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kespeare는 Shakspere는 영국이 낳은 국민시인이며 현재까지 가장 뛰어난 극작가로 손꼽힌다.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에 씌어진 그의 희곡은 작은 레퍼토리 극단에서 공연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토록 자주 작품이 공연되는 작가는 없다. 동료 극작가 벤 존슨은 셰익스피어를 일컬어 "한 시대가 아닌 만세를 위한" 작가라고 말했다. 뛰어난 시적 상상력, 인간성의 안팎을 넓고 깊게 꿰뚫어보는 통찰력, 놀랄 만큼 풍부한 언어의 구사, 매우 다양한 무대형상화 솜씨 등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출생·결혼·사망·유언 등 기본적 사실을 확인하는 데 별 어려움은 없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가활동에 직접·간접으로 언급한 여러 문헌자료가 있어 일부 호사가들이 주장해온 의문은 고려할 여지가 없는 것들이다.
잉글랜드 중부 소읍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의 교구기록에는 그가 1564년 4월 26일 세례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날짜를 기준으로 당시 관습을 참조하여 2, 3일 앞선 4월 23일을 생일로 본다. 또한 그의 사망일이 공교롭게도 4월 23일이다. 아버지 존은 이 고을 유지로서 상공업에 종사했으며 1568년에는 읍장을 지낸 경력이 있다. 어머니인 메리 아든은 인근 마을의 유서 깊은 집안 출신이며 약간의 농토까지 상속했다고 하므로 존에게는 신분상승을 이룩한 결혼이기도 했다. 그러나 1577년경부터 가세가 기울어 그의 교육은 그래머 스쿨로 끝나고 대학 진학의 기회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스트랫퍼드의 그래머 스쿨은 훌륭한 교육을 제공했고 그 내용은 주로 라틴어 문학과 고전문헌 연구였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대학진학의 기회는 갖지 못했지만 셰익스피어의 학식과 교양이 크게 뒤떨어진다고 볼 수 없으며 그가 시인·극작가로서 성공하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18세에 결혼했다. 장소와 날짜는 분명하지 않으나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스트랫퍼드 거주의 앤 해서웨이 사이의 결혼을 공고하는 1582년 11월 28일자 보증인 연서의 문서가 남아 있어 그가 8세 위인 앤과 결혼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기록으로는 딸 수재나의 출생(1583), 쌍둥이 남매 햄릿과 주디스의 세례(1585) 등이 문서로 남아 있다. 결혼 후 런던의 연극계 기록에 이름이 나타날 때까지 8년간 그의 행적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인근에 사는 귀족 토머스 루시의 정원에서 사슴을 훔치려다 심하게 야단을 맞았다든가, 시골학교의 선생이었다든가, 런던에 나가 처음에는 극장에서 손님이 타고온 말을 돌보는 막심부름꾼을 했다든가, 어느 귀족의 부하가 되어 지금의 네덜란드 지역에서 졸병노릇을 했다는 등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그 사실 여부는 전혀 알 수 없다.
1592년 비로소 런던 문학계에 그에 관한 최초의 언급이 나타난다. 극작가 로버트 그린이 죽음의 병석에서 쓴 소책자 가운데 명백히 그를 두고 비방한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있다. 그린이 죽은 후 이 책이 출판되자 서문을 쓴 사람이 사과하는 내용을 담아놓은 것을 보면 오히려 셰익스피어가 젊은 시인·극작가로서 각별한 주목을 받았고, 유력한 문학적 후원자이며 그가 2권의 시집을 출판하며 헌정한 바 있는 사우샘프턴 백작과 이미 교분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연극계 경력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1594년경부터 극단 '체임벌린스 멘'(제임스 1세 즉위 이후로는 '킹스멘'으로 개칭)의 주요단원이 되었으며 그 관계는 은퇴할 때까지 꾸준히 계속되었다. 당대 영국 연극을 대표하던 이 극단은 으뜸가는 배우 리처드 버비지, 최고의 글로브 극장, 가장 뛰어난 극작가 셰익스피어 등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그는 20년 이상을 전속작가일 뿐만 아니라 극단의 공동경영자로 있으면서, 또 틈틈이 배우까지 하면서 40편에 이르는 희곡과 시집을 펴냈다. 그의 사생활을 말해주는 기록은 극히 드물다. 다만 1596년에 아버지 존이 가문(家紋) 사용의 허가를 관계당국에서 얻었는데 신분상승을 말해주는 이 일은 틀림없이 셰익스피어의 도움으로 가능했을 것이며 다음해 고향의 대저택 뉴플레이스를 구입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문장). 이런 일들은 그가 세속적으로도 성공한 일면을 나타내주며, 견실한 생활인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밖에도 현존하는 약간의 재산 취득에 관계된 서류 대부분이 고향 스트랫퍼드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런던 극계 은퇴 후의 고향생활을 항상 염두에 두었고 자녀를 위해서도 그곳을 본거지로 삼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서류들은 쌍둥이 아들 햄릿의 죽음(1596), 아버지 존의 죽음(1601), 총애하던 딸 수재나의 결혼(1607) 등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중세의 사상과 사회조직의 영향이 남아 있었던 때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지상에 군림하는 신의 대리자요 그 아래서 귀족과 서민은 응분의 사회신분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기존 질서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무신론은 아직도 대다수 사람들의 신앙 및 생활방식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미 하나로 뭉쳐 있지 않았다. 로마 교회의 권위는 마르틴 루터, 장 칼뱅 등에 의해 위협받았고 영국국교회에 의해서도 도전의 대상이 되었다. 국왕의 특권에 대한 의회의 제동, 자본주의의 대두, 헨리 8세 때의 수도원 토지 몰수와 재분배, 교육의 보급, 신대륙 발견에 따른 새로운 부의 유입 등으로 사회적·경제적 질서는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신·구 사상의 교차는 이 시대의 특징이다. 공적 설교가 사람들에게 순종을 당부하는가 하면 한편으로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는 새롭고 현실적인 정치철학을 옹호했다. 당시 영국인은 이것을 이탈리아식 마키아벨리적 악덕이라고 두려워했으나 이로 인해 행동의 당위성이 아닌 현실적 행동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작품 〈햄릿 Hamlet〉에는 인간, 신조, 부패한 국가, 뒤죽박죽이 된 세상에 대한 여러 가지 탐구와 논의가 나오는데 이것은 이러한 시대적 불안과 회의주의를 반영한 것이다. 1603~06년에 씌어진 그의 작품들은 어김없이 제임스 왕조의 새로운 불신풍조를 반영하고 있다. 의회와 대립하여 하원과는 빈번히 싸웠지만 그의 무기력은 '새로운 인간'의 힘이 커진 데 따른 정부의 무능력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적 접근이라는 측면을 좀 더 심층적으로 살펴보자. 대중문화를 정의하려면 먼저 ‘문화’라는 정의를 내려야 한다. 레이먼드 윌리엄즈(Raymond Williams)는 문화는 “영어 다어 중에서 가장 난해한 몇 단어들 중 하나이다”라고 했으며 넓은 의미에서 1) 문화는 지적, 정신적, 심미적 능력을 계발하는 일반 과정, 2) 한 인간이나 한 시대, 혹은 한 집단의 특정한 생활방식 3) 지적 산물이나 지적 행위, 특히 예술활동을 일컫는다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대중문화라고 할 때, 위의 2번과 3번의 정의를 사용한다.
대중문화에 있어서 이데올로기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레이엄 터너(Graeme Turner)는 “문화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범주”라고 말하고 제임스 캐리(James Carey)는 “영국의 문화연구를 쉽게 또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다름 안인 이데올로기의 연구일 것”이라고 하였다. 다음은 이데올로기의 여러 의미들 가운데 대중문화 연구와 관련된 다섯가지 의미를 정리하고자 한다. 1) 이데올로기는 특정집단에 의해 부각되는 조직적인 사고체계를 일컫고 2) 이데올로기는 일정한 눈가림이나 왜곡, 은폐를 의미한다. 3) 이데올로기는 여러 이데올로기적 형식들을 가리킨다. 4) 우리가 일정한 의식이나 관습을 통해 어떻게 부와 지위와 권력 등의 엄청나게 불평등한 요소들로 결정되는 사회질서에 얽매이게 되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5) 함축적 의미의 범위를 정하기 위해 어떤 함축적 의미를 수정하거나 새로운 함축적 의미를 만들기 위한 헤게모니 투쟁이라 할 수 있다.
매튜 아놀드에게 문화는 두 가지 의미로부터 시작한다. 우선 가장 큰 의미로서 문화는 지식체계이며 이는 인간사고와 표현의 정수를 말한다. 두 번째로 문화는 이성과 신의 의지가 널리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문화의 빛과 신선함은 도덕적, 사회적 이득을 주는 문화자체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문화는 완벽에 대한 연구이며 이 완벽은 어떤 것을 가진다는 의미보다는 어떤 것이 되어가는 것을 뜻하며 일련의 외적 상황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화는 최선을 알기 위한 노력이며 또한 모든 인류를 위해 그런 지식이 널리 알려지도록 하는 노력이다.
리비스(F.R.Leavis)의 리비스주의는 “문화를 지켜 온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다.”는 뿌리에 논거를 두고 있다. 소수만이 과거에 있었던 최선의 인간경험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바로 그들이 전통의 가장 미약하고 여린 부분을 살려서 유지한다. 그들에게 한 시대를 사는 참된 삶의 질서를 세우는 무언의 기준이 달려있다. 즉 이것이 저것보다 가치있다 혹은 이쪽보다는 저쪽으로 가야 한다 혹은 저기보다는 여기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감각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대량문명과 대량문화는 전도된 모습을 띠면서 우리를 돌이킬 수 없는 혼란으로 이끌 것처럼 위협하고 있다. 이 위협에 대해 리비스주의는 대량문화에 대한 대항능력을 학교에서 훈련시키도록 선언하고 또 학교밖에서는 의식적이고도 직접적인 노력이 진작되어서 잘 무장되고 활동적인 소수가 저항의 위협은 리비스주의자들에게는 끔직한 일이었다. 게다가 Q.D.리비스는 권력을 쥔 자들은 더 이상 지적 권위와 문화를 대표하지 못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아놀드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전통적인 권위의 붕괴가 대중 민주주의 발흥과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이 두 현상이 문화화된 소수 the cultured minority와 합병하여 ‘무정부상태’에 적합한 토양을 만들어 주었다. 리비스주의가 가장 격렬하게 비난한 것은 광고인데 그것은 광고의 끈질기고도 침투성이 강한 자위행위와도 같은 속임수 때문이다. 광고는 리비스주의의 문화질병에서 가장 중요한 징후로 꼽힌다.
리비스가 제시한 것은 역사적 설명이라기보다는 상실의 참된 의미를 일깨우는 문화적 신화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질서에 대한 기억은 새로운 것을 자극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유기적 공동체는 비록 소멸되었지만 위대한 문학작품에 대한 독서를 통해 그 가치와 기준들을 접한 것은 아직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문학은 인간 경험의 높은 가치들을 담고 있는 보물과 같다. 그러나 불행히도 문화라는 왕관에 박힌 보석이라고 해야 할 문학이 문화와 마찬가지로 그 권위를 잃고 말았다. 물론 문학의 권위가 다시 확립된다고 해서 유기적 공동체로 되돌아가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대량문화의 영향이 확장되는 것을 조절하여 영국의 문화적 전통의 연속성을 보존하고 지속시키게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는 인간 사고와 표현의 정수를 계속 유포시키는 아놀드적 전통을 이어나갈 ‘교육받은 대중’을 유지하고 만들어 나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세익스피어가 활동하던 시기는 영어가 발달하면서 많은 변화를 보인 때였다. 시인 에드먼드 스펜서가 옛말을 되살리는 데 앞장섰으며 교사, 시인, 세련된 궁정인, 해외여행자 등이 프랑스·이탈리아 문학과 로마 고전에서 많은 것을 도입했다. 또한 인쇄본 책의 보급에 힘입어 문법과 어휘면에서 표준화가 진행되었다. 셰익스피어는 해외 여행을 다녀온 흔적이 없지만, 초기작품을 살펴보면 극작가로서 성장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얼마나 많은 것을 얻어왔는가를 알 수 있다. 〈실수연발 The Comedy of Errors〉은 플라우투스의 충실한 번안극이다. 〈티투스 안드로니쿠스 Titus Andronicus〉는 언어의 수사적 표현과 사건을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와 비극작가 세네카에게서 빌려왔으며 〈헨리 6세 Henry Ⅵ〉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를 여읜 아들이 슬퍼하는 장면을 중세 도덕극에서 차용했다. 또한 〈리처드 3세 Richard Ⅲ〉·〈베니스의 상인 The Merchant of Venice〉은 극의 정서와 인물의 성격묘사를 선배 말로에게서, 〈말괄량이 길들이기 The Taming of the Shrew〉는 성격묘사와 연극양식을 이탈리아 서민극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 도입했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강점은 이러한 영향을 다방면으로 적극 받아들이되 그것을 잘 소화하여 독자적 영역을 개척하는 데 있었다. 그 점에서 그는 천재였다.
그가 관여했던 극단이 운영한 글로브 극장은 당시의 시중극장이 다 그렇듯 청교도를 제외한 모든 계층의 시민이 오후의 구경거리를 위해 찾아왔던 매우 대중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의 극단은 궁정에 들어가 왕과 귀족 앞에서 공연하는 일도 있었고, 여름이면 지방순회를 하거나 때로는 대학, 사법연수원, 큰 저택 등에서도 공연했다(→ 엘리자베스 시대 문학). 연극에 대한 인기가 커서 새 작품에 대한 요청이 많아 끊임없이 레퍼토리를 개발해야 했으므로 극작가는 바쁜 직업이었다. 한 예로 1613년초 그가 소속한 극단은 14편의 극을 번갈아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일반극장뿐만 아니라 더욱 세련된 관객을 위한 실내공연장이 있어 별도로 운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극장은 시중 일반극장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 구조를 간단히 살펴보면 지붕이 뚫린 반옥외극장의 형태를 취하고 무대는 개방형이어서 앞면의 막이 없으며 장치·조명 등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연기자에게는 각자 맡은 부분의 대사밖에 주지 않았으며 여성 역은 모두 변성기 이전의 소년 배우가 했다. 이런 여러 가지 무대조건은 그의 극형식이나 내용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실천적 극작가로서 소속극단과 밀접한 연관을 맺었기 때문에 그는 무대조건과 배우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작품을 쓴 사람이기도 했다.
1600~06년에 씌어진 4편의 비극이 그의 최고걸작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으며 이 4편의 작품이 각기 완성된 독자적 비극세계를 간직하고 있다. 〈햄릿〉은 그의 가장 성공한 작품이다. 연극으로서 불후의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인공 자신이 문학사상 드물게 신화적 존재가 되어버린 드문 경우에 속한다(→ 햄릿). 20세기의 부정적인 비평가들의 입장을 따른다 하더라도 극의 발생과 유래로 보아 조잡함이 가시지 못한 그 복수비극식 플롯에서 〈햄릿〉의 심리극적 일관성을 찾는다는 것은 위험하고 무의미한 작업이다. 그대신 작가가 추구한 것으로 평가되는 점은 훨씬 더 다양하다. 주인공이 어버이왕을 몰래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숙부인 현왕을 대하는 데 있어 작가는 단순한 복수의 차원을 넘어선 보편적 드라마로 승격시켰고 복수를 축으로 하되 상황 전체를 정서적 긴장으로 가득 메웠다. 그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성격 부여에서도 타고난 정신의 유연성을 시대적 회의정신과 결합시켜 사색과 행동 사이에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는 솜씨를 과시하고 있다. 거기에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대하는 인물에 따라 수시로 변신할 줄 아는 주인공의 '배우적' 능력까지 합쳐서 다른 어느 작품에서도 찾기 어려운 이 극만의 매력이 부각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슴 쓰린 온갖 심뇌와 육체가 받는 오만 가지 고통"(제3독백), 즉 실존적 삶의 조건에 대한 작가의 비극적 통찰에서 우리는 이 작품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오셀로〉를 흔히 질투의 극이라고 하지만, 이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용병대장인 무어인(북아프리카의 흑인) 장군 오셀로가 부하인 이아고의 간계에 넘어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한 베네치아 귀족 출신의 아내 데스데모나를 살해한다는 큰 줄거리에는 분명히 아내가 부하 캐시오와 정을 통했다고 믿는 데서 오는 질투의 감정이 깔려 있다. 그러나 주인공을 가슴 깊이 움직이는 힘이 인간적·도덕적 가치(사랑·신의·순결 등)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신념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또한 작품 전체에 흐르는 고양된 낭만적 정서를 낳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의 극적 긴장이 주인공의 거의 무방비상태라 할 영혼의 순수함과 악의 동기가 복잡하고 모호한 이아고 사이의 대립에서 빚어진다는 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리어 왕〉처럼 인간이 선과 악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작품도 별로 없다. 주인공은 자기 왕국을 분배하면서 아무런 심사숙고 없이 악한 두 딸에게 나라를 양분해주고 선한 막내딸은 추방해버린다. 이런 우화적 시작은 이 극을 매우 단순한 내용으로 착각하도록 오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앞으로 전개될 주인공 리어의 극심한 고통과 수난, 그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 새로운 인간을 위한 작가의 사려깊은 전략이었음을 깨닫게 될 때 극이 지니는 정신적 무게를 알게 된다. 어리석은 판단이 치러야 할 값비싼 대가, 미쳐버린 리어 왕, 미친 인간으로 가장한 에드가, 미친 상태가 정상인 어릿광대 등의 광기만이 터득할 수 있는 삶의 숨겨진 진실, 현실(일상)의 눈을 빼앗김으로써 얻어지는 올바른 시력(비극적 비전)의 회복 등은 이 극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큰 가르침이다. 여기에도 '인간으로 태어난 것'의 숙명적 존재성에 대한 작가의 깊은 통찰이 깔려 있다. 거의 절망적인 극의 결말을 포함해서 이 작품의 세계는 묵시록적 공포를 일으킨다. 이 극이 20세기 후반의 현대인에게 크게 호소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맥베스〉는 4대 비극 가운데 가장 짧은 작품이다. 군더더기없는 탄탄한 짜임새와 전편에 일관되게 흐르는 긴장은 다른 어느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특색이다. 용맹한 장군이자 야심가인 주인공이 아내의 사주를 받아 자기가 섬기는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다는 이야기는 정치극·역사극의 틀에도 합당한 것이다. 초점을 주인공의 성격과 행동에 맞추어 내면화시켜 놓은 점이 매우 다르다. 이 극에서 언제나 제기되는 문제는 맥베스와 같은 극악무도한 인간을 어떻게 비극의 주인공으로 삼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문제를 푸는 데 작가는 다음과 같은 배려를 해놓고 있다. 첫째, 주인공 맥베스를 인간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래서 작가는 주인공을 야심과 욕망을 실천에 옮기는 능력에 못지않게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치열한 상상력의 소유자로 만들어놓았다. 이 공포와 파멸의 상상력은 그를 끔찍한 살인자(가해자)이자 동시에 자신에 의한 '피해자'이게 한다. 역설적으로 그는 왕을 시해하고자 했을 때 이미 운명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둘째, 이 극이 지닌 시의 특질이다. 간결하기 이를 데 없으나 고도로 응축된 시적 표현은 일체의 수사를 거부하면서 이 끔찍스런 영혼의 내면을 비춰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문학적 명성과 무대에서 인기를 얻게 되기까지는 시대적 기복이 많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말 신고전주의 문학이론이 주종을 이루던 시기에는 드라이든이나 존슨 박사 같은 당대 최고 문인에게 찬사를 받았지만 작품의 진가가 충분히 인정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극단에서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곧잘 개작·번안되어 인기있는 극작가였으나 올바르게 이해되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가 신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초 낭만주의 문학이 대두되면서부터이다. 이미 18세기말 독일에서는 괴테·실러·슐레겔 등 최고의 문인·비평가들에게 깊이있는 평가를 받은 바 있고 영국은 그 뒤를 좇은 셈이었다. 어쨌든 그의 진가가 올바르게 인식되고 극단적인 셰익스피어 숭배(bardolatry)에까지 치달은 것이 이때부터이다. 대체로 작품의 시적 우수성이 찬양된 반면 극장쪽에서는 배우예술에 대한 기여도를 높이 샀다. 따라서 시인·극작가로서 양면이 제대로 이해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학문·비평·연극 등 다방면의 이해가 골고루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그 성과는 전에 없이 풍성했고 학자·비평가·연극관계자(연출가·배우) 사이의 교류도 빈번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동시대적 안목으로 셰익스피어를 연구하고 이해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져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제1·2차 세계대전 사이,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셰익스피어 이해에는 많은 차이를 볼 수 있다. 이 점은 비평동향과 공연방식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이와 같은 셰익스피어의 '동시대화' 경향과 함께 그에 대한 세계화 추세도 만만치 않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그의 작품은 번역·연구·공연되며 그 숫자 또한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한국에서 셰익스피어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20년대 초였다. 문학편집자이자 연극인인 현철(玄哲)이 번역한 〈햄릿〉(1923)이 그 효시였으나, 그뒤 8·15해방 때까지 그의 작품 번역과 공연은 저조했다. 해방 후 번역과 공연이 점차 활발해져서 한국 최초로 극단 신협(新協)이 〈햄릿〉을 상연(1951)한 후 1964년 그의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 셰익스피어 축제까지 열리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에 한국 최초로 셰익스피어 전집이 번역 출판되었는데, 하나는 1963년에 결성된 한국 셰익스피어 협회가 중심이 되어 편찬한 것(정음사 간행)이고 또 하나는 김재남(金在枏)이 개인 전역으로 출판한 것이다. 그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연구업적과 공연실적은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서울종합예술학교 실용연기학부 윤현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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