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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쿠가와 이에야스 : 울지 않는 새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7. 21. 23:03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 통일의 기초를 세웠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 열도를 통일하고 대외로 뻗어나가려고 한반도를 침략했던 욕심 많은 인물이다. 그에 반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대외적인 팽창주의를 지양하고 일본 안에서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도모한 실질적이고 행정가적인 지도자였다.

 

지금으로부터 4백 년 전에 천하통일을 이루고 일본의 번영 가도를 창설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리더십은 양극화와 성장 분배의 갈등 속에서 기업의 방향을 찾아가야 하는 오늘의 CEO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의투철했던경제관과위민(爲民)정신, 그리고 오래 참고 견디는 불굴의 도전정신을 통해 오늘의 위기를 헤쳐 나가는 지혜를 배워보자.


빼앗긴 포스트 노부나가의 자리
지금 일본에서 이에야스의 위치는 가장 존경받는 인물 가운데 단연 최고봉이다. 무려1억5천만부라는 일본 출판사상 최대의 발행 부수를 기록한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 역사소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기를 보면 이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최고라는 자부심에 먹칠을 하는 사건이 그의 생전에 일어났다. 그는 누가 뭐래도 오다 노부나가의 2인자였다.
사실 그가 포스트 노부나가의 자리를 탐낼 만한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만큼 절대자 노부나가 밑에서 그는 착실하게 점수를 따놓고 있었고, 한편으로 장수나 부하들의 지지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혼노사에서 죽을 때 그는 불행하게도 노부나가 옆을 지키지 못했다. 이에야스는 산천경개를 유람하느라 사카이에 있었다. 그는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카스와 힘을 합쳐히데요시와전쟁을시작하는데 첫 싸움은 승리로 끝낸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싸움의 신이라 할 만큼 전쟁전략에 신출귀몰한 면이 있었다. 천하를 장악해가는 놀라운 힘 앞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결국 백기를 들고 강화 협상을 맺고 말았다. 그 이면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여동생 아사히 히메를 주면서까지 이에야스를 한편으로 만들려는 끈질기고 집요한 강화요청이 있었다.
이에야스는 끝까지 싸우면서 전쟁의 국면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든 후 결국 이 협상에 동의했다. 그러나그것으로끝이아니었다. 이에야스의 위대한 리더십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한 번은 실패할 수 있지만 두 번 다시실패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자신의 부하에 대한약속을지키기위해서였다.


 

기다림과 안정의 리더십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난하고 힘겹게 살았기 때문에 권력을 잡은 후 상당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팽창주의를 앞세워 조선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이에야스는 자신의 영향력을 조금씩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의 장점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무단파와 관리파 간의 파벌싸움이 일어나고, 일본 내에서도 전국의 다이묘들 가운데 패가 갈라져 히데요시로부터 견제와 질책과 보복을 당하는 동안 그는 착실하게 정국을 조금씩 장악해 가고 있었다.
결국 히데요시 사후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모든 다이묘들과 힘을 모아 최대 파벌이던 미쓰나리와 한판 싸움을 벌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세키하가라 전투였다. 힘을 최대한 축적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다이묘들은 최소한 중립이라도 지키게 만드는 그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그는 미쓰나리보다 병사가 적었지만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미쓰나리 군 가운데 상당수는 싸움을 시작도 하지 않은 채 관망하거나 소극적인 전투로 일관해 이에야스는 대승을 거두었다. 물론 적군인 상대 파벌의 다이묘들을 한 사람씩 효과적으로 설득해간 이에야스의 집요한 설득력이 빛을 발한 것이었다. 이에야 스의나이59세, 1600년의일이었다.


 

검약의 리더십으로 점진적 개혁
히데요시가 화려하고 사치했다면 이에야스는 철저하게 근검절약을 가르쳤다. 그는 성을 만들고 도시를 확충하며 길을 뚫는 등 사회간접 자본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으면서 내부적으로는 무사들의 정신교육을 강화해 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가르쳤다.
히데요시가 성장과 팽창 위주의 거품이 가득한 경제정책을 펼쳤다면, 그는 철저하게 거품을 뺀 실질 위주, 내수 위주의 경제정책을실시했다.
그러면서 경제를 급속하게 성장시키려 하지 않고 점진적인 성장을 통해 사회 전체를 개혁해나가기 시작했다. 히데요시가 세운 틀을 한꺼번에 바꾸려 들지 않고 그 틀을 근간으로 자신의 색깔을 입히기 시작한 것이다. 상인들은 이런 이에야스의 정책에 안심하고 다시 생업에 열심히 종사했고 나라의 부도 축적됐다.
특히 이에야스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신흥도시 에도의 건설이었다. 아직도 히데요시를 추종하는 일부 다이묘와 그의 부하들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그에게는 새로운 발판이 필요했다. 그 방법으로 신흥도시 건설이라는 획기적인 아이템을 내놓은 그는 이로써 전쟁으로 피폐해진 일본 경제도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에야스판‘뉴딜 정책’이라 불리는 건설정책은 많은 일거리를 창출해냈고, 경기부양과 경제 활성화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있었다.


 

화폐와 유통개혁으로 승부수 던져
이에야스의 리더십이 돋보인 것은 그가 다이묘 출신이면서도 정권을 잡은 후에는 철저하게 경제중심의정 책을펼쳤다는점이다. 그는 어떤일이든 서두르지않고 때를 기다렸다. 경제정책도 아침에 만들고 저녁에 폐하는 변덕스러움이 없었다. 모든 틀은 히데요시가 짜놓았기 때문에 그 틀을 조금씩 현실에 맞게 바꿔갔을뿐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히데요시가 반죽해놓은 것을 이에야스가 구워 먹었다”고 진술할 정도로 이에야스의 노련한 전략과 통솔력을 칭찬하고있다. 그는 특히 일본 국내에서 당전,송전,명전 등 중국의 화폐를 사용해온 것을 폐지하고 자주적인 화폐제도를 도입해 자립경제의 발판을 마련했다. 광산을 확충해 금과 은을 더 캐내고 황폐해진 농경지의 보수와 광동평야의 개척을 서둘렀다. 농산물이 늘어나고 화폐제도가 안정되자 자연스레 일본 경제는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도 비협조적인 다이
묘들을 하나씩 설득하고 그들의 반발심을 역이용해 각지의 경제회생과 부흥의 협조자로 바꿔버렸다. 또 농지조사와 홍수를 막기 위한 하천 정비 등으로 전국에 국토개발의 활기찬 바람을 불어 넣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처럼 자신의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실현 가능한 세부 목표들을 하나씩 점진적으로 실현해나감으로써 기다림과 안정의 리더십이 어떻게 성공하는 지를 보여준 지도자였다. 그는 지금도 일본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역사의 위인이 되고있다.

 

- 글 박기현 《악인의 리더십》저자

출처 : 작은 이야기
글쓴이 : 후후할부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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