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키워드 : 시간 & 뉴욕
그리스신화의 크로노스는 자신의 자식들을 삼켜버립니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시간의 속성이 그러합니다. 크로노스는 시간의 신입니다. 어머니 레아 덕분에 살아남은 막내 제우스는 아버지 뱃속의 형제들을 구해냅니다. 그로부터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됩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멸시키기도 하지만 일순간 모든 것을 원래상태로 되돌려놓기도 합니다. 순환하는 시간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을 관장하는 신 ‘야누스’가 1월의 명칭(January)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21세기 벽두 자본주의의 심장, 뉴욕 한복판에서 9·11테러가 일어납니다. 순식간에 세계는 전쟁 상황으로 돌변하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기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9·11테러는 희미하기 만합니다. 그리고 테러가 일어났던 바로 그곳, 세계무역센터(WTC)가 있던 곳은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라운드 제로’라는 말 역시 대단히 상징적입니다. 마치 크로노스를 물리친 제우스로부터 새로운 신들의 세상이 열린 것처럼 9·11참사 현장이 미국 자신이 일본에 투하했던 원자폭탄 피폭지점(각주, ‘그라운드 제로’는 1946년 7월 뉴욕타임스가 피폭지점인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붙인 이름이었음.)의 명칭으로 되살아났으니 말입니다.
신들의 세계든 인간의 세계에서든 불행은 끊임없이 순환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영속성과 순환성에 대한 몰이해와 인식부족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9·11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연이어 보복전쟁을 일으켰던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새겨두었어야 할 말은 “신은 우리를 채찍으로 길들이지 않고 시간으로 길들인다.”는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금언입니다.
7월의 키워드는 ‘시간’과 ‘뉴욕’입니다. 근래 ‘시간’의 의미와 효용에 대해 다양하게 파헤치는 책들이 연속 출간되고 있는 데다 ‘뉴욕’ 관련 책들이 나오기 시작한 건 벌써 몇 개월 전부터였습니다.
먼저 ‘시간’입니다. 앞서 시간의 순환성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드렸습니다만 근래 나온 책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제 시간은 단순 상식을 넘어 학술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앤서니 애브니의 <시간의 문화사>에서 확인됩니다. ‘달력, 시계 그리고 문명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인간이 시간을 어떻게 이해해왔는가’에 대한 인류학적 고찰로서, 고대 문명과 천문학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미국 콜게이트대학의 교수인 저자는 책의 서장에서 대표적 영어사전인 <웹스터 사전>을 펼쳐 ‘시간’ 항목을 찾아보고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단어보다 더 많은 설명이 있고, 또 그 설명이 서로 엇갈리며 혼동을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의미를 가진 낱말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시간은 인간 세상에서 다양한 의미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해왔습니다.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경이로움과 의문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분명 학술서의 요건을 두루 갖춘 것이지만 역사 속 시간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독자들에게 쏠쏠한 재미를 선사하기도 합니다.
<시간의 놀라운 발견> 역시 시간의 속성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의 산물입니다. 이미 잘 알려진 독일의 학술칼럼니스트 슈테판 클라인은 이 책을 통해 ‘시간이란 무엇인지, 시간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시간을 더 신중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몸속의 생체시계, 마음속의 심리시계, 두뇌 속의 시계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통해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그러고보면 이 책은 시간에 관한 ‘종합탐구서’이자 ‘사용설명서’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시간에 대한 보다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러나 역시 놓칠 수 없는 건 ‘어떻게 하면 시간을 잘 쓸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일명 ‘시(時)테크’ 관련 책입니다. 공히 일본 저자들이 쓴 <기적의 시간활용법>, <시간, 도요타처럼 아끼고 닛산처럼 써라>, <시간과 사람, 3부작 -스킨, 턴, 리셋> 등이 그런 종류의 책들입니다. 시간의 의미가 다양하듯 관련 책들 또한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보여줍니다. <히피의 여행바이러스>과 <베이징 뒷골목 이야기>, <인생4계>는 일상과 여행을 넘나드는 사색이 담긴 책이며, <시간 상자>,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시간을 소재로 한 소설입니다. 시집으로는 시인 김광규의 <시간의 부드러운 손>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키워드는 ‘뉴욕’입니다. 뉴욕 관련 책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는 소식은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얘깁니다. 문득 그 의미를 생각해 봤더니 두 개의 생각이 동시에 떠오릅니다. 우리에게 뉴욕은 더 이상 멀고 낯선 곳이 아니라는, 동시에 뉴욕은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동경의 대상이라는 역설적인 생각. 그래서 아직도 우리에게 뉴욕은 일반인보다는 연예인이나 전문여행가 혹은 뉴요커들이 먼저 다녀오고, 살아보고, 겪어보고, 즐겨본 뒤 그 신기하고 재미난 체험과 경험담을 들려주어야 하는 신비로운 도시라는 것. 우쭐함과 씁쓸함의 절묘한 조화라고 할까요, 아무튼, 요즘 뉴욕 관련 책 출간이 봇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선 뉴요커의 책부터 볼까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뉴요커는 아무래도 작가 폴 오스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폴 오스터의 뉴욕통신>은 뉴욕 관련 책들 중에서도 독자들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3부로 나뉜 책의 1부에는 프란츠 카프카, 새뮤얼 베케트, 파울 첼란, 로라 라이딩, 크누트 함순, 존 애시버리 등의 작가들을 논한 에세이, 2부에는 오스터가 번역하거나 편집한 책들에 쓴 서문, 3부에는 오스터의 인터뷰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한편 <박경림의 뉴욕 스캔들1,2>는 도전하는(?) 방송인 박경림이 유학시절 실제 경험했던 ‘좌충우돌’ 영어학습법을 담은 것이어서 흥미를 유발하며, 배우이자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엄정화가 뉴욕에 머물렀던 38일 동안의 일기를 책으로 엮은 <엄정화의 뉴욕일기> 역시 평소 그녀의 솔직함을 알고 있던 팬이라면 관심을 가질 만한 책입니다.
그러나 역시 뉴욕을 제대로 설명하는 책은 ‘우리의 관점’에서 뉴욕 문화의 정수를 채득한 사람이 쓴 ‘뉴욕문화’에 대한 소개서일 겁니다. 박준의 <네 멋대로 행복하라>, 김랑, 정령의 <뉴욕에 미치다>, 박진배의 <뉴욕 아이디어>, 문어발스튜디어의 <올 어바웃 뉴욕>, 그리고 시공사 편집부에서 펴낸 <뉴욕>이 그런 종류의 책들입니다. 그 중 특히 <네 멋대로 행복하라>의 저자 박준이 들려주는 “뉴욕의 매력을 만드는 건 뜨거운 심장을 가진 뉴요커들이고, 뉴요커들이 치열하도록 끊임없이 자극하는 건 뉴욕이란 도시의 에너지”라는 말은, 왜 뉴욕이 세계의 문화수도라 불리는지에 대한 대답으로 들립니다.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월간 <사람과 책> 에 보낸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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