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테크/동아기획이야기

산업디자인의 역사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7. 25. 07:50

샬롬

 

 

산업에 의해 대량생산되는 공산품(工産品)의 형태적인 여러 특질을 결정하기 위한 조형활동(造形活動).

본문

공업디자인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제품을 만드는 쪽과 사용하는 쪽에서 서로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를 맺고 있는 현대 산업사회의 구조로서, 산업에 의해 형성되는 인간환경의 모든 국면을 포괄하는 종합개념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또한, 산업디자인은 인간의 정신적인 욕망과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산업제품과 제품 시스템을 발전시키는 창조활동이다. 그러므로 산업디자인은 사회학 ·최신기술 ·경제학 ·환경공학 ·미학 ·철학 ·심리학 및 예술과 밀접하게 연관된 종합학문으로서 인접학문과의 유기적인 협조에 의한 활동으로 포괄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하는 전문분야이다.

산업디자인은 원래 ‘모던 무브먼트(modern movement)’로 일컬어지는 건축 ·공예의 근대화 과정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19세기 중엽 영국의 W.모리스가 주창한 ‘미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에 바탕을 둔다. 19세기 초의 공업기술로서는 기계에 의해 양산(量産)되는 물건일지라도 조형적으로는 여전히 수공예시대의 제품을 모방한 것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고대 이집트의 조형에서 로코코 양식에 걸치는 오래된 역사적 의장(意匠)이나 동양의 의장 등이 건축이나 공예에서 많이 이용되는 가운데 조형 양식에 혼란을 빚고 있었다.

모리스는 이와 같은 경향을 타파하고 올바른 수공예의 전통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그는 사물을 만드는 것에서 회열을 느끼던 중세 장인(匠人)들의 세계를 칭송하고 고딕 양식을 사랑하였으며, 예술과 공작의 결합 ·일치를 제창하는 미술공예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수공 제작에 중점을 두고 기계 생산을 배제한 까닭에 결과적으로 시대역행적인 모순을 빚기도 하였으나, 올바른 재료와 공작으로 생활에 도움을 주는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근대적 조형이념을 보급한 점에서는 저속한 취미에 휩쓸려 있던 당시의 공업생산에 적지 않은 반성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미국에서는 19세기 후반, 공업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넓은 국토의 개발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고 노동력의 부족 등으로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기술적인 합리화 내지 능률화의 문제가 절실해짐과 아울러 급격한 발달을 이룩하였다. 유럽과 같이 문화와 조형에 뿌리깊은 전통이 없는 이 나라에서는 생활의 실제적인 요구에 부응하여 기능적인 제품을 쉽사리 생산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탈것이나 농기구 또는 가구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무런 미적(美的) 배려를 하지 않은 기능주의적인 조형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제품은 공간과 시간의 변화, 근대생활의 자각 등으로 움트기 시작한 유럽의 전통적인 조형감각에 큰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다. 그런 중에서도 미래파(未來派)의 화가들은 1910년에 이미 시각(視覺)으로부터의 해방, 대상(對象)에 대한 정적 관조(靜的觀照)의 지양, 동적 감각(動的感覺)의 표출 등을 부르짖고 나섰으며, 독일의 P.베렌스 등 근대건축가들은 명쾌 ·솔직하고 기능적인 생활환경의 조형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들은 모리스가 배제한 공업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모리스가 지향한 목표를 현대적인 방법으로 달성하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미술과 산업은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생활조형의 신기원을 이룩하려는 독일의 ‘공작연맹운동(Werkbundbewegung)’을 낳았고,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건축가 W.그로피우스가 주재하는 연구 ·교육 센터인 바우하우스(1919∼1932)로 발전하였다.

산업디자인의 이념은 이와 같은 산업 근대화운동에서 서서히 형성되어 베렌스의 베를린 전기회사에서의 활동이나, 그로피우스의 기성 조립식주택(prefabrication house) 등에 의해서 처음으로 구체화되었다. 독일공작연맹이나 바우하우스는 디자인 이념의 육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실제로 산업디자인이 산업계의 요청으로 발달하게 된 것은 공업국인 미국에서였다.

미국에서는 1910년대에 이미 콘베이어 시스템에 의한 자동적인 연속생산방식이 완성단계에 접어들어 포드 자동차는 그 대표적인 실례를 이룩하였다. 이 생산방식은 처음부터 대량수요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포드는 공장설비를 가능한 한 기계화하면서 생산과 수요를 하나의 구성단위로 생각하여 세계적인 조직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조직에 의해 생산과 수요가 연결됨에 따라 수요자의 희망을 제품에 보다 더 강하게 반영시킬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지금까지 거의 기술자 손에 맡겨져왔던 공업제품에 대해 새로운 색채나 형태, 기능과 쓰임새와 같은 인간적인 요소를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특수한 기술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 기술은 공업제품의 재료 ·구조 ·가공 ·기능 ·경제성 ·심미성(審美性) ·시장성 등을 감안하면서 그 조건들을 통합, 조정하여 상품에 반영, 조형하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활동을 산업디자인이라 일컫게 되었으며, 그것은 1919년 N.B.게디스에 의해서 처음으로 확립되었으며, 그는 미국의 산업디자인의 선구자이다.

산업디자이너는 용도 → 재료 → 가공 → 제품 → 시장이라는 공업생산 과정 전반에 걸쳐 기업가 ·기술자 ·유통관계자와 협력하면서 제품의 기획 및 설계에 임해야 하기 때문에 조형적인 재능은 물론, 생산이나 시장에 관한 다방면의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한다. 산업디자인(ID)은 일종의 협동작업이므로 디자이너의 소임은 종합적인 관점을 갖는 연락조정자라고 말할 수 있다.

유럽에서는 먼저 건축가들이 이와 같은 소임을 맡게 되었으나, 건축물의 계획을 주임무로 하는 건축가가 반드시 산업디자인의 적임자일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에 대신할 만한 마땅한 기술자도 당시에는 없었던 관계로 영국에서는 한동안 ‘행방불명의 기술자(missing technician)’라고도 불렸다. 애당초 이러한 직능활동(職能活動)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던 미국에서도 1929∼1933년의 경제공황은 산업계 자체에 산업디자인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하였다. 게디스, 드레이퓨즈, 로이, 반도렌과 같이 직업인으로서의 기초를 쌓은 사람들은 모두 이 공황기 전후에 등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산업디자인의 공백기간이었으나, 전시중에 발달한 인간공학(人間工學)은 종전 후 인간성 회복의 사상과 더불어 디자인의 방법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기(機器)의 인간에 대한 기능을 과학적으로 검토하여 지금까지 습관적 ·경험적으로 처리하던 대인관계(對人關係)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치수나 형태 등을 인간의 생리와 심리에 잘 조화되도록 계획하여 조형하게 되었다. 또한 디자이너의 개인적인 취향에 빠지지 않도록 통계학과 정보이론을 도입, 폭넓은 일반대중의 생활에 알맞도록 계획하는 것이 최근의 산업디자인의 특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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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답변들 1 추천순 | 등록순

nogari12 님의 답변

2004-11-03 07:35

산업은 시각, 공업, 환경이라는 디자인 대분류 3개를 통합한 디자인의 최고 분류 단계입니다.

디자인과 산업디자인은 같은 의미이나 '산업디자인'이라고 말할 때에는 사전적의미의 디자인이 아닌 산업에 직접적으로 도입된 디자인을 뜻 하므로 미술의 역사를 건너뛰고 산업 디자인의 역사만 간추리겠습니다.

근대이전 > 미술관련 일축. 원시공예작업에서 발전하여 수공예 체계에 들어서며 귀족공예(국내의 경우 청자 및 나전칠기 등), 민중공예(제기), 개인공예(바느질,보석함 등) 등의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며 심미성에 대해 관심을 두기 시작, 귀족공예를 주축으로 디자인적 요소가 발생합니다.

민예(민중공예)는 대량생산을 요하게 되었고 수요에 의해 인류는 기계생산체계에 들어서게 되며 기계공예가 발달하게 됩니다.

근대 > 근대의 디자인은 위에서 언급한 이유로 ' 산업혁명'을 맞게되며 시작됩니다. 그것은 봉건사회탈피, 자본가계급등장, 새로운 지휘층 발생, 합리주의사상, 자연과학과 기술발달, 식민지 정책등의 결과를 낳게 됩니다. 18C中~19C에 이르는 영국에서 발생한 최대다수 최대행복이라는 슬로건을 갖은 기계 대량 생산체제 독특한 산업운동개념으로 약100년간 지속 되었습니다.

이에따라 빈부차는 극대화되고 인력의 수요가 급격히 저하되었고 그과정에서 디자인 역시 멀어져 현대응용미술의 시초인 이당시의 미술은 극소수 부유계층의 유희물이 되고 호화스런 장식 등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리고 공예 및 생산품 일체가 기계 생산에 맞춰지며 매체의 심미성은 중요성을 잃게 됩니다.

이때에 '윌리엄모리스 ' 등 근대 디자이너들이 등장하며 기계생산체제의 심미성 저하에 대한 기존 디자인 반성과 특권세력과의 빈부격차를 가져 오는 기계생산체제의 파괴를 주장하며 벌인 '미술공예 운동 '이 일어났고..

미술공예 운동과 모리스의 작품등은 후일 '독일공작연맹'과 '바우하우스'의 설립에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19C말 그런 운동이 완성되어 갈 즈음에 서유럽에서 20세기에 걸맞는 디자인 양식을 갈고하던 디자이너들이 새로운 양식의 디자인을 고안해내게 됩니다. 그 대표적 인물은 '헨리 반 데 베르데 '로 이는 순수회화가 아닌 산업디자인의 필요성에 대해 말을 하고 회화로부터 디자인의 독립을 선언 하며 이때에 '산업디자인'이라는 말이 완성되는데, 이를 주축으로 '아르누보 ' 양식이 탄생한 것 입니다.

근현대 >
이어 20세기초(1907) 독일에서 '헤르만 무테지우스'를 주축으로 '독일공작 연맹 '이 탄생합니다. 이는 미술, 공업 등을 기계생산의 장점을 살리되 협력에 의한 인력의 합리적 배치로 기술주도적 디자인을 전개하게 됩니다.

그후 이탈리아의 미래주의가 등장하는데 이는 현대응용미술과 디자인계에 새로운 표현양식을 선구했고, 네덜란드에서는 몬드리안 등을 주축으로 신조형주의 운동이 전개되어 색과 면의 분할 등의 현대적 표현양식을 제시합니다.

이어 러스킨의 영향을 받은 윌리엄모리스 의 미술공예 운동으로 파생된 아르누보양식과 동일공작연맹의 장점을 고안해 '그로피우스 '가 디자인전문 교육기관인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를 설립하게 됩니다.
이때의 시대상황은 독일의 1차대전 패전이후 생겨난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물자적 빈곤과는 반대로 국가재건 등의 활기가 예술 창작분야에도 영향을 주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는 표현주의적 로멘티시즘을 낳게 됩니다.

우파정권으로 접어들어 바우하우스 기관의 폐쇄를 요구받게 되자 데소시의 시장이 데소로 학교를 이전하여 시립대학화 시키며 수공 디자인이 아닌 기계생산을 위한 원형제작이라는 형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바우하우스를 '데소 바우하우스 '라고 합니다.

1930년 세계 경제 대공항을 이유로 바우하우스역시 폐교 직전까지 향하다 그로피우스에 의해 미이즈 반 더 로에가 학장으로 취임하여 1932년 베를린에 사립학교로 문을 여는데 이를 '베를린 바우하우스 '라고 합니다. 하지만 곧 상황이 여의치 않아 교수와 학생모두를 해산하고 사설 연구소로 자리하다 나치당에 의해 공산주의 문서압수라하여 강제해산 당하고 1년만에 폐교됩니다.

그리하여 그로피우스 등 주요 교수진은 하버드, 예일대학 등 유명대학에 취임하여 강의를 하였으며 이 중 한명인 모흘리자가 미국 시카고에서 아쉬운 열의를 못이겨 '뉴 바우하우스 '를 창립하게 됩니다.

현대 >

현대의 디자인은 독일을 주축으로 기계설비의 디자인등이 발달하며 시작됩니다.
이에 따라 현재까지도 정밀 기계 산업의 디자인은 독일을 우선으로 합니다.

그리고 각종 운송수단 및 기계자체를 생산하는 거대 산업단지가 조성되는데 이때에 막대한 자본력을 갖춘 미국이 선두를 하게 되었으며, 영국과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산업혁명과 미술공예 운동때의 논쟁이 시대별로 되풀이 되듯, 순수미술 양식을 도입하여 화려한 양식의 수공 디자인이 성행을 하게 되는데 각 이탈리아는 지역(물류에 유리한 반도)의 특성을 살려 의류, 영국은 전통적 건축 양식의 부활등을 꽤하게 됩니다. 이로인해 미국, 독일, 영국, 이탈리아라는 디자인 선두 4대국가가 조성되게 되며, 20세기 초반까지 표절등으로 논의가 많아 '아시아의 원숭이'로 불리던 일본은 습득한 지식을 카피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분야로 도입하여 아이덴티티 및 캐릭터, 전자 등 다양한 디자인 분야에서 현재에는 선두를 달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컴퓨터 등 전자 시스템이 생산을 주도하는 현대에는 기존의 디자인 분야도 컴퓨터를 통하여 마무리하게 되고 처음부터 컴퓨터를 이용하는 그래픽 분야도 생겨나는 등의 변화를 갖고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은 '제2의 원숭이'로 불리고 있습니다.
20세기중반부터 개인 컴퓨터 보급률이 높아지며 불법 프로그램유포가 성행하며 다루기 쉬워진 소프트웨어를 이유로 비전공, 비전문 인력들이 디자인계에 봇물처럼 쏟아지며 외국의 디자인을 카피하는 정도가 선을 넘어섰다는 것이 그 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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