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은 세트와 의상 등 시각적인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에서 무대에 마지막으로 뿌리는 마법의 가루다.
우리는 조명이 켜지는 순간 무대 위의 모든 것을 인지하게 되고, 부지불식간에 교묘한 마법에 빠져 들어 빛의 방향과 빛깔이 암시하는 대로 이끌려 간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공연 연출에 관한 대부분의 개론서가 말하는 ‘조명은 연출가가 가진 최후의 무기’라는 구절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관객은 어떤 마법에 걸리는가? 뮤지컬 ‘컨페션’을 보면서 관객들이 느끼는 따스한 기분은 무대의 나무 질감이나 배우들의 연기 때문만이 아니다. 서서히 밝아졌다가 어두워지는 조명 기법이 장면과 장면의 단절을 막고 온기를 머금은 빛의 색채가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보라색 조명이 바닥에 깔릴 때 관객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의 과거를 떠올리게 되는 것 역시 주인공이 기억으로 빠져들 때마다 보라색 조명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잠재의식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열차가 주인공을 덮치는 상상 장면에서 객석을 향해 조명이 ‘번쩍’하고 켜질 때 순간적인 공포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얼까. 주인공이 맞닥뜨린 열차의 헤드라이트를 직접 체험하면서 그가 느끼는 공포감이 이입된 것이다.
뮤지컬 ‘캣츠’에서 도둑 고양이 한 마리가 ‘펑’하는 소리과 함께 사라질 때, 관객들이 눈앞에서 도망가는 고양이를 놓쳐 버리는 것은 객석을 향해 짧고 강한 조명이 켜졌다 꺼질 때 암순응하는 동안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조명이 빚어내는 마법의 원리는 이렇다. 연분홍 조명은 그저 그런 의상을 화려하게 보이게 하는 효과를 주고, 주황색은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녹청색은 조명만으로도 바다를 느낄 수 있게 하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담청색은 어스름한 달빛의 효과를 이끌어내고, 자색은 어딘가 비현실적이면서 감미로운 분위기를 뿜어낸다. 예를 들어 녹청색이나 자색에서 백색으로 조명이 바뀌면 비현실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을 주게 된다.
색 자체가 우리 머릿속에 있는 특정 대상을 떠올리게 하거나 감정을 자극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빨강색 조명을 비추면 관객은 피, 불, 태양, 죽음, 죄라는 상징을 떠올린다.
때로는 행운과 애국심, 젊음과 같은 긍정적인 연상이 유발되고, 때로는 악마, 광란, 욕정, 위험과 같은 부정적 연상이 유발되기도 한다. 이는 나라와 민족에 따라 차이를 띤다. 공연 작품이 해외에 진출할 때 해당 지역의 관객을 고려해 조명을 바꾸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색채 대비를 통해 공간이 확장되거나 축소되는 느낌을 주거나 잔상을 남기기도 한다.
이 밖에 빛의 각도에 따라서도 효과가 달라진다. 조명이 얼굴의 전면을 비출 때는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지만 측면에서 비추면 얼굴의 윤곽이 살아나면서 어딘가 고독하고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표정을 준다.
조명은 순식간에 장면을 바꾸기도 한다. 무대 중앙에 있던 배우가 어두운 무대 구석으로 걸어가서 머리 위로 떨어지는 조명을 받으면 순간적으로 다른 시공간이나 내면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준다.
일반적으로 조명에 사용되는 색상 필터는 200여 가지에 이르며 조명기기의 종류는 대략 10가지쯤 된다. 색상뿐 아니라 고보(gobo)라 불리는 가림판에 특정 문양이나 글씨를 새긴 뒤 빛을 쏘아 무대 장치를 대신하는 효과도 흔히 사용된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장치를 생략하고 미니멀한 무대를 연출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는 성당의 유리창 무늬를 깎은 고보 조명 하나로 장면이 전환된다.
국내 조명 디자인의 진화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국내에는 조명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각종 공연과 이벤트 산업이 활기를 띠면서 조명 디자인도 서서히 중요성을 인정받기 시작한다.
일본에서 들여와 번역한 조악한 구식 이론서에 의존하던 국내의 조명학은 유덕형 연출가, 신성희 국립극장장 등 해외에서 무대 연출을 공부한 ‘유학파 1세대’가 귀국해 활발히 활동하면서부터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한다.
현재 조명 디자인 교육기관으로는 1990년대 초반부터 운영돼온 문예진흥원 무대미술아카데미를 비롯해 각 대학의 공연예술학과와 사설 학원 등이 있다.
국내 조명 디자이너의 수는 대극장 뮤지컬 작품을 기준으로 8~10명 가량, 소극장까지 합하면 15명 정도다. 연극, 무용에 기타 장르까지 망라하면 100여 명 정도가 활동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콘서트나 이벤트 조명 디자이너까지 합치면 대략 500여 명에 이른다.
국내 무대에 오르는 공연들 중 라이선스 공연은 기존의 조명 디자인을 구입하기도 하고 국내에서 새롭게 디자인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그리스’의 조명은 국내 디자이너에 의해 새롭게 디자인된 작품이고, 지난해 공연한 ‘시카고’는 브로드웨이의 원본 디자인을 사온 것인데 “각 나라의 정서와 무대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조명은 매번 새롭게 재창작되는 게 옳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이다.
조명 디자인의 가치는 점차 주목받고 있지만 아직까지 국내 제작 환경은 열악한 편이다. 해외의 경우 실제 무대 세팅을 하기 전 사전제작 기간이 길고, 재공연일 때도 최소 15일 이상의 조명 세팅 기간을 갖지만,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조명 디자인에 대한 의식이 높지 않은데다가 대관 일정 위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통상 1주일 안에 조명 디자인이 완성된다.
(참조. 생생뉴스의 김소민 기자의 글)
서울종합예술학교 실용연기학부 윤현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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