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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3강) 시편 22:1-31 버림 받음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5:57

 

 

 

 

 

 

 

 

 

(23강) 시편 22:1-31  버림 받음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찌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찌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찌어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찌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시편 22:1-31)

 


<설교>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받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항상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사랑에 인색하셔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을 풍성하게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주시기 때문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을 공평하신 분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조건과 결과에 따라 차별 대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사람에게 주어진 조건이라는 것도 하나님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일을 하던 적은 일을 하던 그것 역시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조건과 결과에 따라 차별 대우하신다면 하나님은 공평하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이미 풍성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사랑을 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원하는 사랑은 세상의 것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것으로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풍성한 사랑의 증거로 확증된 예수님의 십자가로도 그 마음이 충족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확증된 사랑이 사망에 처한 우리에게 어떤 사랑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사랑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이 충족된다면 신자는 사랑 받기를 원하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사랑 안에서 감사하며 구원의 노래를 부르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돕지 아니하시고, 고통의 신음 소리도 듣지 않으시는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버림 받음은 예수님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의 버림 받음의 경험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왕으로 오실 메시야가 겪을 경험을 미리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한 다윗을 버림 받음을 경험하는 고난으로 인도하셨고, 영원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 역시 버림 받는 자리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도 예수님도 버림 받음을 경험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여전히 내 하나님으로 일컫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고난의 자리로 이끌어 가신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처한 형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고 해도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때문에 1절의 말은 원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다윗이 한 말을 하셨는데,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을 원망하여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것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원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와 같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버림 받으심은 예수님 한 개인의 버림 받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의 대표자로서 우리가 곧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임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버림 받음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저주 아래 처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저주 받으신 예수님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할 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의 버림 받음에서 나의 버림 받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다윗이 버림 받은 자로서 알게 된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한 대로 본문은 버림 받은 자의 구원의 노래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구원의 노래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은 다윗처럼 버림 받음의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다윗과 똑같은 경험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윗은 1절에서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자신의 모든 고통을 외면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을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신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는 고백처럼 아주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버림 받음의 경험입니다.

 

 

 


또한 12-18절의 내용에서도 다윗은 대적들에 둘러 싸여서 고난을 받고 조롱을 받는 처지를 말합니다. 특히 16-18절의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는 말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는 수치를 그대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께 나올 때 이러한 버림 받음을 경험한 자로 나오십니까? 사실 우리의 삶이 풍족하다보니 버림 받음에 대해 생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버림 받음에 대해 생소하기 때문에 다윗과 같은 구원의 노래가 나올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말한 대로 버림 받음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다윗과 같은 경험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애당초 인간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생명나무로부터 멀어지게 하시고 죽음에 처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실상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고 인간은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인데 우리는 이러한 실상을 잊어버립니다. 마음 놓고 예배당에 나가서 기도할 수 있고, 어느 때 어느 장소건 상관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버림 받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잊고 사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 또한 가벼이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나오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관계에 있지도 못하고 그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하나님은 햇빛과 공기와 물을 주시고 살게 하십니다. 이것조차도 ‘웬 은혜입니까?’라는 감사의 고백이 있어야 정상인데 과연 우리에게 그러한 고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탱하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는 고백처럼 철저하게 낮아짐을 경험하게 되면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 신자에게는 큰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버림 받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어떤 고난과 어려움에 처했다고 해도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고 계시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설사 고난과 어려움이 평생토록 계속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영원한 멸망에 갇히는 것이 마땅한 자신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일이야 말로 크신 사랑과 은혜임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형편을 초월하여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22,23절의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찌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찌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찌어다”라는 구원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찌어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처럼 먹고 배부를 자는 겸손한 신자입니다. 즉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로서 자신을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는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자신에게 넘치고 풍성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임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에 그 은혜와 사랑으로 배부를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배부름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노래인 것입니다.

 

 

 


여호와로 인한 배부름을 누리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모든 욕망을 내려놓으시고 저주를 받고 사망에 처해야 마땅한 버림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대신 저주를 받으신 예수님의 버림 받음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그 무엇도 버림 받은 여러분을 구할 수가 없으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여러분을 생명에 있게 한다는 것을 조용히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조용히 채워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노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사람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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