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강) 시편 19:1-14 다윗의 소원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설교>
다윗의 이러한 고백은 바울이 십자가 복음을 설명한 내용과 같습니다. 바울이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롬6:17,19)고 고백한 것처럼 다윗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자기에게 전혀 가망이 없다고 실토한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 출발은 오직 십자가 복음입니다.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의의 길을 갈 수 없으니 이제는 오직 주님의 긍휼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신앙이 이것과 다른 것으로부터 출발했다면 아무리 예수를 열심히 믿어도 헛수고입니다. 단지 여러 종교 중에 기독교를 택해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결단하고 헌신하는 것은 기독교인이라는 종교인이 된 것에 불과하지 아직 예수님의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가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죄를 죄로 보지를 못합니다. 때문에 죄에 붙들려서 죄의 종노릇하고 있는 자신의 실체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이로 인해서 나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조차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해와 달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합니까? 아마 별 생각이 없을 것입니다. 단지 여름이 되면 햇볕이 너무 뜨겁다는 불평이 나오고, 겨울이면 좀 더 따뜻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는 것이 거의 전부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비록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는 말을 합니다. 해가 말하는 것이 있고 달이 전하는 지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1절의 내용처럼 해와 달이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해와 달이 외치고 있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6절에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누구도 해의 온기를 피하여 살 수 없다면 결국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해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이 외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러한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감사치도 아니하고 영화롭게도 하지 않습니다. 악에 빠져 살아가면서도 악에 빠져 있는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기 위해 주신 것이 율법인 것입니다. 7절부터 율법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으로 감사하지 않고 영화롭게 하지 않는 세상의 악을 드러내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7,8절에서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율법을 생각할 때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율법을 신자의 영혼을 소성케 하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한다고 말합니다. 도무지 실천과 연관된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율법이 어떻게 우리를 그러한 신자로 만든다는 것입니까? 율법을 잘 지키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토록 영혼이 소성될 수 없고 지혜로울 수도 없으며 마음의 기쁨 역시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잘 지킬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면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이것이 그 답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세워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허물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영혼을 소성케 하고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죄를 알고 내 죄를 짊어지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야 말로 영혼이 소성되는 것이고, 지혜로운 것이고, 마음에 기쁨을 얻는 것이고 눈이 밝아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보지 못하는 허물을 보게 된 것이야 말로 눈이 밝아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우리를 그러한 사람으로 새롭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자신의 허물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허물을 사람에 대한 어떤 실수 정도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별 실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에게는 전혀 허물이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허물이 없다고 여겨진다면, 해와 달로 인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감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로 살아가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해 보십시오.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로 살아가고 있기에 말씀으로 인해서 허물이 발각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라는 말처럼 사람은 스스로 자기 허물을 깨닫지 않습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한 숨은 허물로 인해서 결국 죄의 주장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13절에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고범죄는 알면서도 짓는 죄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죄가 무엇인가를 알면 그 죄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사람이 죄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해서 죄를 피하고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교만이 죄입니까. 아닙니까. 모두가 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탐욕이 죄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만과 탐욕을 피하고 이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는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고범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죄가 자신을 주장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즉 다윗은 은밀하게 숨은 죄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자신이 알고 있는 죄가 자신을 주장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자신이 죄의 주장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애통해 하면서 하나님만이 자신의 소망임을 깨닫게 기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14절에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죄에 있어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현실을 알았을 때 하나님의 향한 그 간절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다윗의 이 마음은 진심으로 죄의 자리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발견하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향한 간절한 소망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도무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도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그러한 교제를 소원하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허물을 숨겨 두고 있는 자의 말과 묵상이 하나님께 상달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 허물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정직한 자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백성과만 교제의 관계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교제의 관계까지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되어지는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권능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숨어있는 자기 백성을 빛으로 나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알게 하시고 모든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완전한 교제의 관계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단지 죄 짓지 않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는 온전한 관계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할 것도 하나님과의 이러한 관계입니다. 그 소망이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로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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