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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2강) 시편 21:1-13 왕의 기쁨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5:57

 

 

 

 

 

 

 

 

(22강) 시편 21:1-13  왕의 기쁨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셀라)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인자함으로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네 손이 네 모든 원수를 발견함이여 네 오른손이 너를 미워하는 자를 발견하리로다 네가 노할 때에 저희로 풀무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로 저희를 삼키시리니 불이 저희를 소멸하리로다 네가 저희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저희 자손을 인생 중에서 끊으리로다 대저 저희는 너를 해하려 하여 계교를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네가 저희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 (시편 21:1-13)
 

 

 


<설교>


성경을 보면 오직 그리스도로만 살았던 사도들의 기쁨은 오늘 우리들이 추구하는 기쁨과는 질적으로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기쁨은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온통 세상적인 것이 기준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식이 공부 잘하고, 돈 잘 벌고, 하는 사업이 잘되는 것들로 기쁨을 삼고 또한 그런 기쁨이 계속되는 것을 인생의 행복으로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사도들의 기쁨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식의 문제를 언급하지도 않았고, 돈 버는 이야기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만을 언급하면서도 세상이 전혀 알지 못하는 기쁨을 마음껏 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기쁨은 그 기쁨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다른 불행이 오게 되면 당장 사라지고 대신 불행으로 인한 낙심과 걱정과 염려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기쁨은 옥에 갇히고 매를 맞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이상한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사도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보고 살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말하지만 정작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신자로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합니다. 믿음이 믿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흘러갈 뿐 삶에서 사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데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욱 소망하고, 천국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죽음이 두렵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이며, 그 믿음이 신자를 어떤 삶을 살도록 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럴 때 나 자신이 참된 믿음의 길에 있는지 아닌지를 점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즉 승리의 기쁨의 노래인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승리의 기쁨의 노래는 통상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왜 기뻐하겠습니까?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이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기쁨이 지속되지 못하는 기쁨인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뻐한다면, 나중에 패배했을 때는 기쁨 대신에 슬픔만 남게 됩니다. 또한 승리의 기쁨도 지속적이지도 않습니다. 조금 지나면 승리의 기쁨 또한 반감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즉 기쁨의 정도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사그라지는 것입니다.

 

 

 


여자 테니스 선수 가운데 세계 최고로 여기는 선수는 ‘나브라 틸로바’입니다. 그런데 이 선수를 ‘만들리코바’라고 하는 신인 선수가 이긴 적이 있었습니다. 세계 정상의 선수를 이긴 후에 기자가 소감을 물었을 때 ‘마치 전 세계를 가진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기자가 그 느낌이 얼마나 갔는가 물었더니 ‘한 2분쯤’이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 세계를 가진 것 같은 기분이라면 말 그대로 최고의 기쁨을 만끽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약 2분쯤 지속되는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 너무 허망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전 세계를 가진 것 같은 기쁨이라면 적어도 며칠은 잠 못 자고 뜬눈으로 지샐만한데 겨우 2분간 반짝하고 말았다는 것은 세상에서 얻어지는 기쁨이라는 것이 그렇게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지속적이지 못합니다. 순간은 모든 소원이 다 채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겠지만 잠시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소원이 마음을 비집어 들어오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허망하고 헛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세상에서 박수 받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의 기쁨 역시 같습니다. 단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만 생각한다면 그 기쁨은 지속적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왕의 기쁨은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1절을 보면 왕은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이다”고 노래합니다. 왕은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승리했다는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뻐하는 것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모두가 기뻐하게 하는 일이나 슬퍼하게 하는 일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로 인해서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것일 뿐이지 그런 일들을 있게 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왕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기쁜 일이 있으면 기쁜 일이 있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슬픈 일이 있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하나님이 있게 하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힘과 도우심과 지키심과 함께 하심을 발견하면서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여호와로 인해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의 힘과 주의 구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연약한 우리를 붙들어서 생명의 길로 쉬지 않고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일에서입니다.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만이 나의 힘이라고 고백하는 것부터가 하나님의 승리의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붙드시고 그 심령에 성령이 거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된 힘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고 바라보게 하심으로써 세상의 것을 힘으로 여기던 우리가 그리스도를 힘으로 고백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승리인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신뢰하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지만 신자만큼은 그 피를 가장 귀하다고 고백하고 찬송하는 것이야 말로 주의 힘과 주의 구원이 나에게 함께 한 결과인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셀라)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신자가 생명의 나라에 소원을 두고 산다면 그 소원의 마음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하지 않으시는 것도 자기 백성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자에게는 모든 것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즉 신자가 잘해서 하나님께서 그 대가로 주시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과 자질로 잘한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잘한 것이 없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를 그럴듯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그 결과로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하나님의 일을 신뢰하지도 믿지도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자기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려면 세상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에 모든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 마음을 두게 되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좋은 일이 있을 때만 잠깐 느낄 뿐 그렇지 않을 때는 아예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는 감지조차 못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참된 기쁨을 맛보고자 한다면 항상 그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이 내가 죽으면 다 끝나버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라는 것도 잠시 잠간 동안 누리는 것에 불과할 뿐, 죽으면 모두 사라질 헛된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영원한 세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피 흘려 죽게 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구원과 생명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기쁨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승리의 기쁨은 세상에서 타인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진정한 승리는 주의 힘과 주의 구원에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으시고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것이야 말로 신자의 진정한 승리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승리의 기쁨은 주께 있는 것입니다. 주가 곧 승리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왕을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심으로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영영토록 지극한 복이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영영토록 지극한 복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이 복이 주 앞에서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어 살아가는 신자야 말로 하늘의 지극한 복을 누리는 신자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기쁨과 즐거움을 소원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귀한 복을 알게 된 자로서 세상이 구하지 않은 것을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죄의 사함을 얻고 허물의 가리움을 입은 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은 것보다 더 귀한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잠시 동안의 느낌으로 끝나지만 하나님이 베푸신 지극한 복은 신자의 심령에서 잔잔한 기쁨으로 멈추지 않고 흐를 것입니다. 이런 기쁨에 있는 신자는 어떤 형편과 상황에서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의 힘으로 인해 기뻐하고 주의 구원으로 인해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의 힘이 기쁨이 되기 바랍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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