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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역사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7. 25. 07:48

샬롬

우선 디자인 역사부터 공부하입시더 이실장님

원시시대에는 주거지를 꾸미거나 몸을 치장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라기 보다는 예측불허인 자연의 힘을 통제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출발했다.
원시인들은 생존을 위해 도구를 만들고 비바람과 햇볕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움집을 만들기도 했으며, 당시 초자연적이고 마술적인 힘으로 보호하기 위한 주술적인 방법으로 인간들은 사람과 짐승의 형상으로 벽화나 조각을 만들었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기초를 세운 최초의 사람은 수메르인으로 기원전 3500년경부터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합류하는 지역에 수많은 도시를 건설하고 인류 최초로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공통의 종교, 수학, 법률 그리고 건축법을 발달시켰다. 수메르인들은 왕이 죽으면 저승에서도 사람들을 거느릴수 있도록 모든 가족과 노예들은 물론 왕궁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을 함께 묻었기 때문에 부장품을 통해서 그들의 찬란했던 문명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흙으로 빚어 햇볕에 말린 벽돌을 사용하여 신전을 중심으로 한 정교한 도시를 만들었다. 이 건물 내부에는 신전뿐만 아니라 상점, 일터, 거주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방어 및 공공 사업같은 작업과 노동의 분업을 통해 도시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설형 문자를 개발하여 계약이나 규칙, 공고 그리고 통계나 법률 등을 기록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함무라비 법전이다.




영혼불멸에 대한 그들의 맹목적인 관심사는 살아있는 신으로 간주되었던 그들 지배자의 사후 안락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거대한 이집트의 건축물과 예술품들은 파라오의 영혼의영원한 영광을 위해 존재하였다.
이집트 인들은 그 밖에도 문학, 의학, 고등 수학을 발달시켜 인류문명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영혼불멸을 믿은 이들은 지상에서의 행복을 죽은 후에도 누릴 수 있도록 무덤에 온갖 사치품들을 함께 묻었다. 따라서 무덤의 벽면에 그려진 벽화와 상형 문자들도 죽은 자의 생전의 일상 생활을 세세히 묘사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이집트문명 중 피라미드 건축과 스핑크스는 불멸의 오리엔트문화로서 거대문명발전의 초시를 이루었다.
초상화와 조각상의 인체는 엄격한 공식에 따라 묘사되었다. 눈과 어깨는 정면을 향하고있고, 머리와 팔, 다리들은 측면으로 그려졌다. 또한 벽화의 표면은 수평의 선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마르고 어깨가 넓으며 엉덩이가 작은 인물들이 머리 장식을 하고 치마 모양의 옷을 입은 채 한쪽 다리를 내밀고 있다. 인물의 크기는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데 파라오는 거인처럼 묘사되어 있는 반면, 시종들은 난장이 같이 그리고 있다.



그리스 문명은 서양의 거의 모든 업적의 토대가 되었는데,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그리스 철학의 중심 개념인 것처럼, 그리스 예술의 주요 주제는 인체 조각이었다. 그리스 철학이 사고의 명석함과 조화질서를 강조했듯, 그리스 미술과 건축 역시 균형을 강조하였다. 당시의 디자인은 색채보다 선과 형의 균형미에 중점을 두었으며 소재는 주로 식물이나 말 사자 같은 동물 나선형이나 기하학적 형태를 사용했다.
그들은 뛰어난 화가여서 벽화를 그렸고, 목재 패녈에도 그림을 그렸으며, 너무나 실물같아서 새들이 벽화 속의 과일을 쪼아먹으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도기화에는 보통 그리스 신화 속의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가 전쟁이나 잔치와 같은 현세적인 주제가 주로 그려져 있다. 미술품속에 최초로 누드를 도입한 것은 그리스 인들이었다. 그들 사회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체력 증진으로 단련된 육체와 지적 토론으로 연마된 정신이 조화된 인물이었다.
그리스 건축가들은 흰대릭석의 "파르테논 신전" 을 통해 아테네의 위대함을 나타내고자 했다. 파르테논 신전의 완벽한 미는 직선에서 벗어나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약간의 곡선형을 띠고 있는데 기인한다. 건축을 거대한 조각품으로 간주했고 똑같이 조화와 이상적 비례의 규칙에 맞추어 건립했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제국이 건설로 그리스 미술은 몇 개의 작은 도시 국가를 벗어나 세계의 절반을 해당되는 지역의 조형언어로 발전했다. 이 후기의 미술은 그리스 미술이라고 하지 않고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이 동방의 나라에 건설한 제국의 이름을 따서 헬레니즘미술이라고 한다. 이 제국의 풍요한 수도들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라아의 안티오크, 그리고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등에서는 도리아 양식이나 이오니아식 건축의 우아함에서 벗어나 기원전 4세기 초에 고안된 코린트 양식이 유행했으며, 일반적으로 건물 전체에 더 많은 화려한 장식물을 입혔다. 그리스 미술의 양식과 창의성은 오리엔트 왕국들의 규모 및 전통과 융합되었다. 그리스 미술은 대부분 헬레니즘 시대에 변화를 겪게 되는데 헬레니즘 미술은 초기 그리스 조각의 조화미와 세련미 대신 거출고 격렬한 작품을 선호했으며, 보는 사람들에게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인상을 주기를 원했고, 또 확실히 보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기원전 3세기경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섬에서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교류가 시작되었는데, 처음에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에 압도당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미술뿐만 아니라, 시, 수사학, 철학 등에도 매료되어 많은 지식인들과 장인들(교사, 학자, 사상가, 조각가, 화가)을 고용하였다. 로마인들은 당시 유행했던 헬레니즘 취미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리스 조각들을 대량으로 복제하긴 했으나, 점차 자신들의 특징적인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로마 예술은 고전기 그리스 예술보다 지적이고 이상적인 면은 덜하였지만 현실적이고 기능적이었다.
로마의 건축가들은 아치와 궁륨, 돔을 개발한 것 이외에도 콘크리트를 최초로 사용했다. 이같은 혁신적인 건축기술로 인해 로마인들은 최초로 받침대 없이 거대한 내부 공간을 덮을 수 있게 되었다.
콜로세움이라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수용할 수 있으면서도 매우 효율적으로 설계되어 있어서 오늘날 스타디움의 디자인에도 응용되고 있다.

 

 

 





중세는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부터 르네상스 시대 까지(5세기~15세기) , 약 1000년 동안의 시기를 말한다.



기독교가 내세의 구원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지상의 물체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려는 경향은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다. 누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심지어 옷을 입고 있는 육체도 해부학적인 정확성이 무시되곤 했다.
신학자들은 산지들이 물질의 아름다움을 통해 신성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믿었고, 그 결과로 매혹적인 모자이크와 회화, 조각품이 만들어졌다.
초기 기독교는 합법적이지 않은 종교여서 온갖 박해와 수모를 겪었으며 박해가 심할수록 그들은 로마의 지하묘소 카타콤에 숨어서 복음을 전파하고 벽과 천장에는 벽화를 남겼다. 국교로 승인후 고도의 기능을 갖춘 건축가에 의해 여러 곳에 거대한 성당이나 수도원이 세워지고 교회 벽면과 천장을 장식하기 위한 회화나 초기 벽면 모자이크가 전문가에 의해 만들어 졌다.
건축에서 신성에 대한 지향은 보다 밝고 가벼운 건물의 형태로 나타났다. 육중하고 거대한 로마 건축은 서서히 사라지고, 이상적인 기독교인 상이 건축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밖에서 보면 소박하지만 내부는 성령을 상징하는 모자이크, 프레스코, 스테인드 글라스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중세 미술의 황금기로 불려지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긴 기원후 330년경부터 이 도시가 투르크 족에 의해 멸망한 1453년까지 지속됐던 지중해 동부 지방의 예술이다. 로마가 야만족에의 의해 멸망하여 잿더미에 있을 당시 비잔티움은 초기 기독교 미술을 발전시켰으며 문명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비잔틴 미술과 건축의 복잡한 형식으로부터 오늘날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의미의 '비잔틴'이라는 단어가 유래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모자이크 작품 중 몇개가 5~6세기 터키의 비잔티움과 이탈리아의 라벤나에서 제작되었다. 모자이크는 국교로 공인된 기독교의 강령을 널리 유포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므로 그 주제는 대부분 종교와 관련이 있었고, 예수는 전지전능의 지배자나 설교자로 표현되었다. 당시 모자이크는 반짝이는 황금의 배경과 후광에 둘러싸인 성자들을 화려하고 장대하게 묘사한 점이 특징이다.



로마네스크라느 명칭은 '로마와 같은'이라는 뜻으로 19세기에 고안된 말이다. 원래 이용어는 주로 건축에서 사용된 것으로, 11세기 후반과 12세기 유럽의 전형적인 건물들이 두꺼운 벽과 아치가 있는 고대 로마의 석조 건축과 닮았음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가장 특징적인 형태는 궁륭(vault)의 이용이다.
가장 간단한 궁륭은 옆으로 확장된 아치형으로 원통형 또는 터널형 궁륭이다. 이런 종류의 지붕은 아주 무겁고 건물내부에 채광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고대 로마의 건축가들은 교차 궁륭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두 개의 원통형 궁륭이 직각으로 교차하여 네 개의 버팀기둥 위에 닫집 모양을 이룸으로써 만들어진다. 평면에다 교차 궁륭을 짓는 것이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개방된 이 형태는 건물 내부에 더 많은 빛이 들어오게 해 주었으므로 호평받았다.
이 두형태, 원통형 궁륭과 교차 궁류은 거의 모든 로마네스크 교회에 이용되었다. 시각적으로 이 궁륭들은 견고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외관은 유연한 형태를 띤다.





중세예술의 업적 중에서도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경이로운 업적을 필적하는 것은 바로 고딕 양식의 대성당들이었다. 늑골 궁륭과 부연 부벽이라는 외부 버팀목의 발명으로 1200~1500년 사이 건축가들은 세계 건축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이 솟구친 내부를 가진 복잡한 구조물들을 건설했다. 고딕 성당은 육중한 벽대신, 커다란 스테인드 글라스를 설치한 창을 통해 밝은 빛이 들어와 내부를 환하게 밝힐수 있었고, 격자 문양과 더불어 위로 상승하려는 듯한 수직성 또한 고딕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건축가들은 첨두 아치를 사용하여 높이를 실제로 높였을 뿐아니라 보기에도 더 높아 보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고딕 성당에서 주로 사용된 장식물은 조각, 스테인드 글라스, 그리고 타피스트리를 들 수 있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중세 정신의 진수로 이 안에 설치된 스테인드 글라스는 전 면적이 약 896m 에 이른다. 중세의 직조인들은 당시의 일상생활을 세밀하게 묘사한 고도로 섬세한 타피스트리를 만들었다. 이러한 양모와 실크가 배합된 걸개들이 성이나 교회의 차가운 벽조를 장식했다. 베틀 뒤에는 커다란 그림을 놓고서 직조해 나갈 때마다 디자인을 모방했다.



1400년대 초기, '다시 깨어나다'는 의미의 르네상스는 처음에 단테와 조토의 출생지이며 부유한 상업도시인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미술가들에 의해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 과거의 미술개념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로마와 베네치아로 전파되었고 1500년 북유럽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으로 퍼져 나갔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그리스, 로마의 미술과 문학이 재음미되었고 인체와 생태계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가 이루어졌으며, 자연의 형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팽배하였다. 해부학과 같은 새로운 기술의 도움으로 화가들은 초상화, 풍경화, 신화나 종교내용을 주제로 한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러한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예술가의 지위도 상승하여 르네상스 전성기(1500~1520)에는 레오나르도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거장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르네상스 시기에 이루어지 기술적인 혁신과 창조적인 발견은 현실을 표현하는 새로운 양식의 등장을 가져왔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발견은 회반죽된 벽 위에 그리는 프레스코 화나 나무 판자 위에 그리는 템페라 화 대신 캔버스 위에 그리는 유화가 발명된 것이다. 이 발명으로 인해 회화는 단순히 소묘를 기초로 채색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빛과 그림자를 사용하여 부피감을 살리고, 원근법을 이용하여 3차원적인 공간감을 주었으며, 피라미드 구성도 발달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

레오나르도는 그 핸섬한 용모와 지성, 매력으로 인해 국제적인 명성을 날렸다. 그의 관심사는 해부학, 건축공학, 천문학, 수학, 자연사, 음악, 조각, 건축, 회화등 여러 방면에 이르고 있어 그는 역사상 가장 다방면에 걸친 천재로 일컬어 진다. 그는 운하를 설계했고 중앙 난방시설을 고안해 냈으며 늪의 물을 빼내는 방법과 혈액 순환에 대해 연구했고 인쇄기와 망원경, 휴대용 폭탄을 발명하기도 했다. 그는 최초로 비행 기계를 고안했고 인체의 내부 구조를 처음으로 그림을 통해 설명하였다. 그는 생전에 20개의 작품밖에는 제작하지 못했는데, '모나리자'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 초상화는 여러면에서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기준을 정립한 것인데, 모나리자의 모리 뒤에 있는 소실점으로 모든 선들이 집중되는 원근법을 사용하였으며, 기하학적인 구성의 중요성을 정착시킨 삼각형 구도를 활용하였다. 모나리자의 손을 보면 레오나르도가 해부학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는 한때 병원에서 살며 인체의 골격에 대해 연구했고 시체를 해부해 보았다.


미켈란젤로 (1475~1564)

미켈란젤로는 건축가, 화가, 조각가, 공학자로 활약할 정도로 매우 광범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일체 제자를 두지 않았고, 자신이 작업하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각을 '대리석 안에 갇혀있는 인물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함'이라는 의미의 '피에타'는 레오나르도에게 배운 피라미드 구도를 사용했고 성모 마리아의 평온한 얼굴은 그리스 조각의 사실적인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는 인류의 탄생과 죽음을 표현하는 340여개의 인물상을 그려넣어 르네상스 시기를 통틀어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이런 대작을 제자도 쓰지않고 혼자 4년만에 완수했다는 것은 이 작업에 대한 그의 집념과 열정을 증명한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완성한 29년 후 같은 성당의 제단 벽에 프레스코 화 '최후의 심판'을 그렸다.





'바로크'란 용어는 허세부리고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종종 사용되지만, 17세기는 렘브란트나 벨라스케즈와 같은 예술적인 천재를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미술의 영역을 일상생활로까지 확장시킨 시기이다.
바로크 시대는 1600년 경 로마에서 시작되었는데 그장 로마 교황청은 반종교개혁 이후 그들의 승리를 자랑하기 위해 엄청나게 사치스런 성당이나 일생에 한번은 반드시 보아야할 건축물과 예술 작품을 통해 신도들을 끌어 모으고 그들의 시선을 압도하려는 목적으로 예술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플랑드르 같은 카톨릭 국가에서는 종교미술이 전성기를 맞았고 반대로 영국과 네덜란드 같은 북부 유럽의 신교국에서는 종교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 금지 되었다. 따라서 미술의 소재가 정물화,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등 일상 생활로 확대되었다. 르네상스에서 갈라져 나온 바로크 미술은 합리주의와 정적인 요소를 중시하던 르네상스와는 달리 감정적이고 역동적인 스타일을 강조했다.






로코코란 용어는 원래 더위를 피하기 위한 석굴이나 분수를 장식하는 데에 쓰이는 조약돌 혹은 조개 장식을 말하는 '로카이유'에서 유래된 것으로 주로 실내장식에서 쓰이는 용어이다.
로코코 는 루이 15세가 통치한 1723~74년 동안 파리에서 성행했던 미술 사조이다. 1976년 무렵 프랑스에서는 이미 뒤떨어진 유행이 되었으나 독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중부 유럽에서는 18세기 말까지 사치스런 궁전이나 교회를 장식하는 데 널리 유행하였다. 로코코 양식이란 말 그대로 장식적인 예술로서 곡선적이고 우아한 장신구들을 진열해 놓은 공간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러한 저택의 마루는곡선형으로 최고급 고블랭산 소파천을 씌우거나 상아와 귀갑으로 장식했다. 옷이나 은제 식기들, 도자기도 꽃무늬와 조가비, 나뭇잎 같은 소용돌이 무늬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는 마차까지도 직선이 아닌 소용돌이 장식이 달린 곡선으로 디자인 하였는데, 말에는 깃털과 보석으로 장식한 마구를 달았다. 로코코 예술은 장식적이었으나 당시의 무능한 귀족 계급만큼이나 비실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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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기계혁명이자 생산혁명이고 사회혁명인 동시에 디자인혁명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대적으로 프랑스혁명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영국에서는 명예혁명 이후 상공업이 크게 발전하여 기술혁신에 필요한 자본이 축적되어 있었고 기업가들의 열의도 대단해졌다.
최초로 산업혁명을 이룸으로써 자연히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워질 만한 지위를 차지한 후에 자유무역론을 내세워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런던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박람회장 건물인 수정궁은 주철로 된 구조물의 미학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각국의 기계공업의 성과를 한곳에 모은 것으로 전시품들은 예전처럼 공예가의 수공 기술로 만든 것이 아니라 기계로 제작되어 미적 수준이 낮았으나, 이 박람회는 새로운 기계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고 디자인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우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만국박람회 이후 1860년 뉴욕에는 시민을 위한 대중공원인 센트럴 파크가 만들어졌고,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는 철골 구조의 에펠탑이 세워지는등 새로운 형태의 디자인이 이루어 졌다.



윌리엄 모리스는 비평가이자 사회주의자였던 존 러스킨의 영향을 받아 19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미술공예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일찌기 식민지개척에 눈을 뜬 대영제국은 여러 가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수공예에서 탈피하여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등 산업혁명을 일으켜 유럽세계를 놀라게 했다.
특히 세계 지배를 꿈꾸며 새기술에 의한 발전을 세계만방에 과시하려고 1851년 런던에서 제1회 만국박람회를 개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당시 17세의 소년 모리스는 미적 가치가 떨어짐을 크게 실망한 후에 러스킨의 영향을 받아 19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미술공예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는 산업혁명의 결과로 나타난 자연파괴, 기계제품의 범람, 수공기술의 낙후 등을 비판하면서 특수제품에만 이득을 주는 기계를 파괴해야 한다며 사회무질서를 바로잡기위해서 미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나선것이다.
1861년 마샬포크너상회를 설립하여 관리자겸 공장장을 겸하면서 벽면장식과 조각, 스테인드 글라스, 금속세공, 가구를 제작하는 등 디자인을 하여 기계에 의한 기쁨없는 노동을 윤리적인 입장에서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러스킨과 모리스의 기계사용을 거부한 미술공예운동은 벽화나 조각을 고급미술로 생각하여 일상품을 저급으로 본 조형이론에는 근대화에 영향하는 모순성도 있었다.
반면에, 공예를 수준 높은 예술로 여기며 사회개혁운동을 전개시켰으며 이후 독일 공작연맹이나 바우하우스의 조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수공예의 부활을 역설하기 위해 순수한 인간의 노동력만으로 디자인하고자 했던 모리스의 작업은중세기적인 원시 상태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것이었으므로 르네상스 이래 도입되었던 모든 문명을 거부하는 것과 같아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모리스가 실천가로서 역량이 부족하였고 비록 만년에 지극히 수동적인 태도로 기계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할지라도 민중을 위한 조형을 역설하고 '만인이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예술'을 추구했다는 점과 산업혁명으로 파괴된 인간성과 미의 회복을 목적으로 미술과 공예를 통일하며 수공예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수공예의 사회적 책임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모리스는 20세기 예언자이며 근대 디자인 운동의 아버지였다고 할 수 있다.


윌리엄 모리스 William Morris, 1834-1896

영국의 공예가, 시인, 사회사상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사상과 실천은 근대디자인의 출발점이며 이후 디자인의 역사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그의 문제 의식의 출발은 무엇보다도 당시 산업자본주의적 현실에서 생산품의 질적 저하와 인간 노동의 소외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전의 중세 사회을 이상으로 간주하고 기계생산을 부정했으며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했다. 또 그는 스승인 존 러스킨의 사상을 이어받아 '예술의 민주화'와 '예술의 생활화'를 열렬히 주장하였는데, 이는 바로 근대 디자인의 이념적 기초가 되는것이다.
1861년에는 모리스, 마샬, 포크너 상회를 설립하여 직접 공예품을 제작하는등 이념의 실천에서도 매우적극적이었다. 1890년에는 캠스코트출판사를 설립하여 중세의 필사본 전통의 계승을 시도하였다.
전반적으로 낭만적이고 유미주의적인 의식의 소유자였던 모리스는 근대디자인의 선구자로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대체로 그의 사상과 실천은 복고주의, 엘리트적 실천, 시대착오적인 기계의 부정이라는 한계와 모순을 드러냈다.




아르누보는 1890년부터 약 20년간 벨기에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제1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디자인등 모든 장르에서 새로운 생명과 풍부한 혁신을 불러일으킨 장식미술 운동이다.
이 운동을 통하여 선과 색채, 면과 형태라는 조형적 요소에 새로운 장식적 가치가 부가되었으며, 종합적인 디자인의 수단으로서 새로운 의의를 갖게 되었다.
또한 그것은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예술의 세계에 끌여들여 조형 예술과 응용 미술의 구별을 없애려 한 운동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아르누보는 전체적으로 19세기적인 양식으로 부터 벗어나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 하였으며, 궁극적으로 20세기 반예술 운동의 선두에 위치하였다. 아르누보의 양식적인 기원은 영국의 미술 공예 운동에 두고 있으며 1892년 부터는 브뤼셀이 중요한 중심지 주의 하나가 되었다.

아르누보 양식의 발생 배경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면 산업혁명과 새로운 재료에 의한 공학기술의 발전, 그리고 새로운 건축 주제의 필요성에 관한 인식이라고 할수있다.

첫째로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으로 인해 철의 제조 기술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함과 동시에 방적, 섬유 공업의 발전으로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해져, 도시의 인구집중을 초래하게 되었다.
둘째, 건축에 있어서 철이 값싸게 공급되고 유리 기술의 진보로 빛이 충분히 들어올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들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돌을 이용한 축조 방법을 근본적으로 동요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셋째, 이러한 새로운 재료의 발명과 이것을 구축하려는 공학 기술의 진보는 건축을 지금까지의 좁은 틀에서 벗어나 건축주제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동안은 사원이나 궁전이 대 건축을 지칭하였지만 산업 혁명에 의한 인구의 도시집중으로 귀족이 아닌 노동자의 주택, 백화점, 증권거래소, 철도의 발달에 의한 정거장과 각종공장 등으로 건축의 주제를 확대시켰다.

아르누보는 새로움이라는 개념으로 해석되었으며 주로 곡선을 사용하여 식물을 모방한 까닭에 '꽃의 양식', 물결의 양식, 당초양식 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아르누보 양식은 과거의 복고주의적 장식에서 탈피하여 상징주의 형태와 패턴의 미학을 받아들임으로써 미술을 모든 생활에 실용화하여 했던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아르누보의 명칭은 New Art(신예술)이란뜻으로, 모던 스타일(영), 유겐트 스틸(독)등의 이름으로 불리운다. 식물모티브에 의한 곡선의 장식가치를 강조하여 장식과 평면과의 유기적 연관성을 추구 했으며, 이론적, 사회적으로 '공예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상생활 환경의 혁신을 지향하였으나, 본질적으로는 유미적이고 개인주의적 경향이 짙어 기능 및 기계생산에 진정한 대응을 못한채, 20세기초 상업주의의 비속화속에서 자멸하였다.



19세기말 프랑스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아카데미즘 미술운동으로, 1897년 요젭 호프만, 요젭 마리아 올브리히, 구스타프 클립트 등이 빈에서 결성한 그룹이다.

분리파라는 이름은 아카데믹한 예술 그리고 과거의 모든 예술로부터의 분리를 목표로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으로서, 이들 중 다수는 요젭 호프만이 설립한 빈 공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과거 예술과의 단절을 주장하고 그들이 속도, 폭력, 전쟁의 영광스런 근대 세계라고 생각했던 것에다 예술을 통합시키고자 했다.

회화, 건축, 공예의 각 분야에 걸쳐 새로운 시대를 개척, 개성적 창조의 자유를 주장했다. 대표적인 작가는 오토 와그너로 보수적, 폐쇄적인 과학적 미술에서 벗어나서 개성적인 창조를 주장했다.








1907년 건축가이자 관리였던 헤르만 무테지우스를 중심으로 결성된 독일공작연맹은 예술가나 건축가 뿐만 아니라 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실업가를 포함한 디자인 진흥 단체였다. 단순한 공예 운동이나 건축 운동이 아니라 결집된 형태의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디자인의 근대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 이는 독일 공작 연맹이 미술과 산업의 협력에 의해 공업 제품의 질을 높이고 규격화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다고 할수 있다.
- 규격화한 형태로서 대량생산하여 그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간결하고 합리적인 양식을 만들어 가고자 했다 .  미술과 근대공업의 결합을 시도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운동을 긍정한 새로운 공예운동으로 건축, 공예, 가구 일반의 합목적인 구성을 의도 하였으며, 미술과 공업을 수공작의 노력 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독일공작 연맹은 디자인이 개인적 실험상태에서 벗어나 보편적으로 인정된 표준스타일의 설정으로 향하게하여 현대의 디자인 역사에서 중요성을 인정 받았다.



1909년 죠르쥬 브라크와 파블로 피카소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세잔느의 자연해석과 아프리카 원시조각의 형태감이 큐비즘의 동기이다.
세잔느의 이론이란 화가가 3차원의 세계에서 본 모든 측면들을 편평한 표면 위에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큐비즘은 지적인 예술, 양식의 혁명이며, 대상을 냉철하게 바라봄으로 형식에 근본적인 방향을 갖는 것이며 새로운 종류의 현실을 창조, 독창적인 반 자연주의적 형상으로 추상과 재현사이의 인위적인 경계선을 파괴 20세기 전반기에 중심축이 된 운동이다.

브라크는 실물을 기하학적 도형, 에스타크의 집과 같은 풍경화에서 입방체적 환원, 간결화시켜 단순함으로 표현하여 피카소보다 먼저 큐비즘의 양식을 마련했고, 피카소는 사물을 대담하게 변형, 면들의 분할, 형식감각을 살림으로써(형식에 대한 형식주의) 사물을 체계적으로 변형하였다.



러시아 혁명기의 대표적인 아방가르드 운동의 하나로서 1920~30년대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추상주의 예술운동으로, 말레비치, 로드첸코, 엘 리시츠키등에 의해 일어난 조형운동이다.

구성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을 열렬히 환영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미술상의 혁명(추상주의) 정치적 혁명(사회주의)을 동일시한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자연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는 전통적인 미술개념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현대의 기술적 원리에 따라 실제 산물을 생산하는 것을 예술적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일반생산과 예술 창작이 구별되지 않았다. 구성주의자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조형을 통한 사외주의 문화건설에 있었으나, 당시 낙후된 러시아의 생산력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시도는 대부분 계획으로 그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예술의 추상적 소성(순수한 표면, 구성, 선과 색 등)을 과학적 실천적 입장에서 탐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미술을 건축과 관련시키고 또한 의상 디자인 등 다양한 여러 분야와 실험하면서 이시기의 사회적, 산업적 요구에 맞추어 적용하려 했다. 러시아의 구성주의는 특히 독일의 바우하우스에 큰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로드첸코, 타틀린, 리시츠키, 베스닌 등이며 1934년 러시아의 예술이념으로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공식화됨에 따라 구성주의 운동은 막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구성주의는 현대미술사에서 매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최근 건축에서의 해체주의적 경향은 구성주의의 영향을 또 다른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예술가는 근대산업의 재료와 기계를 사용하는 기술자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기계적 또는 기하학적인 형태를 중시하여 역학적인 미를 창조하고자 하였다.
기계생산과 건축공학 및 그래픽, 사진 등과 같은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미술가들을 조화시킴으로써 사회 전체의 물질적, 지적 요구를 고양시키려는 신념을 가졌으나 공산주의 경제체제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스탈린에 의해 종식되었다.



독일의 표현주의, 소련의 구성주의와 함께 출현한 운동이 네덜란드의 데 스틸이다. 데 스틸은  데오 반 도스버그, 몬드리안 등이 1917년에 파리에서 결성한 그룹이자 잡지의 이름으로 새로운 기계시대의 상징으로 '기하학적인 형태가 기능적인 것'이라는 기능주의 철학을 대두시켰고 추상 회화의 수평과 수직으로 이루어진 단순화된 평면 구성을 회화의 영역을 넘어서 건축, 공예, 그래픽 디자인에 이용하여 새로운 형태를 부여한 운동이다.
입체파에서부터 비롯된 추상미술을 조형예술 전 분야에 걸쳐 본격적으로 추상미술을 전개시킨 최초의 운동이었다. 이들은 조형예술의 통합을 주장하였는데, 그 원리는 회화, 건축, 산업 디자인을 막론하고 모든 공간을 동일한 평면으로 간주하여 기하학적 형태와 삼원색을 기본적인 조형요소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들의 지도 이념은 순수성, 직관성을 중시하는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로부터 조형물의 효과나 구체성을 중시하는 반 되스부르크의 요소주의로 옮겨갔으며, 1920년대에는 네덜란드를 넘어서 국제구성주의운동으로 발전해갔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에 독일공작연맹의 멤버로 활동했던 월터 그로피우스를 중심으로 독일의 바이마르에 설립된 국립 디자인 대학이다. 독일공작연맹의 이념을 계승하여 예술적 창작과 공학적 기술의 통합을 목표로 삼은 새로운 교육기관으로서 현대 건축, 회화, 조각, 디자인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이상주의와 20세기의 현실주의를 결부시킨 그로피우스는 교육을 통한 사회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바우하우스의 초기 이념들은 발전과정에서 많은 변화와 수정을 거쳤으며, 결국 바우하우스는 산업과 접촉함으로써 디자인의 사회와 운동에 기본이 되는 교육적 성취와 현대 디자인의 이정표를 정립하는데 공헌하였다. 제도상으로 볼때 바우하우스는 대공립공예학교와 대공립미술대학이 통합된 미술연구소이자 대학이었으며 처음부터 반아카데미적인 자세를 취하는 실제적인 수공 훈련에 중점을 둔 실용 교육 기관이엇따. 개교후 2,3년이 안되어 공예가 양성이라는 교육 이상은 이미 대량생산을 위한 제품을 디자인할 수 있는 디자이너 양성교육으로 바뀌었으며, 심지어 바우하우스의 작업장에서 제품 개발에 착수하여 연구소의 이익을 꾀할 수 있는 경제적 기초를 확대하고자 노력하였다.

바우하우스는 "완벽한 건축물이 모든 시각예술의 궁극적 목표다."라고 선언하였으며 교사와 학생이 함께 하는 공동사회적 책임을 지향하였고 1923년 이후 기계의 사용으로 예술과 공업기술의 통합을 목표로 합리주의적인 모던 디자인을 향한 새로운 시도를하였다는 점은 디자인사에 영원히 남을 일이다.
1925년 데사우로 이전하였다가 1932년에 다시 베를린으로 옮겨 간뒤 다음 해인 1933년 나치스에 의해 폐교되었다. 존속기간은 14년에 불과 했지만, 근대디자인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바우하우스는 예술과 기술의 분리를 근대문명의 모순으로 간주하고 조형적 실천을 통해 그를 지향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회화, 조각, 건축 등으로 분리된 근대 조형예술의 체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따라서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예술의 공작적 성격을 다시 확인하고, 순수 미술과 응용미술의 차별을 철폐하며, 건축을 통한 조형예술의 통합을 목표로 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이념을 교육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하였는데, 교육과정은 기초과정, 공방과정, 건축 교육의 순서로 실시되었고, 성격은 중세의 공방과 근대의 조형 개념을 새롭게 접목시킨 것이었다. 한편 폐교 이후 유럽과 미국으로 이주해간 바우하우스인들에 의해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교육이 전세계적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

바이마르 바우하우스(1919-1925)
도제, 직인, 마이스터로 구분하며, 교사와 학생이 전공동체적인 정신으로 실용적 교육 이념을 목표로 하였다. 교육과정은 예배과정을 거쳐 도자기, 인쇄, 벽화, 공방의 연구를 통한 전문적인 공예 교육으로 이어졌으며, 이것은 그로피우스의 실용적이고도 진취적인 교육이념에 잘 부합된 것이었다.

데싸우 바우하우스(1925-1932)
그로피우스, 한스 마이어, 미스 반 데어 로에로 이어지는 3명의 학장과 함께 발전하였다.
마이어는 과학적인 기초 위에 건축을 체계화하기위해 전문가 초청 강연을 의뢰하여 디자이너 양성에서 과학 교육의 중요성을 제시하였다.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바우하우스를 이상적인 건축 교육의 장으로 정리, 통일하는 것으로 기본 방침을 세우면서 공방보다는 강의 중심의 교육으로 바뀌면서 바우하우스는 건축 전문 공과 대학의 성격을 띠었다.


베를린 바우하우스 (1932-1933)
미스에 의해 시립 연구소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기초 과정과 전문 교육 후의 자유로운 디자인 활동으로 이루어졌으며 기금 조달을 목적으로 하는 카니발 행사도 이루어졌다.
1933년 해산되었다.





뉴 바우하우스 (1937-1938)
모홀리 나기가 학장으로 취임, 뉴 바우하우스의 교육은 이론적, 실천적 과정으로 분류되었으며 교육의 목표는 수공업 및 기계 공업 제품의 디자이너, 박람회, 무대, 전시, 상업 미술, 타이포그래피, 사진 등의 디자이너 그리고 조각가, 화가, 건축가의 양성에 있었다.

월터 그로피우스

1883-1969 바우하우스의 설립자이자 근대건축과 디자인 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 베를린에서 출생. 뮌헨과 베를린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1908년과 10년 사이에 페터 베렌스의 사무실에서 일했다. 1914년 퀼른에서 열린 독일공장연맹 전시회에 파구스공장의 설계안을 출품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1919년에는 바우하우스 교장으로 임명되어 중심적인이물로 활동하다 1928년 사임하였다. 1929년에는 근대 건축 국제회의의 부의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바우하우스 폐교 이후 1937 년 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에서 건축을 가르치면서 미국 디자인계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어로 장식미술을 뜻하는데, 1925년 파리의 장식미술박람회에서 나온 명칭이다. 아르누보의 뒤를 이어 1920-193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세계에 전파되고 유행된 양식이다. 아르데코의 양식적 특징은 모더니즘과 장식미술의 결합에서 찾을 수 있다. 아르데코는 20세기의 입체파, 미래파 등에 의해 개척된 모더니즘 양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장식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장식적 가능성을 보여주며, 또 그 점에서 19세기의 아르누보와 구별된다. 따라서 유동적인 곡선을 애용했던 아르누보와는 대조적으로 아르데코는 기하학적인 형태와 반복되는 패턴을 보여준다. 한편 아르데코는 미국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는데, 할리우드 양식, 또는 재즈양식으로 불리운 미국의 아르데코는 프랑스와는 달리 대도시의 고층건물 등에 적용되는등 보다 웅장하면서도 사치스런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아르데코는 건축과 공예, 패션, 자동차, 콤팩트, 향수병 등 생활 디자인의 다양한 분야에 파급되었고, 그 때문에 아르데코는 아르누보보다 종합적이며 광범위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데코의 양식적 특징은 모더니즘과 장식미술의 결합에서 찾을 수 있으며, 아르누보가 비대칭으로 화려한 식물의 유기적인 곡선을 지향한 데 비해서 아르데코는 대칭으로 기계적인 추상적 형태와 기하학적 직선을 지향하여 모더니즘을 탄생시켰다.








1차 세계대전 중 미국, 스위스, 유럽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난 극단적 반이성주의를 내세우는 예술 운동으로, 1916년 쮜리히의 Cabaret Voltaire에서 잡지 'Dada를 발간으로 시작되었다.
부르주아 계층의 고상한 취향을 강조하는 예술에 대한 확신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정치적, 도덕적, 미적인 위기에 대해서 개인적인 자유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개인의 완전한 자유'를 위하여 이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여 옷벗기, 쌍소리, 자살 같은 공격적, 파격적, 희극적인 방법이 사용된다.
시문학과 조형예술에서 시도되어 얻은 형식적인 경험들을 연극, 영화, 건축, 음악 등으로 확산시켜 화가, 조각가, 배우의 단절된 개념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예술에서 새로운 민감성을 창조하고, 예술적 자유의 권리 주장, 창조적인 회의주의를 찾는다. 예술과 삶의 구분을 거부하여 관람자와 작품과의 대화가 시작되며 기성품이라는 오브제의 등장으로 금세기의 새로운 조형언어가 시작된다.
인간의 이성을 배제하고 우연의 제스츄어를 쓰면서 과거의 예술을 비웃고, 비합리적이고 무계획적인 예술 활동을 통하여 새로운 재료와 표현방법을 탐구, 전통적인 예술기법을 파괴하여 예술을 현실에 직접 통합하였다.
뒤샹과 다다이스트들의 반 전통, 반 부르주아적 의도는 네오다다 이후, 팝아트, 누보리얼리즘, 아르테포베라, 최근의 설치미술에 이르기까지 오브제의 긍정적 사용이라는 또하나의 전통으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마르셀 뒤샹, 쿠르츠 슈비터스등이 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파괴되는 물질세계의 실망에서 비롯된 전위적 예술운동 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앙드레 브루통의 초현실주의 선언(1924)으로부터 시작된다.

경험적인 통상적 세계보다 더 참된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고, 무의식적인 정신세계를 통하여 초월적 세계를 확인하려는 예술적 시도, 프로이드의 학설의 영향을 받아 인간심리의 무의식을 발견하여, 심층심리학의 발달에 따라 이것과 관련된 인격이 지니고 있는 일체의 힘을 회복하는 예술을 주장한다.
초현실주의자는 꿈의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억압된 무의식의 내용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강구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유형의 미술에서 나타나는 의식적인 이미지와 형식적인 요소까지도 자유롭게 혼합한다. 초현실주의는 무의식 속에 숨겨진 샘이 있어서,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상상력에 고삐를 매지 않는다면, 이 샘은 솟아날 것이라고 믿는다.
이성의 지배를 배척하고 비합리적인 무의식의 세계, 꿈의 세계를 표현하는 예술운동으로 유럽문명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합리주의, 이른바 이성에 대한 도전과 재래의 예술형식을 격렬하게 파괴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무의식의 세계를 대중화한 작업으로 현실적인 사물의 개념을 비합리적이며 복합적 차원의 형태로 표현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발상법에서 초현실주의는 논리적 상호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시각을 통한 지각의 확대와 증강이 이루어져 정서적 감정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미국 추상표현주의는 1940년대 말 뉴욕을 중심으로한 명백한 미국식 스타일의 회화로서 50년대 후반까지 미국 화단을 지배한 역사적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운동은 본질적으로 초현실주의의 이념을 차용하여 혼합하였고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들은 전쟁기간 동안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더욱더 엄밀한 미국적 개념인 개척적인 개인주의의 중요성, 특히 전통으로부터 예술의 해방을 강조하였다.
추상표현주의는 완전한 추상 또는 전적인 표현주의는 아니다. 초현실주의의 무의식적인 자동기술법을 차용하였으며, 이미지를 산출하기 위한 방식으로 새로운 극단을 감행하였으며, 동시에 입체파(큐비즘)의 개념인 '피상적 화면'을 탐구하였다.
전형적인 추상 표현주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회화를 파악하는 방법보다는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이 감소되며, 두 개의 범주를 하나로 조화시킨다.

이 시기에 미국 미술은 역사상 최초로 지방주의와 유럽에의 의존에서 탈피한다. 그러나 30년대 뉴욕화파 발전에 가장 중요했던 직접적인 영향은 한스 호프만(1932년 이후 피카소의 드로잉과 마티스의 색채수업, 예술의 사회적 목적보다 자율성 주장)과 1940년 나찌 점령하 파리 미술인들인 샤갈, 에른스트, 레제, 마쏭, 몬드리안, 앙드레 브르통 등의 뉴욕으로의 이주를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뉴욕화파 화가들은 지칭하는 추상표현주의란 말은 지나치게 함축적이어서 그리 적절한 용어는 아니지만 이들 가운데 표현적 방법에 치중한 자들은 항상 추상적이지 않고 비 대상양식을 추구하는 자는 표현적인 붓작업을 피했다.
이들은 전쟁으로 노출된 비합리적 측면을 표현하기 위해 초현실주의를 따라 융과 그의 원형이론, 집단무의식으로 전환, 꿈을 도해하는 대신 자유연상과 자동주의에 의존, 큐비즘 추상의 지적 조행개념을 전도시키면서, 그 평면공간을 수단으로 생각한다기 보다 과정을 우선시하는 회화적 드로잉의 독특한 양식을 발견하게 되었다.



팝아트는 영국에서는 젊은 예술가를 중심으로 미국적 대중 이미지에 대한 학구적인 탐구에서 발단 1965년 Tomorrow전. R.hammilton 의 collage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미국에서는 추상 표현주의 양식으로 서서히 성장 1955년 neo dada, 1962년 new realist전시로 공식적인 팝아트가 시작되었고, 비평계의 저항을 극복하고 대중적으로 성공 1964년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팝 아트의 용어는 영국 비평가 Lawrence Alloway가 1954년 광고문화가 창조한 대중예술이란 의미로 사용하면서 처음 대두되었다.
대중문화와 소비영상으로 구성되는데(예로 만화, 장식용 포스터, 포장지), 역설과 찬미를 훌륭하게 조화시킨다.
1962년 순수미술의 맥락에서 대중적 이미지를 사용하는 예술행위로 확대적용 되었다. 빛나는 색채, 날렵한 디자인(때론 거대한 사이즈로 확대된), 기계적인 질감들은 대중들에게 매우 친근한 것이었다.
팝 아티스트들은 대량 소비시대의 산물인 행버거, 변기, 잔디깍는 기계, 립스틱 케이스, 스파게티,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한 경애등을 표현하였다.



1860년대에 미국에서 일어난 추상미술의 한 동향으로 옵티컬 아트의 약칭이다.
시각과 그것에의한 시지각 심리를 바탕으로 하여 순수 형태와 색채의 시각적 현상을 작품의 주제로 사용하는 미술. 50년대 말 국제적인 미술 운동으로 발전한다.
팝 아트가 상업성, 상징성을 갖는 반면 옵 아트는 순수한 시각적 작품에 몰두하였으며 다이나믹한 빛과 색의 변조가능성을 추구하였다.
가장 큰 특징은 시각적 착각의 영역을 가능한 확대코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비재현적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비대상적이고, 비재현적이고, 비이미지적이고, 비표현주의적이고, 비주관적인 것이다." 애드 라인하르트, 1962년 미니멀리즘 회화에 대한 한 이야기

처음 미국에서 액션페인팅과 추상표현주의 양상에 대립되는 경향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그러나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37년에 존 그래함이 (예술 체계의 변증법)이라는 책에서 미니멀리븜이라는 말을 이미 언급하였고, 1929년 데이빗 버리욱이 존 그래함의 전시 서문에서 이 말을 사용한 바 있다. 미니멀 아트는 표현적이거나 환영적인 모든 과장을 거부하는 미술 형태이다. 이 미술은 3차원적이며 우연히 생기거나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형성되며 똑같은 형태가 반복되는 특징을 지닌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버넷 뉴먼, 돈 저드등을 주요작가로 들수 있다. 이들 작품 특성은 예술의 모든 '기본적 조형어휘'만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사실, 감상자들이 어떤 애매함도 없이 단일한 전체적 인상을 갖도록 극단적인 시각적 단순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극도의 축소화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미니얼즘은 주관적이며 풍부한 디자이너의 감성을 고의로 억제하며 디자인에 있어 미감을 최소한으로 줄이려 한다. 개인적 감성과 표현을 극도로 억제하며 순수하고 무표정한 새로운 형태언어를 취하기 때문에, 엄격함과 함께 대단히 감추고 도사리는 형태를 취한다.
그리고 시각적인 특성은 색깔의 절제이며, 따라서 구조적인 요소로서의 표면은 대개 흑색이거나 단색의 거친 금속이거나 때때로 금, 은 또는 동을 사용한다.
그러나 최소한의 장식과 미학으로 간결하게 처리되고 있는 이 미니멀 디자인들은 그 절제된 단아함 속에서 더욱 세련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포스트 모던(Post Mordern) 이라는 용어는 1970년대 말에 다원주의와 함께 부상했다. 이 용어는 촬스 젱크스가 건축에서 처음 정착시킨 용어이며 현대적인 것과 고전적인 것, 기능적인 것과 장식적인 것, 개인적인 것과 대중적인 것의 조화를 기대하며 '진보적인 절충주의'의 시대를 낙관적으로 예견했다.
1980~1981년 사이에 밀라노에 세워진 그룹 멤피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국제적 진열 창구로 국제적인 디자이너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여 마이클 그레이브와 한스 홀레인과 같은 포스트 모더니티의 대가 들을 영입한다.
멤피스 그룹은 미니멀 아트로부터 단순한 형태를 차용하고 과감한 다색 배합과 같은 기묘함과 유희성을 디자인 방식으로 채택했다. 이로 인해 소규모 생산과 수공업적 기술의 가치개념이 값비싼 물건들이 제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되찾은 '미술 공예' 정신과 각각의 물체가 본래의 기능을 감추는 것에 집착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정신은 우리의 일상용품인 소파와 장식장, 옷장, 서랍장 등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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