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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4강) 시편 23:1-6 여호와는 나의 목자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5:56

 

 

 

 

 

 

 

 

 

(24강) 시편 23:1-6  여호와는 나의 목자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 23:1-6)

 



<설교>


여러분은 지금까지 시편 23편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셨습니까? 혹시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시면 나의 인생은 모든 일이 순탄하게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지는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본 시편을 그런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신자 스스로 신앙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목자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인생이 잘 풀려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목자로 여기면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산다고 해서 인생이 잘 풀려간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엄격한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시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분명 잘 풀려갈 것입니다. 이것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고 분명한 확신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풀려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이 잘 풀린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십니까? 세상이 말하고 기대하는 것처럼 하고자 하는 일이 잘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잘 풀린 인생의 마지막은 무엇입니까? 또한 인생이 생각하는 것처럼 풀리지 않고 꼬이기만 한 사람의 마지막은 무엇입니까? 결국 잘 풀린 사람이든 잘 풀리지 않는 사람이든 마지막에는 ‘죽음’ 이라는 끝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죽음의 끝에서 인생이 잘 풀렸다, 잘 풀리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혹 인생이 잘 풀린 사람과 잘 풀리지 않는 사람의 죽음 이후가 다르다면 인생이 어떻게 풀려 가느냐는 것은 분명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인생 문제는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의 저의 말을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동감하신다면 23편을 인생이 순탄하게 잘 풀려가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항상 우리의 욕심이 문제입니다. 욕심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고 전달되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대해 소경이 되게 하고 귀머거리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말씀을 자기 욕심에 꿰맞춰서 해석하다보니 하나님은 마치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육신의 모든 것을 채워주기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여기게 되고, 또 그런 하나님으로 함께 하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하는 내용부터 그러합니다. 대개 이 구절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시면 나의 삶은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질 것이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지나친 환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환상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설사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매일 같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신다고 합시다. 과연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자기를 바라보면서 매일 자기에 대해 목말라하며 살아갑니다. 자기에게 채워진 것을 바라보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고, 비교할 때 자신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채워져 있는 사람을 보면서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매일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신다고 해서 과연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는 고백을 할 것이라고 여깁니까? 물론 한 순간에 그런 고백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뭄에 내리는 이슬비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라질 것에 불과합니다. 금방 또 다시 다른 것을 기대하는 욕심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절의 내용은 ‘여호와가 목자시니 앞으로 내 인생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즉 미래에 대한 기대와 소원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나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 시를 지은 다윗은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3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절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구절입니다. 대개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구절보다는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구절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말의 의미에 더 중요성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여러분에게 여호와가 목자이십니까? 목자라는 것은 단지 양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초장으로 인도해주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양을 다른 맹수로부터 지켜주는 역할을 하면서, 잠시라도 양에게서 관심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양은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갑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로 인해서 아무 염려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목자를 따라가는 양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목자에게 모든 것을 의존합니다. 설사 목자가 인도하는 길이 자갈길이고 비탈길이라고 해도 안심하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목자가 자신을 해로운 길로 인도하지 않을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부른다면 과연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고 모든 길에서 염려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갑니까?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고 하면서도 그 목자의 자리에 혹시 돈이 있고, 자존심이 있고, 권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여호와가 목자가 아니라 실상은 돈을 목자로 삼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속내를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진심으로 여호와를 목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양으로 살아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기를 막연하게 기대하면서 쥐꼬리만한 신앙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관심이 육신에서 벗어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의 자신에게 집착할 뿐, 하나님 나라에서의 자신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생존에 매달려 살아갈 뿐이지 영혼이 잘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인도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의 현재에 대해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기쁨의 노래가 나올 만큼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까? 이 기쁨의 노래가 있으려면 무엇보다는 하나님의 인도를 신뢰해야 하고, 지금 현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인도로 믿어야 합니다. 무조건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목자 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디로 인도하는가를 앎으로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곳으로 눈을 바라봐야 하고 마음이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지금 현재가 어떻든 상관없이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노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2절의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는 구절도 욕망의 눈으로 생각하게 되면 ‘푸른 초장’은 내가 원하는 육신의 것으로 가득한 곳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처럼 육신의 것을 풍성하게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여러분의 목자이시고, 목자이신 하나님은 양을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면 여러분은 지금 푸른 초장에 있어야 하고 쉴만한 물 가로 인도 받았어야 합니다. 20년을 믿고 30년을 믿었는데도 여전히 푸른 초장으로 인도받고 있는 도중이라면 그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것은 2,30년을 믿어오면서 지금껏 여호와로 인한 기쁨은 누려보지 못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가 이런 신앙의 형편에 처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를 목자로 고백하면 신자면서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향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의 길을 가고 있었다는 결론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양을 인도하시는 푸른 초장은 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는 말씀에서처럼 목자 되신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소생되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육신을 위한 길이 아니라 영혼이 영원히 사는 생명의 길로 자기 양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길이 의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써 우리가 사는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자기 이름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백성을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의의 길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는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내 영혼이 소생되기 위한 의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인도만 따르면 되는 양의 입장에서는 양이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의가 되신 그리스도만으로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다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는 기쁨의 노래 또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목자가 함께 하시는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인들 두렵겠습니까?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처한 형편이 어떻든 의심할 수 없는 것은, 우리는 영혼이 소생되는 의의 길로 인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의 삶의 형편이 비록 남보다 못하고 고생과 어려움으로 가득하다고 해도, 그 모든 것조차도 나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5,6절)는 노래가 가능한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표현은 그야말로 넉넉하고 풍족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아 살 때 주어지는 평안인 것입니다.

 

 

 


오늘 이 노래가 여러분의 노래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목자 되신 여호와가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우리를 인도하시는 푸른 초장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푸른 초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죽은 자에 불과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영혼이 소생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혼의 소생에 마음을 둔 신자만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노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노래가 여러분의 기쁨의 노래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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