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시편 18:20-27 갚으시는 여호와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설교>
우리가 말하는 은혜의 내용은 대개 눈에 보이는 것이고 육신의 것들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말하는 은혜의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다윗은 오직 원수를 하나님이 이기셨다는 것만을 은혜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수로부터 다윗을 구원하셨는데, 그것을 마치 실제 목격한 것처럼 사실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사단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라고 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않습니까? 그냥 막연하게 성경이 그렇다고 하니까 받아들이는 수준이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과 사단의 싸움을 목격한 것처럼 얘기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원수로 인해서 환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하나님이 진노하시는데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더라고 말합니다. 물론 실제로 땅이 진동하고 산이 요동했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다윗의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땅이 진동하고 산이 요동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지 못하면 나올 수 없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어느 정도로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면서도 별다른 감격과 감사가 없지 않습니까? 나를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나를 붙들고 있는 사단의 세력을 이기시고 죄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의 전쟁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고와 열심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땅이 진동하고 산이 요동할 정도였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이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에 붙들려 있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그 큰 은혜가 어떻게 주어지게 되었는가를 말합니다.
20-2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마치 자신이 잘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 의를 따라서,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내가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이런 말들을 보면 모두가 다윗이 잘했다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다윗은 자신을 의롭다고 하거나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미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죽인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마치 예전의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자신의 의와 깨끗함을 말합니다. 더군다나 율례를 지켰다고 말합니다. 23-24절에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다윗은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다고 합니다. 도대체 다윗은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의 사람이 무엇을 믿고 그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의와 깨끗함과 심지어 완전함을 말하는 것입니까? 다윗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의롭다는 것과 깨끗하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대개는 의롭다는 것이나 깨끗하다는 것을 악한 일을 전혀 행하지 않고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 말 그대로 행위에 있어서 완전하고 깨끗한 상태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움이나 깨끗함은 인간의 행위를 기준으로 한 평가가 아니라 믿음을 기준으로 한 평가입니다. 롬 3:28절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말한 것처럼 의의 기준은 믿음에 있는 것이지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행위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그 속이 더럽습니다. 속이 더럽기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더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위로 의롭게 될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은 의의 길을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곧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것으로 나의 죄가 용서되고 구원받음을 믿을 때,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죄 없는 깨끗한 자로 여기시고 죄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그 피의 은혜 안에서 악한 우리를 의로운 자로 깨끗한 자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시 51:1절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이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라고 말한 것처럼 다윗은 자신의 죄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에 모든 소망을 두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믿는 이 믿음이 다윗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씻어주시고 깨끗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의 모든 죄를 씻으신 인자와 자비 안에서 자신을 의롭다고 하고 깨끗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깨끗케 하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높이고 노래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율례를 지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율례의 목적은 율례를 지켜서 착하게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의 증거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도를 지키지 않는 것은 도를 실천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믿지 않고 스스로 율례를 실천함으로써 의를 얻고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에게 있어서 의로움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의를 보시고 하나님이 갚아주신 것이 있습니다. 25-27절의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낸다는 것은, 주의 자비하심을 따라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는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으로 대하신다는 뜻입니다.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나타내고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인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비한 자에게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신다는 것은, 주의 자비를 아는 자가 곧 주의 자비에 거하는 신자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에 주의 자비가 대가로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자비를 알지 못한다면 자비를 베풀 수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자비하심을 베풀고 주님께 헌신된 자로서 여호와께 순종하면 하나님은 언약을 따라 자비하심을 넘치게 하고 주님께 헌신한 자에게 완전하신 사랑을 나타내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특한 자와 거스리는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언약에 신실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바로 이런 신실한 백성이 곤고를 당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사흘을 굶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도 보석도 아니라 일용할 양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자리에서 심판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심판에서 건져 주시는 능력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은 인자와 자비로 만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이며 이 언약을 믿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의로움이고 깨끗함이며 완전함입니다. 그러나 언약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거스리고 낮추실 것입니다.
주의 길에 있는 신자에게 하나님이 갚으시는 것이 인자와 자비라는 사실은 참으로 신자가 무한한 복에 머물러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주의 길에 있도록 은총을 베푸시고, 또 다시 인자와 자비로 갚으신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뿐임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자 됨을 잊지 않는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자와 자비를 바라보고 찬송하고 감사하는 그가 복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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