성이 되어 가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란 결국 부족한 것이 없고 모자랄 것이 없고 아쉬운 것이 없는 그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어야만 했던 어떤 문제와 그렇게 오시도록 간섭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간섭하셨다는 신적 개입에 초점이 있습니다.

 

 

 

복음 자체를 우리는 자꾸 어떤 교훈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신 것’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이 핵심이 아니고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요한복음 3:16로 대표되는 구절에 잘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시는 것입니다. 저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하시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간섭이 복음이지 이제 그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은 그 결과에 불과한 것입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오셔서 설파시고 제시하신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오신 것, 오셔서 행하시는 사역, 그분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그 일, 그래서 주님 자신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으로 가 보십시오. 이런 부분들은 우리에게 익숙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 하느냐, 은혜의 종교라 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깨우침이 아닙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4-5).

 

 

 

우리쪽의 회개, 우리쪽의 믿음의 결단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을 얻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그가 맞아서 내가 낫는 겁니다. 그가 찔림으로 내가 구원을 얻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그분에게 있는 겁니다. 나의 선택이나 나의 깨우침에 있지 않습니다. 그분이 찔려서 그분이 맞아서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우리는 다 각기 제 길로 가고 있는데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우린 그 동안 얼마나 많이 구원이란 제시하신 내용을 지키는 싸움이라고 이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그래서 주님이 무엇을 제시하시기 전에 구원을 선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강조점들을 몇군데 찾아보기로 합시다. 누가복음 2:8입니다. 주님이 나시던 때의 장면입니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8-11).

 

 

 

그리스도가 나셔서 아직 무슨 행동이나 교훈이나 말씀을 베풀기 전에, 그리고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도 전에 주님의 태어나신 사건 하나만을 놓고 이미 기쁜 소식, 복음이라 이야기하며 그 복음이 무어냐 하면 “너희를 구원하기 위한 구주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동시에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후에야 나타날 모든 찬송들이 이루어집니다. 13절입니다.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 2:13-14).

 

 

 

주님이 아직 아무 말씀도 하시기 전, 산상 설교 같은 것을 하시기 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이라는 것을 자꾸 도(道)와 교훈으로 이해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눅 2:25-32).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아기 예수를 보고 벌써 주의 구원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그 일이 성취된 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선택, 우리의 반응 이전에 하나님께서 대속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시간 문제이지 이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는 예수님의 능력과 그의 반응 여하에 따라서 번복되거나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무어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어냐?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구원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문제이지 우리의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일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론일 뿐입니다. 요한복음 6:37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37-39).

 

 

 

우리를 설득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는 자들을 구원키 위하여, 저들을 위해 대속물이 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서가 다른 겁니다. 주님께서 이제 십자가 상에 돌아가시고 그 교훈을 만방에 펼쳐서 누구든지 믿는 자는 교훈을 얻는다는 식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가 이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하니 이 사람들의 죄값을 네가 치루어라”는 순서입니다. 순서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나를 구원하려고 예수를 보내셨다는 겁니다. 분명히 나중에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만 그러나 어디가 핵심인가는 전도되지 않아야 되는 부분입니다. 44절로 가서 이런 부분이 얼마나 강조되는지 보십시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꼭 이런 반문을 마음 속에 하게 됩니다. ‘그럼 우린 뭐냐 우리는 바지 저고리냐’, ‘그럼 성부 하나님하고 성자 예수님하고 가위 바위 보 하고 우린 뭐냐?’ 이것이 인간이 갖는 죄성의 대표적인 반응입니다. 권위적 차원에서 하나님께 우리는 그런 것을 따질 존재의 위치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긍휼히 여기고 사랑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싹 쓸어 버려도 우리는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인격적으로 대접하시고 사랑하셔서 우리 같은 것들을 구하기 위하여 성자 하나님이 피를 흘리셨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어디로 가 있느냐 하면 “내가 믿었다”로 가고 있습니다. “넌 안 믿었지만 나는 믿었다” 이것은 꼭 “넌 떨어졌지만 나는 붙었다”라는 싸움하고 똑같지 않습니까? 이것이 가장 비성경적이며 인간이 갖는 나쁜 죄성의 대표적인 표현들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신약은 이런 식으로 시작이 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 여기서 세계라는 것은 족보라는 뜻입니다. 세계는 한문으로 世界입니다. ‘이을 계’입니다. 그래서 낳고 낳고의 족보에 우리도 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사실 마태복음 1:1에서 본 것과 내용상으로 정확히 일치하는 것입니다만 표현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이것은 우리말로는 척 떠오르는 생각이 없습니다만 편의상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영어로 하면 여러분 기억나는 구절이 있을 것입니다.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the Jesus Chirst of the Son of God.”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이것은 한국말 어순입니다. 그런데 헬라어 어순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beginning)이란 말이 됩니다. 어디서 들어 본 말 같지 않습니까? 창세기 1:1이 그랬습니다.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말하자면 인류라는 존재와 우주라는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는가에서 하나님이 역사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만물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게끔 지으셨습니다. 거기에 죄가 침투합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고 죄와 사망의 그늘 아래 앉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버려 두시지 않고 이 반역한 피조물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재창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의 영광된 자리로 우리를 불러 내시는 일을 다시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신약 자체가 ‘beginning’ 이렇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을 강조해서 비교해 보아야 되느냐 하면 기독교 복음이라는 것이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선택하느냐 혹 거역하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시고 우리를 만드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역사와 인류에 대하여 어떤 뜻을 가지셨고 어떤 개입을 하셨느냐는 것이며, 이것이 복음이란 사실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고 우리를 긍휼과 자비로 회복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이라고 그럽니다. 복음이란 전혀 다른 무게를 가지는 것입니다. 약장수가 약 선전하듯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싸움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런 의미에서 강조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것을 하나의 교훈으로 알기 시작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는 흔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가 흔들리면 묘하게도 성부 하나님의 위치가 흔드리고 기독교는 기독교만이 갖는 그의 유일성을 잃어 버립니다. 요한일서 2:22입니다.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요일 2:22-23).

 

 

 

왜 아들을 부인하면 아버지가 없어지죠?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지금까지 가장 많이 기독교를 공격했던 모든 이단들은 처음에 메시아직을 찬탈하러 나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의 메시아직을 수행하는 데 실패한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백태선 씨가 그랬고 지금 문선명 씨가 그럽니다. 그래서 자기가 두 번째 예수라는 것입니다. ‘재림예수!’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보통 재림예수라고 해서 와서는 무슨 싸움을 거느냐 하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 중에 이런 것이 틀려서 내가 그것을 보완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가 교훈과 도로 간다는 말입니다. 기독교가 교훈과 도로 가면 그것이 예수일 필요도 없고 문선명일 필요도 없고 석가일 필요도 없고 공자일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 주인이 되냐 하면 모든 고급한 이상과 고급한 가치의 주체가 인간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없어지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직을 뺏어 버리는 것이 그를 보낸 분의 존재까지 없애게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단은 100%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불충족성을 공격하고 자기가 그것을 충족시키러 왔다고 이야기하다가 예수는 원래 메시아가 아니고 내가 참 메시아다 그랬다가 나중에는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그럽니다. 꼭 그렇게 갑니다. 안 그런 사람은 그러기 전에 죽어서 못 그런 것이지 다 꼭 그쪽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왜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되느냐 하면 교훈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복음의 핵심이요, 교훈의 핵심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말씀이나 교훈 이전에 그분을 보내신 분이 있다, 그분이 성부 하나님이요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시다, 나의 생명을 주신 분이다라는 것을 근거로 해서만 그가 오심이 빛을 발하고 복음의 핵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전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놓쳐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무엇을 했느냐는 이차적인 것입니다. 죽어가는 인류를 위하여, 지옥 형벌밖에 남은 것이 없는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이 드디어 움직이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경이 초점을 맞추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공부했을 때도 생각한 것과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보내신 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내 일이다’라고 강조하는 이유가 예수님이란 존재는 예수님 한 분만으로 국한되거나 그의 가르침으로 대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언제나 그를 보내신 분을 전제로 하고, 그분들이 밀접한 관계로 함께 있어서 예수님을 인정하는 자는 곧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얼마나 거대한 손길 속에 있느냐를 아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무어냐 그럴 때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 온 천하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온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그분이 인류에 대하여 그리고 특별히 내 자신에 대하여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다는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 하나님이 내 편을 드니까 아무도 나를 하나님의 사랑의 손끝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이 무엇에서 나타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강림, 그의 수난 이것이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놓치고 교훈으로 빠지면 기독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기독교는 여타 다른 인간들이 만들어 낸 종교에 불과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높이고 주님을 높이고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만들고 그를 찾고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요 우리의 자랑이요 힘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그렇게 하마 하고 약속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그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운명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지신 사랑을 막을 자 없음을 우리가 아는 것, 이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 안에서 우리 성도들의 영원한 운명이요, 자랑인 것입니다

 

 

 

 

 

로마서 5강(롬1:8-12절) 성령을 추구하는 복음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롬 1:8:12)

 

 


오늘 읽은 8절부터 12절 말씀 속에는 사도 바울이 이 서신을 보내는 중요한 목적이 하나 나옵니다. 11절에 있는 바와 같이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고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나려는 목적이고 만나서 자기가 할 일 자기가 나누고 유익케 할 목적을 먼저 서신으로 보낸 셈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8절에서 본 바와 같이 이미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라고 이미 소문이 날 정도로 신앙이 좋았던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저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 위하여 만나기를 원한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점에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신앙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참 풍성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예수 믿고 구원을 얻어서 지금 죽어도 천국 간다라는 식으로만 이해하고 있는데 그것은 상당히 초보적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믿음의 확신을 갖는 것도 필요하고 구원의 소망을 분명히 갖고 있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본문에서 본 바와 같은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상을 여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앙이 견고하다고 하는 부분도 그런 의미에서는 많이 오해되는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것을 기도를 많이 한다든가, 성경을 많이 본다든가, 혹은 전도를 많이 한다든가, 구제를 많이 한다든가 하는 것들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오늘 우리가 배우고 있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과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사 영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로부터 이제 영원한 구원, 영원한 생명을 얻게 했다 하는 것으로 설명되는 것이 우리의 필요성, 죄인된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우선적으로 나온 것이지 그것이 구원 내용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구원은 인류와 인간을 대상으로 택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우주적인 영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선 이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19-20).

 

 

 

전우주적인 모든 존재들을 자기와 화목케 하시고 새롭게 하는 것이 구원이다 하는 것을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이고 구원에서 가장 중요한 절정을 이루는 것이 인간의 구원입니다만 인간만이 아니고 전우주라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지 말아 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세상에서 우리를 쏙 빼간 정도, 악한 세력과 선한 세력이 대등한 두 개의 존재로 있고 거기에 엔테베 공항 작전같이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를 기가 막히게 싹 빼가는 정도가 아니라 온 우주만물과 역사를 주관하시고 주인 되시는 그분이 이 세상 자체를 화목케 하는 일이 구원이라는 우주적인 차원으로, 구원을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가서도 이 사상은 자연계를 포함하여 이렇게 설명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리라”(롬 8:18-23).

 

 

 

아직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대신될,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이 그렇게 변화될 것을 성경이 약속하고 있음을 구원이라는 개념 속에 포함시키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에게 왜 중요하냐 하면 성경의 중심 사상은 구원론이 지배적이거나 그 중심 사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 얻는다는 것을 마치 세상으로부터 도망가고 세상과 우리가 분리되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구원의 전영역을 약화시키는 것이 됩니다. 구원은 우리만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썩어지고 악하고 부패한 세상도 새롭게 되는 일을 선포하고 시작하신 것으로 그 내용을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가장 중요한 지배 원리는 우주론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주권의 우주론적 위엄, 권세의 크기를 그 중심 사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온 우주의 영역과 우주의 모든 존재들을 장악하고 계시는 삼위 하나님의 주권성이 그 지배 원리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들에 걸쳐서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도 구원이 무어냐 그러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느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을 하셨느냐가 초점이었듯이 구원을 얻는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찾아오셨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떻게’가 우리가 믿는 방법으로서의 어떻게라면 하나의 테크닉을 의미합니다만 ‘어떻게’ 찾아오셨는가라고 할 때는 이미 테크닉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과 은혜와 사랑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지은 것이 그분에게 무슨 누가 되겠으며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좀 부패된 것이 하나님께 무슨 약점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인간식으로 표현하자면 싹 쓸어 버리고 새로 만들면 되는데 뭐 걱정이겠습니까? 그래서 구원을 이야기하고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복음을 이야기하면 사랑, 은혜, 자비, 이런 식으로 설명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지금 사도 바울이 이야기할 때도 바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견고케 하려고 한다”는 이 이야기는 무엇으로부터 출발하느냐 하면 다시 8절로 가셔서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 1:8)라고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견고케 하려고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너희가 예수를 믿어서 참 고맙다”고 우리가 자녀들에게 말할 경우가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는 이런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너희들이 어떻게 하다가 예수를 다 믿게 되었느냐 내가 가기도 전에 참 용키도 하다. 어쩜 그렇게 똑똑하고 어쩜 그렇게 착하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예수 믿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이 복음을 허락하셨다 너희에게 이 구원을 허락하셨다. 나는 내 하나님께 감사한다”라는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전시각이 이 일을 우리에게 허락하고 우리에게 가능케 하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악 중에 신음하고 죽어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전우주적인 영역으로 볼 때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부르신 것 같이 죄 많은 이 세상을 이제 언젠가 역사를 끊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주의 구원을 얻고 하나님이 자녀가 됨으로서 이 죄많은 세상과 등지고 우리끼리 모여서 기도나 하고 우리끼리 모여서 가끔 전도하고 들어오고 우리끼리 모여서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마땅히 다시는 상함도 없고 죄짓는 것도 없고 사망도 없는 땅을 약속하셨고 그것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새롭게 주신 성품과 신앙적인 것들, 거룩한 것들을 이제부터 발휘하면서 살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얻었다는 것은 불타고 있는 건물에서 건져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 새로운 질서, 새로운 목표, 새로운 내용으로 부름을 받은, 즉 새 영역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기가 바로 바울이 내가 너희를 만나고 싶은 이유가 있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되는 자리인 것입니다. “너희는 불타던 곳에서 건짐을 받았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다시 무장을 하고 불타는 데 아직 남아있는 신자들을 건져내러 가자”는 정도가 아니라 너희는 옛날에 죄짓고 사망이 왕노릇하고 그리고 흑암속에 있었고 너희의 욕심대로 살던 때로부터 이제는 하나님을 알고 온 천하 만물을 지으신 그분,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의와 거룩과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자리로 부름을 받았다. 그래서 ‘이제 거룩하게 살자’, ‘영광스럽게 살자’, ‘주의 모습을 닮자’ 이것이 견고케 하기 위한 목적 속에 있는 분명한 내용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만이 구원이 아니라 이 세상 역사 이 우주만상을 새롭게 하시기로 한 그 거대한 약속 속에, 계획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해 내시고 하나님을 따라 살며 거룩하게 사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한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삶의 전 체계 속에서 반응하고 이겨내는 사람으로 견고해져야 된다는 의미에서 견고케됨을 목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견고함, 우리 신앙의 깊음이라는 것은 누가 더 많이 기도했느냐 그리고 누가 더 많이 성경을 읽었느냐, 누가 더 많이 전도했느냐는 아닙니다. 물론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성경울 보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우리가 신령한 영양소를 공급받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 힘을 내느냐 할 때 우리의 삶의 전체계에서 삶의 전현장에서 힘을 발휘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서 의와 거룩으로 지은 바 되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은사로 무장된 자들입니다.

 

 

 

우리는 좋은 자리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해하려고 하고 우리를 유혹하려고 하는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우리를 어떻게해서든지 미혹케 하려고 하는 모든 것들에서 의와 거룩으로 그것을 이겨내야 됩니다. 세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것이 무엇입니까? 아이들한테 물어보면 공부고 어른한테 물어보면 일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게으름 떠는 겁니다. 무엇이 훌륭한 것입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누리는 지혜와 의지력이 아닙니까! 미련한 때, 철들지 않았을 어렸을 때는 꾀병을 부립니다만 나이가 들어서 회사를 꾀병 부리고 안 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회사를 그만 두기로 결심을 하기 전에는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경의 요구들은 바로 이런 싸움에 초점을 모으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 3:14입니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4-19).

 

 


여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까지 악에게 지지 않는 것,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 오른편 빰을 맞으면 왼편 뺨도 대는 것,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는 것이 모든 것을 사랑과 덕에 관한 문제가 아닌, 신자가 도달해야 되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지는 어떤 경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이 훈련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당하는 모든 교활하고 험악한 유혹과 시련 속에서 싸워 획득하고 만들어 내야 하는 실력입니다.

 

 

 

에베소서에 기록된 어떤 말씀들은 다른 서신서들과 어떤 차이를 느끼게 합니다. 대표적으로 갈라디아서라든가 고린도서에서는 많은 꾸중이 나옵니다만 에베소서는 별로 그런 꾸중을 못 봅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 같이 이렇게 미래 지향적이고 적극적인 권유를 받는 것으로 인해서 에베소 교회가 상당히 괜찮은 교회였을 것이라고 상상하게 되는데 그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으로 가 보십시다. 아시는 대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들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다 심각한 꾸중을 받았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내 촛대를 옮기겠다”,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내 입에서 너를 내치겠다” 는 심각한 꾸중을 받았는데 무엇을 잘못해서 그랬나 봅시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1-5).

 

 

 

어디에서 잘못했다고 그럽니까?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빼놓으면 얼마나 잘한 것이 많으냐 하면 2절을 다시 봅시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3).

 

 

 

이만 하면 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사랑을 버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우리들은 쉽게 처음에 가졌던 그 불붙는 사랑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보자고 그럽니다. 요 근래에 유명한 영화 중에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대단히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전 이런 영화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야 웃기지 말고 죽지 말고 한번 살아봐라. 이 원수야 살아도 그런가.” 산다는 것은 훨씬 어려운 것입니다. 눈물이나 흘리고 껴안고 춤추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지지고 볶는 것이요 인내 위에 또 인내, 또 인내하는 것이요 헤어질가 말까를 하루에 몇 번씩 생각하는 것이요 저 원수를 만난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는 것인가, 십자가인가, 가시인가 이런 갈등을 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하십시오. 언제 사랑에 강해지냐 그러면 아이들을 대학쯤 보내고 시집 장가 보내고 나야 사랑이 강해집니다. 젊었을 때 신혼초 아이들 낳기 전에 연애하던 시절의 사랑은 달콤하고 감미로운 멜로디 속에서 커피나 나누고 서로 마주보고 쳐다만 보아도 눈물이 납니다. 그때는 그것을 갖고 목숨을 겁니다. 그러나 가장 사소한 것 하나로도 꺼집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연애를 여러 번 했는데 잘 안됐습니다. 그러다 어떤 괜찮은 남자를 만났는데 어느날 아주 사소한 것으로 깨졌습니다. 왜 깨졌느냐 하면 영화를 같이 보러갔는데 끝나면 끝이라는 글자가 나옵니다. 영어로 끝이라고 나오는데 하필이면 일어나면서 ‘더 앤드(the end)’라고 그랬답니다. 조금 괜찮게 영어를 배운 사람들은 모음 앞에 ‘the’ 는 ‘’로 발음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어떻게 정이 떨어지는지 그만 두었답니다.

 

 

 

그것이 실력입니다. 자기는 굉장히 고결한 사랑에 대한 실력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더 앤드’로 깨지는 정도입니다. 실력이 개뿔도 없는 것입니다. 같이 자보고 결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모르냐 하면 코는 고는지, 이빨을 가는지 아닌지 모릅니다. 결혼하고서야 압니다. 그런데 코 골아서 이혼한 사람은 없습니다. 코를 안 골면 잠이 안 온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더 앤드’ 같은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지붕이 떨어져 나가도록 코를 골아도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부부입니다. 이것이 실력입니다.

 

 

 

결국 에베소 교회의 적중은 무어냐 하면 내가 처음 가졌던 첫사랑을 놓쳤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가졌던 어떤 정열, 그 열심히 식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신앙을 버린 것도 아닙니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만큼 정확한 신앙의 지식도 있었고 그리고 그것을 놓치지 않았고 수고하고 애쓰고 있고 구제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단 무슨 문제가 있었느냐 하면 그들은 그들의 출생을 성장시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첫사랑이 식었다는 것입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출생한 자녀는 자라야 됩니다. 당연히 자라야 됩니다. 그런데 이 자라남이 없는 것입니다.

 

 

 

퇴근해서 부부가 만나 눈물이 글썽글썽해지고 하는 것은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야 그럴 수 없습니다. 집에 들어오면 나와 보는 사람이 요새 누가 있습니까? “아니 이거 나와 보지도 않어” 그러면 “누구는 지금 놀고 있는 줄 알우?” 이것이 부부입니다. 이것이 실력입니다. 살아온 것입니다. 싸움싸움 해 가지고 아이들을 키우고 그런 것 다 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에베소서가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발 좀 자라란 말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17-23).

 

 

 

이 번역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주님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입니다. 주님만이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만물 안에서 충만케 하시는 충만이 필요하답니다. 바로 교회는 그의 몸이니 그의 충만인 겁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우리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충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충만을 위해서 필요하며 그의 충만의 충만을 만들기 위하여 충만해져야 되는 존재여야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교회 교인들에게 자꾸 요구되어야 합니다.

 

 

 

래서 계속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1-13).

 

 

 

그렇죠.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구요? 다시 4장으로 가보십시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엡 4:17-20).

 

 

 

너희는 옛날에 저 세상에서 살았다. 그 세상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너희는 구원을 얻었다’. 그러니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주게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5-29).

 

 

 

옛날의 영역,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고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였는데 이제는 그 영역으로부터 거룩한 영역으로 왔다. 그러니 그것은 다 버려라. 그러니까 신앙이란 무엇이며 신앙이 깊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앙이 강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새 영역에 들어와서의 성장입니다. 거룩해지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데 그 모든 일을 종교화시킨데서가 아니라 삶의 전영역에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세상을 우리로 하여금 공격하도록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악한 자들이 승리하며 행악자들이 권세를 잡고 있으며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더럽게 굴고 있습니다. 거기에 새로 거듭난 우리가, 의와 거룩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정직과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과 온유와 겸손과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생명과 진리와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저들과 똑같은 형편, 똑같은 영역에서 힘있게 살아 나가야 됩니다. 그것이 전 삶의 영역, 삶의 전체계로 체계화되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느냐? 구원 얻은 확신이 있느냐? 오늘 죽어도 눈을 뜨면 천국일 것을 믿느냐? 그것이 전부는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 모가지가 잘려도 눈을 뜨면 천국이다. 그것 가지고 재지 마시고 그 목 잘리기 전에 잘 살라는 말입니다. 죽은 다음에 가는 천국 좋습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동안은 무어냐 말입니까? 예수 믿는 것이 살아 있는 동안은 세상 사람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입니까? 예수를 믿었어요. 천국 가요, 믿음이 있습니다. 구제도 하고 전도도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 것 이외에 더 견고해져야 됩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새사람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새 하늘과 새 땅의 부름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지금 시작되어 우리가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갔을 때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점도 흠도 없이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으로 다시 가 봅시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기록된 이 일곱 교회 편지는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계시록 2장 처음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결론을 봅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이 결론이 언제나 일곱 교회에 공통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8절 이하는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 그 다음 버가모 교회입니다. 17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이기는 자는”, 18절로 시작된 두아디라 교회 29절과 26절을 보십시오. 사데 교회는 3:6과 5절을 보십시오. 7절은 빌라델비아 교회이고 13절과 12절을 보십시오. 14절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22절과 21절입니다.

 

 

 

다들 공통적으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리고 “이기는 자에게는...”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기는 자’ 이것은 참 재밌습니다. 일곱 교회에 공히 어려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일곱 교회가 공히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을 것이 있었습니다. 일차적으로 교회들입니다. 교회로 쳐줄까 말까가 아니라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칭찬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부족한 것들을 지적하는데 그것을 없이 해준다는 약속이 없습니다. 이겨야 됩니다.

 

 

 

신앙의 깊이가 무어냐, 더 좋은 신앙이 무어냐, 더 큰 신앙이 무어냐고 할 때 종교화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시며 하늘과 땅을 지으셨고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지금 나타나는 것은 아직도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니요 약속한 나라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은 행악자들이 권세를 잡고 있고 부패해 있고 유혹이 있고 협박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안에서 그의 나라를 시작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에서 나타납니다. 우선 우리가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자들이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분명히 이 내용에 포함되어야 됩니다. 그가 하늘과 땅의 권세를 잡은 것도, 역사의 주인인 것도 역사를 시작하셨고 역사를 이제 심판으로 마치실 것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삶의 전체계 온 우주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신자로서 이 삶을 대처해 나갈 줄 알아야 됩니다. 세상은 우리를 협박하고 위협하고 그리고 유혹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는 자로, 의와 거룩으로 새롭게 난 자로 모든 현장에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우리는 신자로 싸워 나가야 됩니다.

 

 

 

그리고 모든 싸움을 회피하고 도망가면 안 됩니다. 안 되는 것을 기도로 때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기도가 어떤 제물이 되게 마십시오. 기도란 하나님 앞에 더 좋은 지혜를 구하고 방법을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를 기어코 이겨내는 것으로 기도는 응답되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이 하는 이야기를 알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시고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고 의와 거룩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여러분 삶이 전영역에서 새로난 자로, 의와 거룩과 영원한 소망을 가진 자로 그리고 온 천하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다가오고 부딪치는 것을 책임져야 하는 모든 삶의 일들을 신자로 싸우시고 승리하기까지 포기하지 않으셔야 됩니다.


 


그것을 위하여 바울은 이제 로마서에서 복음이 무어냐, 하나님이 누구냐,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무어냐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설명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선 이 시작을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삶에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식하시고 그의 자녀로 부름받은 것을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기억하듯 이 첫사랑을 기억하십시오. 태어난 다음에 성장을 중지하지 마시고 끝없이 끝없이 자라나시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자리에 다 도달하여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감사와 찬송이 끊이지 않는 신앙생활을 몸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6강(롬1:16-17절) 하나님의 손길로서의 복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복음이라 하는 내용에는 처음에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사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과 또 부활하사 하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교회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고 계시며 그의 메시아직과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완전케 하시고 완성시키는 이 모든 일이 다 들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16절과 17절에 이르면 이 복음의 내용에 핵심 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승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크고 원대한 스케일이 있음을 설명하는 내용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16절에 있는 바와 같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출발은 주님의 오심과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과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셔서 지금 우리 편을 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크고 더 거대한 시각을 가지고 보자면 바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얻은 바 구원과 구원에 관한 소식인 복음을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지혜라는 차원에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이 복음을 따져야 되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와 결부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언제나 흔들리고 믿음이 연약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얻은 바 구원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시고 우리를 향하여 어떤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신가? 어떤 능력을 행사하고 계신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단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6절에 있는 말씀에서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 분명히 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그리고 복음은 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능력’이라고 하지 않고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대표적으로 살펴볼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표현된 복음의 핵심 되는 것과 그것이 믿음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가장 먼저 배제해야 되는 것, 우리 신자들이 절대 틀려서는 안 되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칙, 핵심, 근본되는 원리는 휴머니즘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휴머니즘이라는 것은 이 로마서를 하면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은 복음을 설명할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 산상설교는 아닙니다. 산상설교의 내용은 대단히 고귀한 것입니다.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대라. 속옷을 달래면 겉옷까지 주어라.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도 가라.’ 굉장히 중요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

 

 

 

그러나 그것이 복음은 아닙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그것과도 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를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내세우는 것은 복음의 ‘’자도 모르는 소치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이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책은 아닙니다. 이것 때문에 이런 오해가 실제로 우리 주변에 많이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으실 것입니다. “저 따위 것이 무슨 예수를 믿는다고 그래.” 그러나 그 반대되는 말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예수를 안 믿지만 천당이 있다면 바로 저런 사람이 가야 돼.”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자녀로 부름을 받는 것이지 착하냐 안 착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구원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느냐를 설명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복음은 아닙니다. 바로 이 생각이 인간이 갖는 본능적인 생각입니다. 요즘엔 이 생각과 기독교 신앙이 적당히 절충된 이상한 짬뽕이 하나 생겼습니다. 어떻게 짬뽕을 했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 구원에 이룰 수 없게 된 것을 하나님께서 안타깝게 생각하셔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 죄를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 죄를 다 없이 하셨습니다. 구원의 문이 열렸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무슨 헌금을 많이 하라는 것도 아니고 착한 일을 하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고만 하면 공짜로 값없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로 섞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어떻게 짜집기 해 놓았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간음을 하지 않고 살인을 하지 않고 안식일을 지켜야 했고 그리고 주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마음으로마저도 율법에 저촉되는 것을 한다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을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여 우리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드디어 구원의 문이 마음껏 넓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없고 믿고 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도 못합니까? ”이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이것까지도 아닙니다. 복음은 이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거나 설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의 방법이란 말입니다. 복음 자체가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것은 쇼윈도에 값없이 제시된 어떤 진열된 상품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값없이 공짜로 주워 가라가 아닙니다.

 

 

 

오늘 그 문제에 대한 성경의 전체적인 증거들을 제시하겠습니다. 예수를 믿고 있으면 그것이 여러분의 선택이든 무슨 결단이든 아무래도 좋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면 여러분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정리했느냐는 문제는 여러분이 얻은 구원과 여러분이 가진 신앙이 커지고 깊어지는 데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합니다. 신앙의 가장 큰 걸림돌은 무어냐 하면 하나님이 구원을 제시하셨고 우리에게 공짜로 주신 것을 내가 선택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계서 하신 일이 99.9%고 내가 한 일이 0.1%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내가 맡은 0.1%도 완수하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신앙생활을 해 보시면 우리는 늘 완악하고 게으르고 배반하며 알고도 죄를 짓습니다. 그 0.1%를 못 해냅니다. 그래서 0.1%가 내 책임이라고 되어 있는 사람은 예외없이 좌절하고 실패합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뭐와 같으냐 하면 이렇게 가정합시다. 제가 어떤 시체를 살려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시체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너를 살려 줄테니 너는 다른 것 하나도 할 것 없다. 내가 널 살려줄 때 나를 3초 동안 똑바로 보아라” 이러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너를 쳐다만 보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나를 쳐다보라.” 그런데 눈알이 있어야 쳐다보죠. 이미 썩은 지 오랜데 “아니 그럼 쳐다볼 눈이 없으면 내가 하나 둘 셋 할 때 마음에 힘만 한번 써라” 시체가 무엇을 듣고 힘을 씁니까? 시체는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습니다. 시체는 들을 수도, 볼 수도, 자기가 어떤 처지인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전혀 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그와 흡사합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감각이 없는 시체인 우리를 하나님 쪽에서 불쌍히 여기사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그의 손으로, 그의 능력으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지금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시체인 우리를 구원하셨다면 어차피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실 때 시체인 우리가 하나님을 쳐다볼 수도 없고 마음에 힘을 줄 수도 없고 귀를 기울일 수도 없었다면, 왜 믿음이라는 것이 등장해서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는 구별이 생기는가?”라고 여러분은 물으실 것입니다.

 

 

 

제가 설명할테니 잘 들으십시오. 보통 구원은 실제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시행됩니다. 누가 와서 복음을 “예수를 믿으십시오. 당신은 죄인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범죄한 우리를 위하여 예수를 보내셨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키로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렇게 권합니다. 마치 우리의 반응과 결단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형태를 취합니다. 이것은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마저도 그랬습니다. 옥문이 열리고 사도 바울을 묶어 놓았던 모든 결박이 풀어졌습니다. 도망간 줄 알고 간수가 자결을 하려고 하자 바울이 그를 제지합니다. “우리가 다 여기 있으니 내 몸을 상하지 마라” 그래서 간수가 떨면서 와서 묻습니다. “내가 어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때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분명히 우리에게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우리의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혹은 친구의 권유를 통해서 혹은 누군가의 전도에 의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혼자 어느날 가만히 다락에서 생각하다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고 온 사람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종소리를 들었거나 십자가를 보았거나 뭐 지하철에 흘려진 종이 쪽지에서 본 ‘교회로 오십시오’를 보고 왔습니다. 말씀과 전도라는 방법을 통해서 왔고 우린 거기에 반응했습니다. 바로 여기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었을 때 우리가 믿기로 반응했다고 자꾸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면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우린 지금 이렇게 오해하고 잇는 겁니다. ‘복음이 나에게 제시됐고 나는 거기에 반응했다. 나는 선택했다.’ 성경이 하는 이야기는 복음은 우리에게 제시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파고 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선택하라고 제안된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내 영혼, 골수, 심령 속에 파고 들어와 죽은 내 영혼을 살리고 감긴 내 눈을 뜨게 하고 막힌 내 귀를 뚫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설명할 때 모든 믿는 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반응이거나 우리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게 된 모든 일들을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고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가를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없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를 보내사 우리 죄를 씻는 작업과 우리를 완성시키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아직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제사장 직분을 수행케 하는 것과 동시에 성령을 보내사 우리 마음문을 여시고 우리 죽은 심령을 깨우치는 작업을 동시에 하십니다. 이것을 다 합쳐서 복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2-5).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내가 너희의 믿음을 듣고 매우 기뻐한다,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신 것이 너무나 분명하구나,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이것이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너희에게 이르렀기 때문에 너희가 신자가 된 것을 내가 목도했으므로 내가 감사하노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말씀 속에 능력으로 함께 하여 너희 심령을 찔러 쪼개어 변화시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말과 설명으로 너희를 납득시키고 예수 믿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분명히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신 것이고 택했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말씀 속에 함께 하사 능력과 확신으로 너희의 심령에 간섭하여 너희를 믿게 하셨느니라.”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들, 우리가 하나님을 알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이 모든 것들은 내 선택과 내 결단이 아닙니다. 결과입니다. 무슨 결과입니까?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일으키신, 나를 거듭나게 하셨고, 내 눈을 뜨게 하셨고, 죽었던 내 심령이 살아나게 하시사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맞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된 결과란 것입니다. 이것은 결과입니다.

 

 

 

더 분명한 곳을 찾아 봅시다. 고린도전서 2:1에서 5절까지로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중 바로 이 문제와 결부된 중요한 사도 바울의 논술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왜 이 말을 써야만 했었느냐 하면 고린도 교회가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설립했는데 이 교회 내에 나중에 쓸데없는 싸움이 생겼습니다. 복음에 대한 오해가 생겼습니다. 처음에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에 관한 이 깊은 도리들을 본인들이 이해하고 선택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난 똑똑하고 신령해서 이 말을 알아들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너희들은 덜 똑똑하고 덜 신령해서 안 믿었다, 혹은 늦게 믿었다 혹은 아직도 덜 믿고 있다.” 이런 싸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이 무슨 싸움을 하려고 하느냐 하면 “너희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들은 너희의 머리와 생각으로 너희가 이해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너희 속에 성령께서 작업하셔서 알게 된 것이다. 네가 똑똑해서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의 심령에 간섭한 결과로써 믿음이 생긴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이 말을 씁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지혜와 사상, 철학적인 어떤 윤리와 도덕적인 것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 중에 이 일을 전할 때에 십자가 외에는 생각지 않았다”고 합니다. 십자가란 무엇이기 때문입니까? 인간의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은 스스로 아무 능력도, 지혜도, 지식도 없다는 것을 십자가보다 더 잘 설명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떠하기를 요구했느냐 하면 4절을 봅시다. “내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 2:4-5).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예수를 선택했다. 내가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은 다 필요없다. 착하고 안 착하고 성실하고, 안 성실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일단 우리가 해야 할 단 하나의 책임이 있다면 예수를 믿는 것이다.” 뭐 그렇게 믿었다고 해서 제가 시비를 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신앙을 쌓는데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그 믿음은 여러분의 의지도 아니고 여러분의 지혜도 아니고 여러분의 열심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들어낸 중생한 결과로 생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알기 시작했고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이 선택하고 이해해서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복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리쪽에서의 자격과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못났고 완악하며 훨씬 처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시사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만을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완악한 우리, 죽은 우리, 무능한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께서 대수술을 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우리를 향하여 갖고 계시는 모든 약속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바꾸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0:9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이런 구절들이 우리에게 믿음과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이것은 그렇게 쓴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리만은 분명히 해야 됩니다. 우리는 입으로 시인해야 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서는 시인할 수가 없습니다. 믿어야 됩니다. 13절에 가면 이 믿음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3-14). 믿지 않고서는 주를 부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디서 나느냐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 이것은 중요합니다. 왜요?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 스스로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가 나옵니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거나 우리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비밀한 것이고 이것은 너무나 높은 것이고 게다가 우리는 영적으로 죽어 있어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자, 그 소식을 전하는 자도 같은 인간인데 그는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내가 모르면 그 사람도 모릅니다. 우리 인간, 나라는 이 인간이 모르면 저 인간도 모르는 법입니다. 물론 그것이 세상 학문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렇지만 영적인 문제에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인간 중에서 아무도 이것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더 나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누가 보낸 것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분명해졌습니까? 복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나를 위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내 죄를 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나를 완성키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사 하늘 보좌 우편에서 오늘도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고 놓쳐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성령 하나님을 보내사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가진 계획과 이루신 모든 것을 나의 것이 되게 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며 신령한 것을 소유케 할 수 있는 자로 그 심령을 중생시킵니다. 선한 의지를 줍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나를 바꾸어 놓으시고 중생시키시고 거룩한 일에 약속을 허락하시고 그 일을 감당하는 자로 오셔서 나와 함께 역사하십니다. 여기까지가 다 복음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시며 떠나시지 않았습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이 내 편을 들고 계시고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로마서 8:26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님을 보내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에 모든 것을 맡기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선택과 우리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잘못 선택하면 하나님 앞에 맞으면서 고치도록 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올바른 선택을 하면 칭찬과 상급 속에서 영광의 자리로 가게 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지금 자랑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 부끄러워하지 않느냐? 이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 능력은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되 우리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하여 정당한 반응을 못하는 것을 내버려 두시지 않고 거기에 정당한 반응을 하도록 우리에게도 작업하사 그 일을 결과적으로 완성의 자리에까지 이루어 내실 것이 복음 속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 복음이며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우리의 운명은 우리 손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몰아가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못살게 구십니다. 마음을 못살게 굴어서도 안 되면 다리를 부러뜨리든가 허리를 부러뜨리든가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몰아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28절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아멘 하십니까?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선전포고인지도 아시겠습니까? 알아서 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아픔과 슬픔과 생각해야 되는 일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지 않은 손길의 결과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싶은대로 다 됐더라면 이 자리에 안 있었을 것은 왜입니까? 부모를 잘못 만난 것도 아니요 시대를 잘못 만난 것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사 여러분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영광의 자리에 앉히시기 위하여 여러분을 내버려 두시지 않은 결과입니다. 이것에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더 맞는 수밖에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복음이 무엇이라구요? 하나님이 불쌍하고 비참하고 미련하고 게으르고 완악한 우리들을 사랑하사 우리의 운명을 우리의 손에 내버려 두시지 않고 찾아 오셔서 죄에서 꺼낼 뿐만 아니라 씻으시고 거룩케 하시고 아름답게 하사 영광의 자리에 앉히시기로 이제 그 일을 시작하셨고 그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인데 이 복음은 하나님이 미련하고 완악한 인생에 찾아오셔서 간섭하신 의지의 손길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복음에 대하여 하나님의 간섭에 대하여 반항하실 수 있습니까? 남는 것은 매자국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고집과 여러분의 고집이 부딪치면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이기십니다. 왜요? 하나님이 고집이 얼마나 세신가 하면 그의 별명을 영원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고집을 부려봤자 기껏 100년입니다.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말로 할 때 순종하여 칭찬받고 상 받으면서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영위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권면하신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의지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인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히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6-11).

 

 

 

우리는 말로 해서 듣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갖는 운명적 목적에 대해 감사하고 ‘아멘’ 하십시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의 완악함과 비교하자면 우리는 죽었다고 복창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분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작정하신 일, 우리의 복을 위하여 계획하신 일을 포기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게 말해서 절대로 듣지 않는 원수들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얻어터질 일만 남았는지,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만일 지혜롭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다면 신자의 길이란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이 세상의 어느 것으로도 방해받지 않는 영광된 우리의 약속이 얼마나 확실한가를 생각하게 된다면 신자는 마땅히 매일의 삶을 찬송과 감사로 이어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가? 왜 그렇게 못산다구요? 우리는 우리의 근거를 가지기 일쑤고 그 다음에 우리는 우리의 고집을 앞세우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우리 속에서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영원한 약속이 복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신자의 행복입니다. 그것이 신자가 마땅히 해야 될 믿음의 순종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인 줄 인정하시고 우리로 믿게 하시며 우리로 영원한 기업의 자리에 불러낸 그 자리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마땅히 되어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7강(롬1:16-17절) 하나님의 의(義)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이라 그러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첫 번째 생각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16절의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그러나 기억할 것은 복음에는 이 구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나타내 보였다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17절에 있는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로마서의 대주제이고 잊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두드러지게 표현되는 내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어야 구원을 바로 알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늘 구원을 얻는 방법, 구원에 관한 좋은 소식 이런 식으로만 이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로마서 3:21을 보시면 이 복음에 관한 설명에 하나님 의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는 것을 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의’가 무어냐 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제대로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1:17로 다시 돌아오시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무어냐 그럴 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할 때 믿음이라면 다 아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 쳐 놓고 믿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바로 구원을 얻는 방법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이것이 16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복음이 무어냐 그럴 때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복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분명히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동시에 그것이 하나의 방법이나 조건, 선전이나 설득이 아니라, 복음 내용 자체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성경이 주장하는 복음이 뭐냐 하는 설명에서 사도 바울은 일단 복음은 내용이고, 개념이고, 도이고 교훈이기 이전에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이 복음이 무어냐 그러면 아들에 관한 것이고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 무어냐 그러면 정확히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이 아니고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시사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과 부활하사 우리를 위하여 보좌우편에서 아직도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이야기하고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할 때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내용이 무엇이냐, 그 가르치는 바 원리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가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며,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간섭하셨다는 신적 개입에 관한 개념이 먼저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로마서가 이방인에게 보낸 편지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원래 몰랐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몰랐던 이방인에게 이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무엇이냐,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느냐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지금 형편을 설명하지 않고는 설명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요 그 대속 사역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라” 그럴 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그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런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우리가 정말 그런 구원을 필요로 하며 구원을 안 받으면 안 되는 존재냐”하는 것들을 먼저 풀어 나가야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곧 로마서 1장은 18절부터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 나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첫 번째 작업으로서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것을 복음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라는 것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님 공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거룩과 순결과 그런 공의이기 때문에 부정하거나, 죄악을 지은 자들이 그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공의로는 인간은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영어로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의는 영어로 ‘justice’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라는 말로 양쪽 다 쓰고 있어서 우리가 조금 혼동을 합니다. ‘justice라는 말을 쓰고 지금 여기 있는 ‘하나님의 의’의 ‘righteousness’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옳으심’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나타났다. 그래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루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무어냐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하나님다우심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데 하나님다우심이 무엇에 있느냐고 할 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이라 그러면 16절에 있는 바와 같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하는 것에서 오해했듯이 선택, 결정이라고 생각하십니다. 대표적으로 복음에 관한 큰 오해 중에 하나가 예전에 우리는 우리의 죄값을 치를 수가 없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 빛을 갚을 수가 없어서 구원 얻기가 불가능했는데 지금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빚을 다 탕감해 주셨다. 이제 남은 것은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우리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이것은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아주 흔하게 등장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조건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가 자생적으로 그리고 자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믿음을 요구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두 가지로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유일한 권위자이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 하나님이 유일한 주권자이심을 인정해야 됩니다. 이 6절에서 말하는 믿음은 누구의 믿음입니까? 누가 소유해야 되는 믿음입니까? 누구에게 요구되는 조건입니까? 믿는 자인 우리 모두가 가져야 되는 조건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을 한번 봅시다. 로마서 3:9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 9-12)

 

 

 

선을 행하는 자가 어떻게 없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깨닫는 자만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처지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죽었습니다. 그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그들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피해 숨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원래 하나님에 관한 관계나 의식에 관계없이 태어납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제가 썼던 책에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자연인이 하나님에 대하여 상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연체류인 지렁이가 메니큐어를 생각하는 가능성보다도 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지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라 이 말을 알아 듣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딱딱한 각질이 있어야 메니큐어를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지렁이가 메니큐어를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듯이 자연인은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되지 않는 존재란 것입니다. 본성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믿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즉 이 두 가지 문제를 성경이 어떻게 연결시키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믿지 않고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믿는 것은 고사하고 말입니다. 특별히 미국에 있는 교회들에서는 이 문제를 인간의 선택으로 많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자기 결정을 매우 중요시하는 민족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자기 선택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래서 결단이라는 것을 많이 요구합니다. 여러분, 미국에서 가장 강한 교파가 침례교인데 침례교에서 구원초청이라는 것이 자주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신 분 일어나십시오, 나오십시오.” 이것이 이런 이유 때문에 자행되고 있는데 그렇게 하는 방법론에 대해서 저는 시비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의도에 대해서도 시비가 없습니다. 단 분명히 이해와 설명의 미흡함은 지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지금 우리가 1:17에서 본 바와 같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무어냐 하는 것과 그것이 왜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증거되는 것이냐 하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고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성경이 믿음을 요구하는 것과 그리고 그 믿음을 자생적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연결시키고 있는가에 대하여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데 이 뜻을 무엇으로 이해할 것인가에 대하여 힌트를 하나 줍니다. 바로 뒤 구절에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는 힌트를 줍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은 유명한 하박국서 2:4의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하박국 2:2 말씀부터 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2-4)

 

 

 

이것이 바로 로마서 1:17에서 하신 말씀인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왜 여기 등장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이해해야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무슨 질문을 하나님 앞에 던졌느냐 하면 “왜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며 선하고 의롭게 사는데 세상을 의지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당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만히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질문을 던지죠? 왜 기도했는데 이런 저런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정직하게 산 보상이 무엇입니까? 양보하고 산 가치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여러 번 하시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주신 답이 무어냐 하면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하는 답입니다.

 

 

 

대략적으로 이 하박국서를 이해하기 위해 1:2을 봅시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합 1:2-4)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고 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사는 자들을 괴롭히는데도 가만히 보고만 계십니까? 5절 하나님의 답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그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 기병은 원방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기병이라 마치 식물을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같이 많이 할 것이요 열왕을 멸시하여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합 1:5-10).

 

 

 

하나님, 악한 자들이 선한 자들을 괴롭히는데 왜 가만히 계십니까의 답이 무어라구요? “그 정도 가지고 놀라면 너무 이른 것이다. 앞으로 더 그렇게 된다. 더 흉악한 일들이 일어나고 더 강포가 심해질 것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여러분, 걸프전 마치고 후세인 잘 졌다고 그러싶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쉽게 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주십시오. 그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후세인이 과거에 악당 같은 짓을 한 것보다 더 세게 부수고 악당짓할 것이란 말입니다. 부시는 메시아가 아니고 후세인은 꼭 사탄이 아닙니다. 둘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힘을 사용했던 동일한 악당들입니다. 저는 반미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됩니다. 미국은 세계 평화를 위해 하나님이 선택한 천사가 아닙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중동의 원유를 확보키 위하여 무력을 사용한 힘을 가진 날강도 중 하나입니다. 미국을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만 믿으십시오. 그래 놓고서 준 답이 이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그러면 잘 보십시오. 지금 하박국이 한 질문이 무어냐 하면 “도대체 하나님을 믿고 산 대가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산 자와 세상을 믿고 산 자가 세상에서 득세하고 세상이 언제나 이기는데 그렇다면 하나님 믿은 이익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왜 이렇게 악당들이 흥왕하는데 내버려 두십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무어라 답하셨다구요? “야 너 그 정도 가지고 놀라면 안 된다. 앞으로 더 흉악해진다. 세상은 더 악해진다. 그때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 이렇게 답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은 가치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었는데 “더 흉악해진다”고 하면서 ‘믿음으로 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에 하박국 선지가 이해했던 믿음과 하나님이 살아야 된다고 한 답 중에 다른 차이가 있는 것을 봅니다.

 

 


하박국서 2:12부터 봅시다. “피로 욥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 아니냐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우리라 대저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두렵게 하여 잔해한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모든 거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합 2:12-17).

 

 

 

지금 하박국 선지가 불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든 것은 믿은 것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였고 하나님의 답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양자 간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하박국식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 그 표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표가, 하나님을 믿은 보답이 이 세상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답은 나를 믿고 사는 것에 대한 보답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고 산 것이 표가 없고 보상이 없다는 것이 하나님이 그를 방치했다는 뜻은 아니란 말입니다. 이 세상이 흉포화하고 이 세상이 행악하는 자들이 더 많아지고 이 세상이 부패하고 썩어져 간다 할지라도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해 견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하박국식의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믿은 값이 무엇입니까? 세상이 흉포해지고 악해지지만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흉포하고 행악자들이 날뛴다고 해서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간섭과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의해 방해되거나 세상에 의해 구부러질 수 없다고 선언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그러니까 의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가 아니라 의인은 하나님이 보호하고 자키고, 세상에 악한 자들이 일어나고 더 나쁜 나라가 일어나고 더 나쁜 나라가 일어나고 더 나쁜 식으로 역사가 진행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이 방해받거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손안에서 뺏겨지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행악자들이 들끓고 그들이 승리해 보이고 우리가 늘 당하는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손 안에 있으며 보호 안에 있으며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우리가 주를 믿어서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인을 지키는 힘, 그 힘, 그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간섭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3장에 와서 이런 결론으로 끝이 납니다. “사기오놋에 맞춘 바 하박국의 기도라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산에서부터 오시도다(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시계에 가득하도다”(합 3:1-3)

 

 

 

결국 어디에서 어디로 하박국 선지의 신앙이 바뀌느냐 하면 ‘하나님을 믿었으면 믿는 보상이 이 세상에 있을 것이다’라던 믿음으로부터 그 백성을 지키시며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그의 일을, 그의 지혜와 그의 깊은 뜻과 능력을 이루시고야 말며 그 일을 모든 역사와 모둔 장소에서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래서 찬송이 다 무어냐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입니다. 예전엔 아닌 줄 알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세상은 행악자들이 득세하고 주를 의지한 자들이 피해를 보는 것 같으니까요. 어디가서 낮잠 주무시고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뭐하고 계십니까? 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지금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3:17 결론입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어떻게 달라집니까? “하나님이 내 편을 드시는 한 외양간에 소가 없고 악당이 총을 들고 쳐들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내 편인 이상 나는 무너질 수 없다.” 이런 개념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었는데 결국 준 것이 이것입니까?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편을 드는 한 누구든지 나를 손댈 수 없다”간다는 말입니다. 즉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믿음이 내가 꺼내 놓아야 되는 조건으로서의 믿음, 하나님에 대한 나의 신뢰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란 우리를 우리의 손과 우리의 힘에만 맡겨 두시지 않는 하나님의 간섭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 우리가 보았던 로마서 1:17로 갑시다. 즉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그 안에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게 하는, 히브리서 11:6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에게는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하는, 이 믿음이 생성되게 하는 하나님의 간섭이 있었단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믿도록 하나님께서 하신 어떤 간섭, 역사 속에서, 그리고 우리 개개인의 영혼 속에 하신 하나님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생긴 결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 둘을 비교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렇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믿어야 얻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의인도 없고 선하지 않은 우리가 어떻게 이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한 어떤 하나님의 간섭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린 자꾸  전에 하박국 선지자가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내가 꺼내 놓은 믿음을 조건으로 해서 하나님 왜 그 보상을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성경이 하는 이야기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하나님다우심,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내 죄를 씻기 위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 만드시고 부활 생명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사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그래서 잠자던 내 영혼을 일으키셨고 눈 먼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셨고 시체였던 우리를 일으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래서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가진 믿음을 우리로 소유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 속에 믿음을 행하셨습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행사하실 세상적인 조건과 힘이 아니라 영적이고 거룩한 하나님 쪽에서 계시하시고 완결하시고 간섭하시고 이루신 하나님의 간섭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이 복음은 구원의 조건으로서만, 가능성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치료한 치료로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제시하는 사도 바울의 주장 속에는 무엇이 있느냐 하면 이 복음을 믿어 구원을 얻는다 하는 선포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죽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이 복음을 믿을 조건이나 능력이나 관심도 없는 우리에게 어떻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내시고야 말았는가가 복음 안에 들어 있다는 의미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잘못하면 뭐라고 나중에 말합니까? 자녀가 심한 잘못을 해서 경찰에 잡혀가거나 혹은 부모가 학교에 불려가거나 했을 때 “그 놈은 내가 낳지만 내 자식은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합니까? “다 제가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라고 하지요. 그것이 부모의 마음 아닙니까? 부모답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특별히 로마서 1:17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방인들 특별히 로마 사람들은 헬라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나라입니다. 제우스가 있고 아폴로가 있고 헤라클레스가 있고 프로메테우스라는 신들이 있는 그들에게 그들이 갖고 있는 신관같이 편협하고 변덕이 많고 부도덕한 신으로 오해하지 말아 달라,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 불쌍한 인간을 찾아 오시는 하나님, 하나님 쪽에서 희생을 감수하시면서 불쌍한 우리를 위하며 베푸신 사랑의 크심, 그의 은혜, 그의 거룩하심, 그의 자비와 긍휼 이런 모든 것이 복음 안에 어떻게 잘 드러났느가로 이방인들 앞에 복음을 그리고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런 것들은 여러 가지 성경적인 지지를 받습니다. 몇 구절만 찾아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앞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러니까 구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 그러면 구원의 조건이 어디에 달려 있습니까? 내가 믿어야 되고 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능성은 예수로 말미암아 생겼다 할지라도 구원을 얻기 위한 최종적인 마지막 열쇠는 내가 믿느냐 안 믿느냐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구원을 얻을 자 없고 그 구원을 획득할 자 없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미쳤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생성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믿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간섭에 의하여 우리에 나타난 첫 번째 결과인 것입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5). 믿음이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어야 된다면 구원이 누구 안에 있어야 됩니까? 믿음이 예수 안에 있다고 합니다. 믿음이 예수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복음이 무어냐? 우리가 믿는 신앙의 가장 영광되고 가장 자랑스러운 부분이 무어냐 그럴 때 여러분이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가지신 사랑과 열심과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시작됐고 역사적으로 시행하셨고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는 그의 살아계신 간섭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셔야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같이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아이가 시험에 떨어졌다든지 기도 열심히 했는데 병이 안 낫다는 것 가지고 또 망루에 올라가서 “하나님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이렇게 믿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그 믿음이 무어라 그랬다구요? 하나님의 간섭하심, 세상의 조건과 세상의 힘이 아닌, 그 수단과 방법으로가 아닌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는 그 힘으로 의인은 삽니다. 즉 의인을 사는데 있어서 자기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보호와 힘에 근거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게 하셨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깨끗케 하시며 그 안에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이것이 우리가 믿는 바 신앙의 핵심이요,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 아무도 그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광 중에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8강(롬1:18-19절)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1:18-19)

 

 

 

지난주에 말씀드리기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라는 말을 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불쌍한 인생에 직접적인 은혜와 긍휼로 간섭하셨는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직접적이 간섭이 왜 필요한가라고 할 때 성경이 이야기하는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분명히 우리들이 처한 처지가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곤란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18절, 19절에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우리의 형편을 제대로 지적하고 있고 이 형편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 외에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셈이 됩니다. 복음이 무어냐 그럴 때 처음부터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요, 그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나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사건이요, 또 성결의 영으로는 부활하사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지속적인 사역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되게 된 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 쪽에서는 아무런 조건이나 협력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아 된 일의 결과가 우리에게 베풀어진 것을 복음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문제를 논할 때마다 인간이 그런 도움을 받을 만한 처참한 처지에 있는가 하는 것을 물어 보아야 되고 그런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인식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논리적으로 이 문제들에 대한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1:13로 가 보시면 아직 바울은 로마로 가지 않았고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매우 열심히 그들 보기를 소원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3-15)

 

 

 

할 수만 있다면, 열심히 너희에게 가기를 원하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다, 헬라인이든 로마인이든 야만인이든 어리석은 자든 지혜 있는 자든 누구에게나 이것은 필요한 것이라 그럽니다. 그리고 16절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원문에는 사실 이런 말이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앞에 있는 대로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아니 그 이상으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는데 왜냐하면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수사학적인 표현입니다. 제대로 말하자면 “내가 이 복음을 자랑한다”입니다. 이 복음은 어떤 복음이기 때문에 내가 자랑하느냐 할 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도 같은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즉 “왜냐하면 내가 복음을 자랑하는데 또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한꺼번에 연결해서 보지 마시고 이렇게 나누어서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왜냐하면 이 복음이 너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새롭게 내가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17절에서도 똑같은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그것도 원뜻을 살펴보자면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 복음 속에는 하나님이 누구인가도 나타났고 너희 속에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것이고 또 사실상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답이기 때문에 내가 이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18절도 똑같이 ‘왜냐하면’이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희에게 이 복음 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에 하나씩 갖다 붙여야 된다는 겁니다. 왜 내가 너희에게 이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원하느냐? 왜냐하면 너희가 처한 입장이 상당히 심각한 입장이고 그것을 해결할 답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왜냐하면의 속에는 너희가 심각한 문제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가 있고 이에 대한 답이 있기 때문이다가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문제에 해당하는 것은 답 될 수 있는 문제, 우리가 심각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이제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어냐 그러면 너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그럽니다. 이것만큼 인간이 직면한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는 없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보통 이 문제를 문제성 중에 가장 끝에도 놓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종종 이런 말을 씁니다.“내 아들이, 내 딸이 대학교에 들어가만 준다면 나는 식모살이를 해도 좋다.”이것은 가장 쓸데 없는 곳에다 여러분의 가장 좋고 중요한 것을 갖다가 놓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만 된다면 나는 목숨을 버려도 좋다라고 하는 것들이 지금도 있지 않습니까? “키만 5cm 키워 준다면 억만금이라도 내어 놓겠다, 코만 조금 오똑하게 해 준다면 ...” 정작 우리가 갖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모르면 이렇게 별 볼일 없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어냐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이 진노가 누구에게 임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사람들의 경건치 않음과 모든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 불의한 자들의 무엇을 벌주시느냐 그러면 불의한 첫 번째 조건과 이유인 ‘경건치 않음’입니다. 경건치 않기 때문에 불의를 행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불의를 행한 것은 불의한 것만의 문제가 아니라 불의를 행할수 밖에 없는 저들의 경건치 않음에 대한 진노입니다. 그래서 경건히 않다는 것은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고 거룩하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으로 선하게 사는 것을 거룩하다고 그러지 않고 하나님께 속했느냐, 속하지 않았느냐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성경 속에서 고린도서나 갈라디아서같이 그 서신을 받아야 하는 대상들인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심각한 신앙상의 오류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라고 부르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진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런 식의 편지를 씁니다. 거기서 성도는 물론 거룩할 ‘성(聖)’자의 성도입니다. 거룩한 자들, 경건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잘못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공격하는 내용에 들어가 보면 저들은 불신자라도 별로 행하지 않는 부도덕한 죄들을 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당황하는 대목입니다. 경건하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윤리적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가 경건치 않음에 대하여 임한다 하는 이 경건치 않음에 관한 문제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 됐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인류의 선조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이후로 누구를 막론하고 그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인류는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진노의 자식입니다.

 

 

 

에베소서 2장으로 가보면 그런 내용이 훨씬 더 정확하게 묘사된 것을 만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1-3)

 

 

 

이것이 인간이 처한 심각한 문제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성경이 복음을 전할 때, 이것이 왜 복음이냐고 할 때 바울식으로 이야기하면 “이 복음이 너희에게 유일한 처방이기 때문이다”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빼면 너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은 참으로 무의미한 선언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은 이 부분에 대하여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는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정상화되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영원한 운명과 관계가 있는가를 놓치는 것보다 손해보는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는 분명히 행복과 기쁨, 무슨 복이니 하는 것들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심각한 문제들을 슬쩍 외면해 버리고 있습니다. 모든 복과 저주, 가장 심각한 운명의 결정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문제고 복음 전체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권위로 설명되어질 수밖에 없듯이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시고 그가 우리를 만드신 이상 눈밖에 나면 이 진노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 문제가  여러분이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복음의 요소인 것입니다.

 

 

 

이사야 1장으로 가 보시죠. 이런 문제들이 성경의 얼마나 보편적이고 일관된 사상인지 만나게 됩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였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 : 2 - 6).

 

 

 

이스라엘의 역사는 매 맞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매 맞은 가장 큰 이유가 무어냐 하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는다는 것입니다. 정치 역학적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와 군사, 경제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웃나라 백성에게 압제를 당하고 잡혀가는 가정 큰 문제는 언제나 하나님이 저들을 팔아 넘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팔아 넘기는 가장 큰 이유는 언제나 저들이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 역사는 인간이 얼마나 그 마음에 성실함이 없는가 하는 것이 증거되는 것이며 동시에 모든 복과 벌의 힘이 하나님 손에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꺼내면서 가나안 땅을 저들에게 줍니다. 지금 그것이 중동전쟁의 가장 큰 이유가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생존과 팔레스타인 난민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중동전쟁의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줄 때 뭐라고 그러면서 줍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는 단 하나의 조건은 너희가 내 말을 들어라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짖지 않은 집에 살고 너희가 심지 않은 열매를 먹을 것이다.그러나 거기 들어가서 잘 살다가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가 지은 집에 남이 와서 살며 너희가 심은 열매를 다른 사람이 먹을 것이다. 너희가 내 눈에 잘 보이면 너희를 치고 올라오는 자가 한길로 올라갔다가 열길로 도망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구약성경의 초두부터 등장하는 약속입니다. 거기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하여 배반하였다가 그 저주가 그대로 응한 것을 보여 줍니다. 그 뒤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2000년 동안 저들이 이야기한 대로 “그 피를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돌리소서”그렇게 돼서 2000년 동안 유리하는 백성이 됐고 우리가 잘 아는대로 2차대전 중에 600백만이라는 유태인이 가스실에 갔고 지금도 전세계적으로 유태인이라고 그러면 대접을 받지 못하는 민족적 설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을 통하여 배우고 신약성경을 통하여 배우고 인생 속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복의 근원이 누구며 온 세상만물의 주권자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분명히 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 하면 기독교 신앙이 뭐냐고 할 때 하나님의 존재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인식되어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한 싸움인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이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옵니다. 그로부터만 세상과 진리와 복이 있고 그로부터만 진노와 심판도 있습니다.

 

 

 

그의 진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우리에게 당면한 가장 심각한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지금 무엇과 타협을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갖는 자존심과 타협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높여 그분께 아첨하듯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해서 기독교를 선한 단체로 만들었습니다. 윤리와 도덕의 단체로 만들었습니다. 무슨 Y.M.C.A 같아져 버렸습니다. 사회봉사를 하고 봉사라는 이름 아래 좀 더 헌신적이고 무슨 선행을 베푸는 구제단체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초대하는 말들도 “괴로움이 있으십니까? 교회로 나오십시오. 외로우십니까? 슬픔을 당하셨습니까? 교회 오십시오. 인생의 보람을 찾고 싶으십니까? 교회 나오십시오”라는 식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매우 조심해서 써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그렇게 꼬실 수 있습니다. 전도의 한 전략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정작 신앙의 핵심과 만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유혹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렇게 기독교를 이해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다’라고 보기 이전에 하나님과 여러분이 어떤 상태로 지금 위치에 직면되어 있는가를 지적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훨씬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존심을 깍는 것으로 도전해오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미운 종교가 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3장으로 가 보십시다. 세례 요한의 등장을 보십시오. 마태복음 3 : 7입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 3 : 7). 아니 회개를 시키실 것이면 좀 잘 구슬리면 안 되나요? “참 잘 살고 있습니다. 공부도 많이 하셨군요. 그런데 꼭 하나 부족한 것이 있네요. 예수를 믿으세요. 우리 삼페인이나 한 잔 하면서 인생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봅시다.” 이렇게가 아니라 느닷없이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더러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랄 만한 일입니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서 누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믿었지 않습니까? 결국 여러분이 믿고 들어 왔을 때 누가 어떻게 좋게 이야기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믿고 나서 확인한 것이 무엇입니까? “큰일날 뻔했다.” 이것을 확인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안 믿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나? 큰일날 뻔했다.” 이 마음이 없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복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훨씬 이런 식입니다. 좋게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에 비하면 오늘날 기독교는 훨씬 분위기 좋고 심리적인 위안을 주는, 끼리끼리 모여서 서로 좋다좋다 그러는 미련한 사람들의 집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행복을 논하고 기쁨을 논하고, 그래도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는 그나마 있는 돈을 모아서 선행을 베풀고 있는가로 서로서로 위로하는 이상한 단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참 나쁜 것입니다. 보람있는 인생을 살고 있고 내가 그대로 나만을 위하여 살지 않고 남을 위하여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함으로 자신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아니오. 그렇게 여러분을 확인하셔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확인하셔야 되는 것은 분명히 이것입니다. “지옥 가면 어떻게 하나” 이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정말 나를 불러 주실 것인가?” 이 문제를 분명히 해결해 놓고 나머지를 하셔야 합니다. “아이 뭐 치사하게 천당이니 지옥이니 그렇게 해서 사람 겁주지 말고 좀 더 고급스럽게 이야기하자” 그러나 그것은 고급스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슬며시 가장 주요하고 핵심적인 문제를 비켜가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 성경에서 모든 복은 이런 식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 : 1 - 2)

 

 


복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그 관계가 깊고 긴밀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복이란 시편 1 : 1에 나오는 것과 같이 악한 것, 세상과 긴밀한 관계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병이 무어냐 하면 바로 이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복이 나오며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이 있다는 것을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심각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자녀를 좋은 학교에 붙이는 것, 여러분의 건강을 더 좋게 오래 유지시키는 것 아닙니까? 행복이란 눈 오는 날 따뜻한 벽난로를 피워놓고 둘이 마주 앉아서 커피 마시면서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음식을 먹고 가족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싸가지고 저 푸른 초원 위에 파라솔 펴놓고 낄낄거리고 뛰어 다니는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정상화되어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찬송가 1장이 무엇입니까? ‘만복의 근원 하나님’, 이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고 모든 구원과 그리고 우리 모든 소망의 근거이고, 원리고, 기둥이고, 목표고 아니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이것이 놓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놓쳐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존심이라는 것은 참 기묘한 것이라서 하나님의 필요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인간이란 참 우스운 존재라서 이상한 데서 자존심을 세운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꼭 미련을 범합니다.

 

 

 

왜요?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린 영적으로 죄인이고 무지하고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이 문제에 대하여 무척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과의 화목, 이런 것들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냐 하면 우린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존재를 내가 인정하고 그 아래 내가 꿇어 엎드린 존재로서 복을 얻고 있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존재가 정상화되어 있다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삶 속에서 사실 이 문제는 너무나 자주 잊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친구들에게, 여러분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한다고 하면 무어라 하겠습니까? 일단 가장 교묘한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우회 전법을 쓰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작전으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내용은 무엇이어야 하느냐 하면 “야 네가 너 언제 죽을지 몰라서 하는 이야기인데 그냥 죽으면 큰일난다. 너 예수 꼭 믿고 죽어라. 너 보험 들었냐?” “응. 나 보험 들었어.” “그러면 그보다 더 심각한 것도 하나 해 놓아라. 예수도 꼭 믿어 놔라.” 그러셔야 됩니다. 꼭 그러셔야 됩니다. 그런데 우린 이 말을 잘 못합니다. “한번 나와봐. 우리 목사님 멋있게 생겼다.” 이것은 물론 작전으로는 좋습니다. 그러나 원래 목표는 여기에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그와 어느날 직면하게 되고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고 그 앞에 엎드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하기 위하여 교묘한 작전을 쓰셨군요”라는 고백을 하게끔 해야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 생애에 나타나야 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 : 1- 5)

 

 

 

바울이 누구에게 가서 전도를 할 때는 그랬습니다. 이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해 주기를 바래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안 했습니다.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셨다, 우리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씻으셨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의 말과 그의 전도에 하나님이 동행하실 것을 믿고 간섭하실 것을 믿으며 다른 방법에 대한 기대가 없다고 합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이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많은 교묘한 말의 지혜와 작전, 알아들을 만하고 설득력 있을 만한 것들로써 사람들을 초대하니까 우리의 삶에서는 우리의 표면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온 천하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찾아오신 하나님, 그를 믿지 아니하면 결국 마지막 날에 모두가 심판 아래 있을 수밖에 없는 두려우신 하나님이신 그의 존재가 자꾸 약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자체가 여러분의 삶의 표현, 모습, 원리, 남을 대하는 자세,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이 약화되고 있는 것에 주의해 보셔야 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설교는 어느 것에서나 이것으로 그의 힘을 삼고 어떤 형편에서든지 이 말씀을 전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혔든, 어떤 생명의 위협을 받든 이 말을 전하는데 두려움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 모든 인류가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결을 요구하지 않고 십자가 안에서 풀으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해결하신 분이고, 이 문제를 여러분을 통하여 여러분과 만나는 또 다른 영혼들에게 알리시기를 하나님은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문제를 떳떳하게 설명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가 우리를 살려내신 그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감사하며 담대하십시오.

 

 

 

 

 

로마서 9강(롬1:18-23절) 불의와 진노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 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로마서에 들어와서 가장 중요하게 기억해야 될 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복음의 내용이 관념이나 사상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제사장 직분을 계속하고 계시는 예수님,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의 관념론으로 흐르는 것만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불신자들과 기독교를 논할 때 착하게 사는 일, 선하게 살면 되었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가는가? 옛날 우리 하는 식으로 예수 믿으려고 예배당에 갔더니 눈감으라고 하고서 신발 훔쳐 가더라는 시비를 당했던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이것이 다 기독교가 무엇이냐는 핵심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걸음 더 나아가서 부정적인 차원에서 훨씬 더 두렵게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성경을 따라 해보자면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우리 앞에 커다란 재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하고 그리고 무슨 다른 일로 그 일을 회피할 수 없는 영원한 불못이 있다고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거기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가는 곳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그러니까 모든 자연인이 예수를 믿지 않고 이 복음을 모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예외 없이 이 영원한 형벌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자랑한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진노라는 것은 성경에서 생각보다 훨씬 혹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냥 보통 “벌을 받는다. 넌 틀렸다” 이런 식이 아닙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주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매우 혹독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 마지막 심판을 묘사하는데 “극렬한 풀무불 같다”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시리라”와 같이 대단히 잔혹한 표현을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아무리 자기를 믿지 않고 반대했다고 해서, 좀 나쁜 짓을 했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잔혹하게 보복하실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실 지 모르겠지만 바로 그 하나님의 진노가 그렇게 참혹하게 표현된 이면에는 인간이 짓고 있는 죄라는 것이 그만한 대가를 받을 만한 죄라는 데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죄에 대해서 너무 무감각하고 그 실상을 잘못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저지르는 죄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좀 깊이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18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이제 임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치 않고 불의한 이 일들이 앞에 보시면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의 불의가 진리를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묘사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라 죄인은 하나님에 대하여 거스르는 것입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고 할 때 이 ‘막는다’는 말은 ‘의도적으로 거스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죄란 나쁜 짓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반대하는데 반항적이고 의도적이고 고집스럽게 거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말 속에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고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시는가에 대하여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거스른다는 내용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뒤에 이렇게 나타납니다.“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19)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아는지를 일부러 거스르고 있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싫어하시는 것을 알게 하셨는가의 설명이 잠깐 나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 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 : 20-23)

 

 

 

하나님이 인간에게 최소한의 신 지식을 준 것이 있습니다. 내면적으로 주신 것과 외면적으로 주신 증거가 있는데 인간 내면에 주신 신 지식은 일종의 초월자에 대한 어떤 감각을 주신 것입니다. 이 감각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과 같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절대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인류학자들이 증언하는 것인데 어느 시대 어느 부족, 어느 사회, 어느 집단에 가도 종교가 없는 집단은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없다고 그러지만 현대인들이 갖는 신앙은 과학입니다. 현대인들이 갖는 복음은 돈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원시적이고 아무리 단절되어 있는 문명과 단절되어 있는 곳을 갈지라도 종교는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으로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게 허락하신 참으로 은혜로우신 일반 은총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인간이 모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 일을 허락하셨습니다.

 

 

 

게다가 하나 더 양심을 주셨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양심적으로 압니다. 물론 우리가 상황 윤리라든가 또 그 시대마다 사회적으로 다른 윤리관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만 근본적인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공통적인 양심이 있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죄라든가 그리고 남을 죽이는 것이 죄라는 것쯤은 양심적으로 모두가 압니다. 게다가 이런 내면적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초월자에 대한 인식말고도 외부적으로도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주신 또 다른 계시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자연계시라고 하여 자연현상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경치를 본다든가 무슨 좋은 일을 만난다든가 하면 다 “과연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발설하게 됩니다. 처음으로 유인 우주선을 타고 대기권을 벗어났던 미국의 첫 우주 비행사가 대기권을 벗어나서 지구를 보고, 온 우주를 보고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과연 하나님은 계시더라.” 물론 소련에서 처음 우주선 타고 올라간 사람은 그랬답니다. “암만 둘러보아도 없더라.” 이것은 시력의 차이가 아니라 신앙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중요한 외적 증거가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십시오. 인류 역사를 보면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과 하나님이 역사를 주장하신다는 것이 많이 증거되고 있습니다.

 

 

 

칼로 흥한 자로 영원히 그 권세를 유지한 자가 없습니다. 칼로 흥한 자는 꼭 칼로 망하는 것을 우리가 역사에서 봅니다. 그렇게 힘을 썼던 바벨론, 앗시리아, 페르시아, 이집트, 로마, 그리스, 나치독일 모두 그것으로 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이 영원한 것이 아니며 이 세상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군데 계시하셨고 우리가 역사를 보면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하나님을 부를 수밖에 없었던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하려고 할 때 일기가 나쁜 것입니다. 그 당시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 장군을 위시해서 참모부에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나머지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밖에 없다.” 인류역사상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대하고 가장 어려웠던 일은 언제나 인간이 속수무책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그때 만일 “이렇치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의 그때 “만일 그렇치 않았더라면”은 인간의 생각과 계획과 동떨어진 것임을 우리가 경험합니다. 6.25전쟁 때 우리가 다 밀려나고 유엔군이 참여하게 되었을 때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리고 거부권을 가졌던 나라 중에 틀림없이 거부를 해야 되었던 소련이 이상하게 참석을 안했습니다. 그 ‘이상하게’가 그냥 ‘이상하게’냐는 말입니다.

 

 

 

리가 역사 속에서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워터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패해서 구라파 역사는 그나마 민주화를 시작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워터루 전쟁을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무어냐 그럴 때 나폴레옹이 배가 불러졌다는 것입니다. 원래 언제나 선두에서 말을 타고 앞장을 서곤 했었는데 그때는 너무 비대해져서 의자에 앉아 망원경으로만 표정을 살피고 저 언덕 위의 능선 모양이 이상한데 저기에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냐 하고 그 동네 농부를 불러다가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거시 상당히 깊은 골짜기가 있었는데 그 농부가 어떻게 된 셈인지 나폴레옹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했는데 전쟁이 터지자 나폴레옹의 기병대가 그 선을 돌파하는데 그 깊고 긴 골짜기를 자신들보다 앞서 달렸던 전우들이 빠져서 메꾸어진 구덩이 위를 달려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워터루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래서 사람은 분명히 다 압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다.” 이것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그 뜻을 거스립니다. 그러니까 신의 뜻을 요구할 때는 언제냐 하면  그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될 때에만 신을 찾고 자기 욕심이 있고 그 욕심에 혹 하나님이 개입해서 반대할 것 같으며 하나님을 절대 찾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갖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서 마땅한 핑계할 수 없는 인간의 악질적인 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이런 격렬한 풀무불의 심판으로 인간에게 형벌을 가하시겠다고 해도 인간이 핑계할 수 없다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를 지금 우리가 본 본문 내용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 하게 되어

 (롬 1: 1-22).

 

 

 

사람들은 고집스러워졌고 죄를 내서 하나님을 반대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과학 문명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법칙을 밝혀낸 학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법칙, 말하자면 바람이 바다위에 불면 밑의 물고기가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이지 인간이나 과학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과학이 무슨 짓을 했느냐 하면 일차적인 하나님의 방법으로 자연을 두려워했던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벼락이란 신의 심판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의 자연현상이다. 가장 높은데 떨어진다. 그래서 교회당도 십자가 위에 피뢰침이 있다. 피뢰침만 달고 있으면 벼락이 제 아무리 높은데 떨어져도 괜찮다. 벼락을 무서워하지 말고 폭풍을 무서워하지 말고 큰 나무나 호랑이나 곰이나 이런 것 앞에 가서 절하지 말라.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그런 것들보다 더 고급한 피조물로 만들었다. 그래서 미신을 몰아내는데 큰 몫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미신 속에 하나님까지 넣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과학을 동원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 믿는 일을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물질이 전부가 아니라는데 대하여 가장 먼저 신경 쓰고 연구를 한 곳은 유물사관이 판을 치고 있던 소련이었습니다. 소련은 자체 내에서 심령과학 연구가 가장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인정을 합니다. 과학으로 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과학 이상이 있다. 초월이 있다. 초월적 존재가 있고 초월적 현상이 있고 초월적 힘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린 과학으로 무엇을 하느냐 하면 아닐꺼야, 아닐꺼야라고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일과 하나님을 믿는 일을 핑계 대려고 합니다. 그래서 믿는 문제에 대하여 대부분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무엇을 동원해서 그 거부하는 것을 변명하느냐 하면 배웠다는 것으로 변명합니다.

 

 

 

제가 다녔던 중학교 때 생물 선생님이 그때는 실력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진화론의 추종자였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 과목을 가르칠 때는 꼭 이렇게 묻곤 했습니다. “여기 예수 믿는 놈들 있으면 손 들어봐” 손들면 “야 예수를 믿냐. 차라리 내 주먹을 믿어라, 임마” 그러곤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진화론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점투성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이미 서구에서는 진화론이 하나의 가설이요 하나의 학설이지 진리가 아니라는 것으로 오래 전에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죽어라고 아직도 진화론을 추종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문명이 낙후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진화론을 믿는 자는 창조론을 믿는 사람보다 더 깬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아주 몰상식한 짓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사회에서도 진화론이 진리가 아니며 너무 과학적인 논리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교과서에 진화론은 넣어도 창조론을 넣는 것은 거부합니다. 그래서 신앙인 학자들이 교과서 내에 창조론을 진화론과 동등하게, 학설이 아닌 가설로라도 넣어달라고 요구를 하는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진화론이 허점투성이이고 틀릴 가능성이 많다고 인정해도 창조론은 가설로도 보아주지를 않습니다. 왜 그런다구요? 인간의 죄의 본성은 하나님을 일부러 거스르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린 어떤 오해가 있느냐 하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확실히 알 수만 있으면 내가 옳은 것을 택한다고 생각하는데 인간의 죄의 본성은 옳고 그른 것 이전에 하나님을 싫어하는, 감정적이고 고집스러운 존재란 것입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4장에서는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의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 5:17-19)

 

 

 

이것이 바로 죄인들의 사고 방식과 행동원칙의 아주 집약적인 설명이 나오는 곳입니다. 허망합니다. 허망하다는 것은 무어냐 하면 일정한 목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정한 목표가 없다는 것은 진리와 절대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허망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허망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발길 닿는 데로 갑니다. 인생의 모습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느냐. 총명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총명이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굴복해야 된다는 것이 어두워졌는데 그것이 굳어졌다고 합니다. 이것을 조심하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틀린 주제에, 틀린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틀린 데다 고집까지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무지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무식한 사람 치고 고집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식한 사람이 고집을 버리면 꼭 자기가 무식하다는 것을 알고 그 무식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공부를 하는데 무식한 사람은 예외없이 고집과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식하다는 것을 변명하고 어쩌고 하다가 끝에 가서 더 이상 변명할 수 없을 때 무어라고 그러냐 하면 “그래 나 무식하다 어쩔래” 그럽니다. 그러면 할 수 없죠.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신자와  논쟁을 벌이다가 혹시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꼭 끝에 그럽니다. “그래 나 지옥 갈래” 그 다음에 할 말이 없습니다. 지옥 가겠다는 데야. 이것이 바로 굳어진 마음입니다. 이것이 참 무섭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는냐 하면 구약성경에 이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을 무어라고 묘사하느냐 하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그럽니다. 왜 그런 꾸중을 듣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 특별한 간섭을 받은 백성입니다. 홍해를 건녔죠. 만나를 먹었죠. 반석에서 나오는 샘물을 먹죠.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았죠. 남다른 기적을 체험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편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면 그것은 이상합니다. 홍해 말고라도 이 양재천이라도 갈라지고 내가 걸어가면 나는 이스라엘보다 신앙이 좋을 것 같죠?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죄란 그렇게 간단하고 단순하지 않습니다. 죄란 훨씬 악질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목이 곧다는 것이 무어냐 하면 의사들의 이야기인데, 인간이 증오심과 분노를 일으키면 제일 먼저 긴장하는 장소가 목이랍니다. 그러니까 고혈압 환자는 성질 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목이 굳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생물 중에서 성질 나면 목이 제일 굳어지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독사죠. 성질 나면 대가리 쳐드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목에 얼마나 힘을 주느냐 하면 코브라를 보세요. 완전히 목이 부풉니다. 사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늘 꾸짖는 것이 무어냐 하면 “야, 내가 너희에게 해 준 것에 비해 너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입 닦고 모른다 해도 할 말이 없는데 왜 늘 독이 올라 있냐?” 그겁니다. 그러니까 죄의 본성이 그렇고 이스라엘, 인류가 그렇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 백성과 뱀이니까 여러분과 상관없어 보이죠? 여러분은 아닌 줄 아세요? 여러분이 걸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신앙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인 경우가 있습니다. 주일날 땡땡이 치고 어딜 가실 일이 있다던가 또 어디 가서 심심해서 고스톱을 친다든가, 물론 죄는 아닙니다. 조금은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 안 되면 등산 갔다가 돌이 굴러서 머리가 깨졌단 말이에요. “그럼 아이고 내가 이거 교회 가는데 안 가서 이렇게 되었구나”라고 하고 돌아오면 괜찮은 수준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무어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 그래 치사하게 땡땡이 한번 쳤다고 돌로 치고 그러기예요” 우린 꼭 그렇게 반발부터 합니다. 금방 뭐하고 하느냐 하면 감정적인 반발을 합니다. 다분히 독사가 됩니다.

 

 

 

우리는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지독한 감정적인 원한을 가지고 덤비는 나쁜 종자들입니다 아까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짓이겨져 마땅합니다. 우리를 유황불에 던져서 우리의 죄값을 받는 것이 싼 것이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쪽에서 보면 밑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짓은 그렇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악당인지를, 지금 에베소서 4:19말씀을 다시 봅시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4:19)

 

 

 

감각이 없어져요. 죄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죄는 지으면 지을수록 점점 더 담대해지고 거기에 드디어 자신이 사로잡힙니다. 대표적인 예로 이것을 보십시오. 여러분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죄인 된 본성과 그 행위들을 신자가 된 이후에도 얼마나 많이 갖고 있고 더 많이 행하는가를 보십시오.

 

 


이 세상을 살다보면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언제나 손해입니다. 그렇죠? 악하게 살로 꾀를 부려야 됩니다. 친구들끼리 모여서 생활을 하다 보면 묘하게 꼭 돈 안 내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식사하고는 나갈 때 꼭 화장실을 가요. 아니 들어올 때 화장실에 갔다 와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나마 속 비우고 들어와야 많이 먹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도 조금 먹는 한이 있어도 돈 안 내려고 돈을 내고 나갈 때 화장실을 갑니다. 그리고는 “아휴, 벌써 냈어”그럽니다. 한두 번 속지 몇백 번을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밤낮 욕합니다. “저 웬수는 치사하게, 비겁하게” 그래놓고는 나중에 무어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렇게 사람은 살아야돼”라고 두둔하게 됩니다. 안 그랬어요? 체면은 잠깐이고 돈을 영원한 것이라구 마누라들이 그러드라구요. “당신 누구 아빠 보세요. 뭐 당신은 치사하게 남자가 돈내기 싫어서 화장실 간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래서 밤낮 요모양, 요꼴 아니에요. 그래서 전세 살잖아요. 그렇게 다부져야 된다구. 얼굴을 철판 깔고 돈 안 내야 돼, 낼 돈 없으면 밥 안 먹으러 가야지 돈 안 내고 자기 집 살 돈 내고 전세 살잖아” 누가 그래요? 집사님들이 그러는 것 아니에요? 우린 모두 그렇게 갑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를 악물고 하나님을 반대하고 자기 손으로 사는 것을 자랑삼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다?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저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합니다. 거기서 우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달라지셔야 됩니다. 정직하게 사시고 사람에게 놀림당하는 것을 감수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만족하셔야 됩니다. 누가 뭐래도 좋다, 하나님만 좋아하신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아무래도 좋고 난 사람한테 괄세받는 것은 못 참아!” 이것이 무슨 신자입니까? 오늘날 이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로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목에 힘주고 뻔뻔스럽게 사신다면 그 진노의 대상인 줄 아셔야 됩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그 죄로부터 구출 받은 자들입니다. 달라지셔야 됩니다. 달라지시라는 것은 윤리와 도덕적인 요구가 아닙니다. 우리의 복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행복입니까? 남의 것을 뺏는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어렵게 살아도 하나님이 내 편이요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그것이 복입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자랑입니다. 남이 “아이구 그렇게 살아서 어떻해” 그러면 웃으세요. 싸우지 말고 “어휴, 어쩜 그렇게 똑똑하세요. 저는 어쩌면 이렇게 바보 같죠” 그리고 잊으세요. 그렇게 하는 겁니다. 고치세요. 신자답게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난 자, 의와 거룩으로 부름을 받은 자, 빛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자들로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세상에 지지 말고 살기로 다짐하고 약속하고 결심하고 그리고 시작하십시다.

 

 

 

 

 

로마서 10강(롬1:18-19절) 불경건과 불의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 안에서 해결하사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제 따져 보아야 되는 것은 그 구원을 얻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고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없다는 성경의 주장에 대한 어떤 확실한 증거들을 납득해야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를 믿지 않으면 왜 안 되는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서지 않으면 왜 안 되는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서지 않으면 왜 안 되는가 하는 것들을 성경이 주장하는 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예수를 믿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 씻음 받은 것을 다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설명하는 가장 깊은 내용들은 신자들에게도 잘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을 압니다. 

 

 

 

18절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데 쉽게 이야기해서 죄인들에게 임합니다. 저들의 죄목이 무어냐 하면 뒤에 있는 바와 같이 경건치 않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은 죄 이상으로 그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의 조건을 죄목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경건치 않은 문제보다 불의에 대하여 훨씬 민감하고 신앙생활도 이 불의에 대한 상황이 어떠한가로 기준을 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이 주장하는 것은 불의해진 것, 죄를 짓게 된 것, 죄를 지어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 것을 먼저 심판의 조건으로 더 크게 부각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불의한 것은 성경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경건치 않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이야기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본질이 무어냐? 죄의 죄된 내용의 진수가 무어냐 그럴 때 불경건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자가 되어서 분명히 해야 되는 것은 죄인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지 여러분이 무엇을 했느냐의 문제는 이차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불경건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 인간의 전체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그래서 불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소원하지 않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는 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들을 질문 형태와 답으로 모아서 요약하여 가르치는 책으로 소요리 문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세례를 받기 위하여 최소한의 믿는 바 교리들을 요약한 것을 공부할 때 이 소요리 문답을 가지고 공부를 하시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질문이 이것입니다.

 

 

 

그 제일 첫 번째 질문이 무어냐 하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냐?”하는 것입니다. 그 답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원토록 그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문구가 여러분에게 낯선 표현이라는 것을 아시겠죠? 하나님이 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내용과 목표와 대상으로 삼아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여러분이 결혼할 때가 되고 연애를 하게 되면 연애를 할 때는 뭐가 씌우는 것 아닙니까? 씌우지 않고서야 어떻게 같이 살겠습니까? 그 씌웠을 때는 상대방이 코를 풀면 그래도 좋고 감기가 걸려 기침을 하면 유명한 성악가가 소리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같았던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물론 저도 그 병에 걸려서 제 아내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그 사람이 돈을 얼마나 가진 집안의 사람인가? 그 사람과 결혼하면 음식을 잘할 것인가? 애를 잘 키울 것인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면 무조건 좋았던 것입니다. 눈을 감으면 감아서 이쁘고 뜨면 떠서 이쁘고 덧니가 나 있으면 덧니가 이쁘고 그렇습니다.  쪘으면 쪄서 좋고 마르면 말라서 좋고 키가 작으면 작아서 좋고 크면 커서 좋았던 기억이 나십니까? 성경은 바로 이것을 경건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사랑이라는 말 외에 표현할 수 없는 관계로 묶여진 것, 이것을 성경은 경건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끊어진 다음에는 불의한 짓을 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만 생명이 오고 진리가 오고 지혜가 오며 의가 오고 선이 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단절된 인생은 혼자서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란 무어냐고 할 때 열심으로 목숨을 걸고 갈급하게 하나님을 소원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욕심에 대한 자족이 아니라 스스로 혼자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말로는 보통 인본주의라고 부릅니다. 이 죄의 본질을 창세기 3장에 인류가 최초로 범죄하는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1-4).

 

 

 

이것이 인류 최초의 범죄 현장입니다. 죄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무어냐 하면 사탄이 와서 인류를 꼬일 때 "저것을 먹어라.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것을 먹어라" 할 때 그것을 먹도록 마음에 충동을 일으키는 동기를 부여하는 내용이 무어냐 하면 "저것을 하나님이 못 먹게 한 것은 그것을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과 똑같이 되기 때문에 못 먹게 한 것이다" 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은 불공평하다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한 분이 아니며 너희 편을 드는 분이 아니라고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저것을 금지시킨 것은 너희가 그것을 했을 때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오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꼴을 보기 싫어서 그것을 못 먹게 하고 그것 외에 나머지는 다 양보한 것이다. 여기에 덜컥 걸린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본성으로서 여러분이 다같이 갖고 계시는 공통적인 내용이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믿지 않는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줄 때, 어떤 좋은 말을 할 때 상대방들이 우리가 전하는 기독교 내용에 대해서 혹은 우리의 태도에 대하여 무어라고 그럽니까? "저 사람들이 다 무슨 속셈이 있어서 저러지 왜 맨 정신으로 저렇게 하겠는가?" "저렇게 처음에는 좋은 말로 해놓고 죽을 때까지 헌금 뜯어먹으려고 그러지" 이것 아니면 그 다음에 무어라고 그럽니까? 공짜로 주는 것이 다 비지떡이지 좋은 것이 어디 있냐고 합니다. 이 마음이 우리에겐 본성적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무어라고 비난을 합니까? "무슨 약점이 잡혀서 안 나가면 안 되느냐. 아니, 그렇게 무서워, 소심해, 꼭 무슨 종교 같은 데 의지해야 돼!"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담력이 있는 것이요, 떳떳한 것이요, 독립심이 있는 것이요, 무슨 종교를 가지는 것은 사람이 비굴한 것이요, 의타심이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어떤 신을 믿는 것이든 신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공연히 연약하니까 심리적인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지 그것을 그렇게 부추켜서 종교인들이 자기 먹고 살려는 것이지?” 이것 아닐까요. 우리가 지금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죄의 본질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에게마저도 복종하기 싫은 마음입니다. 자기 문제는 자기 혼자서 해결하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헬레니즘으로부터 출발된 그것이 좋게는 과학문명을 낳았습니다만 인본주의를 만들어낸 사상이 다름 아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내가 책임을 지겠다. 그 결과가 재난이라 할지라도 내가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지겠다 는 이것이 인본주의적 사고를 하는 사람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진 교만입니다,

 

 

 

불난 집에 불이 붙어 들어오는데 “치사하게 불 무서워서 내가 뛰어 나가란 말이냐. 양반은 죽어도 개헤엄은 안 치는 법이다. 치사하게 불 같은 것 피해서 나가는 것이 자랑이냐, 나는 그냥 타 죽겠다.” 그것을 가지고 용기라고 안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문제에만 오면 그리고 이 기독교의 문제에만 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것을 죽어라고 싫어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신앙도 잘 보시면 이런 식으로 삐쳐 나가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할 때 아주 다급한 문제가 있어 구하러 올 때 “하나님 이 아이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 혹은 “이 아이를 학교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무엇을 제시합니까? “그래도 공짜로 해달라는 것은 아니에요. 이것만 들어주시면 저도 이런저런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이거야말로 가장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애걸하지 마시고 떳떳이 그러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제 부탁을 들어주며 제 편이 되어 주겠습니까?” 그렇게 오시는 것이 신앙의 참된 자세입니다. "해주신다면 저도 이것으로 갚겠습니다"이것은 나쁜 것입니다. 신앙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쪽이 훨씬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죄의 본성이 있고 그 죄의 본성과 본질은 하나님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하나님과 동등하려는 못된 독립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만 의와 생명과 진리와 영원한 것과 복된 것과 참된 것이 옵니다. 그를 떠나서 사람은 의도 선도 아닌 어떤 유익한 짓도 하지 못합니다. 나머지 모든 것은 자기 치장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 전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 신자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압축시켜 보면 그 모든 율법은 결국 이 내용을 가집니다. 구약성경을 하나로 줄여서 이야기할 때 율법과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더 한마디로 할 때는 선지자를 빼고 율법서라고 합니다. 이 율법의 내용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제사법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실천법입니다. 사회법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법에 앞서서 언제나 제사법이 우선됩니다. 그리고 장황하고 깁니다. 여러분 성경을 한번 읽기로 마음을 먹고 창세기, 출애굽기 순으로 읽을 때 어디 오면 늘 그만 둡니까? 레위기에서 그만두죠. 책을 넘길 때마다 무슨 제사를 드리고 그 제사를 드릴 때는 어떻게 해야 되고 어떻게 몸을 씻고 어떻게 피를 흘리고, 어떻게가 짧지도 않습니다. 한없이 길도록 밤낮 그 이야기만 하다가 민수기에 오면 밤낮 사람 숫자 세다가 날셉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척 중요한 책이기 때문에 그렇게 앞서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출애굽기라는 것은 종 되었던 애굽에서 탈출한 것입니다. 탈출해서 어디로 가야 되는 싸움이냐 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가는 기록입니다. 그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면 꼭 지켜야 되는 것이 무어냐 하면 율법의 첫 요구, 하나님과 어떻게 정상적인 관계를 맺느냐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 땅에 들어가서 살지 못합니다. 우리 의를 행할 수 없고 선을 행할 수 없으며 하나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명령을 받아야 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려면 제사법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죄 지은 것을 씻으며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하는가? 속죄제, 화목제 이런 것들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어야 비로소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1-6).

 

 

 

이번엔 저주의 약속을 봅시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 28:15-19).

 

 

 

똑같은 내용인데 완전히 뒤집어져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복받고 저주받는 것의 단 하나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의 순종 여부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그의 편이 되고 그와의 관계가 정상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과 저주는 내가 착한 일을 했느냐, 악한 일을 했느냐의 결과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했느냐, 안했느냐의 싸움입니다. 이것을 경건이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경의 서신서들을 보십시오. 우리가 오늘 보고 있는 로마서 1장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6-7).

 

 


성도에게 편지를 하는 것입니다. 이 성도는 의롭기 때문에 성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해서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1-3).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고린도전후서를 읽어 보시면 고린도교회에는 무척 심각한 잘못이 있었습니다. 음행을 범하는 자들이 있었고 분쟁이 있었고 말도 안 되는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신자들의 특성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즉 의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성도라 부르고 거룩하여진 자라고 그럽니다.

 

 

 

성도’에게서 경건하다든가, 거룩하다든가 성도라는 것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했느냐,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느냐보다 인간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과 화목했느냐?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느냐 되지 못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신자가 불신자보다 삶의 모습이 더 잘못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데 손가락질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치사한 성도고, 예수를 안 믿었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데 거룩하게 사는 참 위대한,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만났을 때 그들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오해하고 있느냐 하면 “예수 믿는 것들이 왜 그래?” 그러면서 의롭다 안 의롭다는 따집니다. 성경이 따지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아느냐, 그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느냐 안하느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만 빼놓고 하나도 쓸모 없는 신자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 하나, 그것도 잘 믿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 모든 데에서는 무엇을 하든지 순악질적으로 하고 무엇이든지 밉게 굽니다. 그러나 그는 성도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천국 갑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표현대로 하면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어도 천국 갈 사람이야 하는 그런 사람들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이것을 구별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의라는 것은 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의란 하나님을 알아야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보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기 위하여 내가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의라고 하지, 그가 얼마나 정직하냐 그가 얼마나 남을 위해서 희생했느냐가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행하는 의, 하나님 없이 행하는 윤리와 도덕은 전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자기 과시입니다.

 

 

 

여러분 옛날 군자라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옛날의 군자상은 남에게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오해받은 것까지도 자기 책임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완전주의입니다. 아무에게도 욕을 먹지 않고 모든 사람을 항복시키는 자기 고양책인 것입니다. 자기 잘난 것을 온 천하만민에게 증명해 내고야 말 싸움입니다. 거기에는 생명도 없으며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도 없습니다. 욕을 먹지 않고 칭찬을 받는 모든 것의 결국, 궁극적인 목표가 자기 자신에게서 끝나는 것입니다.                              

 

 

 

신자의 의라는 것은 나의 존재를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이 의이고 성실이고 사람사는 가치이고 책임이라 그럽니다. 그것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필요하다면 나서기도 해야 되고 잘난 척도 해야 됩니다.

 

 

 

어떤 교인이 저에게 물어왔습니다. "목사님 자꾸 나서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제가 여기서도 입을 다물고 있고 모든 곳에서 입을 다물고 있는데 정말 보다 못해서 이것은 이렇게 좀 하면 좋겠다 싶어 내가 어떤 일을 좀 열심히 했더니 누가 이런 지적을 합니다. ‘당신 그것은 신앙이 아니고 교만이야' 어디까지가 교만이고 어디까지가 겸손인 줄을 모르겠습니다". 교만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도무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정말 겸손입니까? 이렇게 전화를 해 왔습니다

 

 

 

제가 이런 답을 드렸습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과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면 교만하십시오. 그리고 교만하다는 욕을 먹으십시오. 여기가 바로 갈림길입니다. 그러니까 왜 교만 안 하려고 그럽니까? 내가 욕을 먹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이미 교만입니다. 교만 안 하려고 겸손떤 것이 교만이란 말입니다 모든 초점은 어디로 가야 되는 겁니까? 내가 이 일을 해서 욕을 먹더라도 하나님께 유익이 되고 신자 모두에게 유익이 나누어지는 것이라면 그 미친 짓을 하십시오. 내가 나를 치장하기 위해서 나를 보호하고 어떻게 욕을 먹지 않느냐를 궁리하는 것이라면 이미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의를 구하는 자가 아닌 것입니다.

 

 

 

이 의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모세 시대의 산파들이 거짓말을 하고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거짓말이 왜 칭찬을 받았습니까? 하나님 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기생 라합이 나라를 팔아먹고도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은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 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율법의 핵심은 마태복음 22장에 예수님께서 친히 율법의 대강령을 이렇게 요약하십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함을 바래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4-40)

 

 

 

율법과 선지자는 무엇을 지칭하는 것입니까? 구약성경 전체를 율법과 선지자라고 그럽니다. 선지자의 대강령, 가장 중요한 요점이 무어라구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렇게 이야기하지는 마십시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불경건한 자가 되지 말라. 하나님과 남이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속해야 됩니다. 이것이 언제나 시급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무엇이 나오느냐 하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나옵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선행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두 번째를 해서 첫 번째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는 무업니까? 첫째되고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 어떻게 사랑하라구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목마른 것이어야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같이 모든 신자들은 그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갈급한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를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경건함입니다. 물론 그것이 하나의 형태로, 실천으로 나와야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원인은 이것밖에 없고 그 근거는 여기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 일어나는 모든 도덕과 윤리, 어떤 의와 선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자기 치장이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 가치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의와 선을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은혜와 진리와 모든 선한 것의 유일한 근거자입니다. 그분 없이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이 온 우주 만물 속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문제가 오해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신앙도 그렇고 세상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여러분이 늘 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공격할 것이 없습니다. 경건함을 제껴 놓고서 의로움을 논하는 것은 공부하지 않고서 좋은 성적받겠다고 하는 우리 아들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의로움과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불의함은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이고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진노의 첫 번째 대상이 된다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는 벌 받을 이유가 없다. 나는 정직하게 산다. 나는 거짓말한 적이 없다. 나는 도적질한 적도, 살인한 적도 없다"라는 말만큼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주제에,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생명도 받지 못한 주제에 무엇을 행치 않았다는 이유로 자기는 '벌 받을 이유가 없다'고 하는 것은 여태껏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시며 생사화복이 그의 손에 있다는 것을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부인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나는 정직하게 행했으니 천국에 들어가야 된다.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으니 복을 받아야 된다"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너희는 내게 돌아오라"입니다 우리가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이사야 1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한탄이 무엇입니까? "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도 그 주인의 구유를 안다. 그런데 이 백성은 어찌하여 나를 모르는가?” 하나님의 한탄입니다. 너희를 지었고 너희에게 모든 복된 것을 유일하게 줄 수 있는 나를 버리고 왜 점점 더 매맞을 짓을 하는가, 왜 저주와 재난의 길로 가고 있는가? 돌아오라!

 

 

 

내 손으로 껌팔이 해서 먹고 살겠다. 치사하게 엄마 아빠가 해주는 옷 안 입겠다는 것이 독립심이십니까? 이 문제에서 인간은 무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심해야 될 아주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과 세상 사람의 공격이 바로 이런 시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없이 되는 일을 도모하지 마십시오.

 

 

 

이 문제는 Y.M.C.A라 Y.W.C.A가 저지른 실수가 많습니다. 물론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Y.M.C.A나 Y.W.C.A가 기독교 단체가 아니라면 전 인정을 하겠습니다. 하는 일에 긍정적인 면은 인정하겠습니다. 건전한 사회생활을, 건강한 소시민을 키워 내는 일에 분명히 사회적인 어떤 유익과 일익을 담당했던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Y.M.C.A나 Y.W.C.A는 누구나 다 알듯이 기독교 단체입니다 그 단체의 가장 큰 약점은 하나님과 화목되는 일을 전제로 하지 않고 불의한 일을 없애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십자가의 필요성을 인정치 않고 자기의 죄인된 것을 인정치 않고서, 회개하지 않고서 의롭게 사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이 당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상대방이 왜 이렇게 극악무도하게 구는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할 때 언제나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명령 앞에 그 영혼이 깨지기까지는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초등학생을 데려다가 돈을 달라고 해서 주지 않으면 죽일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모든 인간에게 있는 공통된 현실적 위치입니다. 우리는 더 낫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양심을 소생시키시고 영혼을 중생시키셔서 의와 거룩과 선을 감당하게 됐고 그 힘을 공급받기 때문에 그렇지 않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도 저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누구를 칼로, 총으로 쏴 죽인 적은 없지만 우리의 입으로 무수한 사람을 죽였고, 우리의 마음으로 무수한 도적질을 한 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정체입니다. 우리는 남보다 낫다고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됩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일로 우리를 몰아가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불의를 행하는 데 대해서 지지 않아야 됩니다. 내가 의롭게 사는 것으로 복을 빌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는 것으로 내 인생을 뒤집어 볼 수 있어야 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바벨론 왕에게 절을 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바벨론 왕은 신이다. 그 신에게 절하라." 다니엘과 세 친구가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 어떤 신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 너희를 저 풀무불에 넣겠다." 용광로에 넣겠다는 말입니다. 세 친구가 무어라고 대답했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저 극렬한 풀무불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 하신다할지라도 우리는 왕께 절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닙니까?

 

 

 

우리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의 모든 삶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해 내려는 것들과 싸워 이 관계성을 더 돈독히 하고 깊이 있고 살찌게 하는 것보다는 이러한 모든 일에서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했습니까? 제가 다른 것을 할테니까 이 일을 면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식을 대학에 들어가게 한다든가 세상에서 남보다 더 잘 살기 위해서는 영혼을 팔아 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와 관계 문제가 아니라 이 복권이 당첨되면 절반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불신앙입니까?

 

 

 

욥은 어느 날 갑자기 재난을 당합니다. "하나님 왜 이런 재난을 당합니까? 제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하나 분명히 아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왜 당하는지 모르지만 이 길을 하나님이 정하셨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므로 결국 나를 정금같이 만들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아십니까? 안다면 "하나님 앞에 이것을 내놓을 테니까 이것을 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는 싹 없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문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여러분과의 관계를 더 깊이 하고 세상의 방법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여러분은 훈련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건한 문제를 놓쳐 버리면 불의한 자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 때문에 우리도 불의한 방법을 써서라도 욕심내는 것을 이루겠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팔아먹습니다. 영혼을 팔아먹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 “하나님 칼을 주십시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성을 깊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흔드는 모든 시험은 결국 그것입니다.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를 깨는 유혹입니다.  지지 마십시오. 그리고 모든 저주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묶여 있으셔야 됩니다. 그의 거룩과 자비와 은혜와 긍휼과 오래 참으심에 동참하셔야 됩니다. 악에게 지지 마시며 거룩한 것을 앞세워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것이 되도록 연습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을 외면한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며 목숨을 다해 그를 편들며 그를 뒤좇기 위하여 자기를 채찍질하는 경건의 연습이 있어야 됩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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