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19(토) 화창하게 맑다가 오후에 흐림(옥천 최저 11도, 최고 26도).
잠잤던 부암모텔은 교외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짐을 꾸리고 털레털레 시내 쪽으로 걸어 나왔다. 10분쯤 걷자 옥천역이 나왔다. 이 부근이면 아침 식사를 파는 식당이 있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역전 맞은편에 작은 식당 하나가 '아침식사 됩니다'라는 반가운 간판을 달고 있다. 찌게라기보다 국에 가까운 김치찌게를 시켜 둘이서 맛있게 식사를 했다(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김치찌게를 더 좋아한다).
어제 봐두었던 역전 시내버스 정류장에 가니 우리가 목적하는 평곡행 버스가 9시에 떠난단다. 미리 주차해있는 버스에 올라타니 아주머니 한 분만 뎅그러니 앉아 있다. 아, 그런데 이 아주머니가 청산유수다. 우리가 평곡간다는 것을 아까 다른 버스기사에게 묻는 걸 들었는지, 자기도 그 가까이 하동리에 산다며 말을 붙이는데 그 양반이 먼저 내릴 때까지 30분간 우리는 지겨운 줄도 모르고 그 양반의 읍내 장터 장사 이야기, 군수 흉보는 이야기들을 귀씻고 경청했다. 군수의 성이 '한'이라는 걸 지금도 기억할만큼 이야기는 재미있고 생생했다. 길다니는 재미와 보람을 느끼게 해준 그 아주머니께 감사한다.
마전가는 길 중간의 평곡사거리에 내렸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장령산(장용산) 휴양림까지 6km 가까이를 걸어갈 작정이다. 오늘 합류할 산악회와 함께 할 3시간 정도의 산행 만으로는 우리가 목표한 하루 걷는 양을 채우지 못할 것이고, 더욱이 우리는 그들이 도착할 11시경까지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친절한 버스기사가 내리라는 장소에서 내리니 어제 봐두었던 평곡사거리가 맞다. 9시 15분부터 장령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왕복 2차선의 아스팔트 도로이지만 차량 통행이 거의 없어 시내가 흐르는 산곡사이를 걷는 호젓한 걸음이다. 일부러 느릿느릿 걸었지만 10시 30분에 휴양림 주차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오늘 벌초 행렬 때문에 경부고속도로 하행길이 지체된 산악회 일행은 그로부터도 1시간이나 지나서야 당도했다. 덕분에 우리는 그동안 주차장 위 쉼터의 평상에 앉아 푹 쉬었고, 휴양림 일대를 기웃기웃 구경다니는 여유를 부릴 수도 있었다.
일행과 합류해 산행을 시작한 시간은 11시 40분. 장령산 등산지도를 보니 정상(656m)을 올랐다가 능선길을 돌아 내려오는데 총 길이가 7.4km였다.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등반길이 가팔라 쉽지 않은 산행을 하였다. 우리가 짧은 코스를 선택해서인지 올라가는 길도 힘들었고, 더욱이 하산길도 아주 경사가 심해 도무지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그 힘든 산행 중에도 내려다보는 경치는 참으로 절경이었다. 작고 아름다운 호수도 보이고 멀리 산아래 드러누운 마을도 내려다 보이는데 실로 고즈넉하고 평화롭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 풍경에 감탄하면서도 이제는 내 생각이 다른 데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이런 풍경을 보기가 어렵지 않더라는 것이다. 짧은 도보여행 끝에 내리는 졸속한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나는 작년에 한달간 해안선 일주 자전거 여행도 했었다), 이제 웬만큼 녹화가 되고 환경이 정비된 한국의 산야는 어디든 그 아늑하고 정겨운 풍광을 보여주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는 게 내 나름의 평가이다. 우리는 원래 그만큼 아름다운 산하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축복받은 자연조건을 보존하지 못하고 섣부른 80년대식 개발 논리에 휩쓸리는 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토의 큰 축을 훼손시키는 소위 4대강 개발사업이 큰 저항없이 진행되어 가는 것은 나라와 후세를 위해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다.
산을 내려와 계곡의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반복되는 원행에 지친 발의 피로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는 산악회 회원들과 오랫만에 회포를 푸는 주연을 가졌다. 서울로 상경해야 하는 그들을 위해 아쉽게 자리를 파한 때가 4시가 조금 넘은 시각. 그들이 대절버스로 옥천터미널에까지 데려다주어 우리는 편하게 보은행 시외버스를 탈 수가 있었다.
오늘 보은의 숙소는 터미널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의 <산호장모텔>. 시간이 남아 나름대로 노력한 덕분에 보은에서는 가장 깨끗한 숙소를 골랐다 싶다. 여러분께도 강추하는 바이다. 저녁식사는 모텔과 터미널 사이의 '먹자골목'에 있는 국밥집에서 돼지국밥을 먹었다. 돼지국밥이란게 예민해서 부산 아니면 잘 안먹는데 오늘은 소주를 반주로 해서 얼큰한 국밥을 참 맛있게 먹었다.
오늘 걸었던 거리는 평곡~장령산 6km 남짓, 장령산 등산코스 7km 가웃해서 약 13km였다. 등산이 힘들었던 것을 감안하면 오늘의 목표치는 웬만큼 달성했다 싶으다. 내일은 이곳 보은의 외속리면 서원리 소나무에서 걷기를 시작해서 삼가천 변을 따라 상현서원을 거쳐 선병국가옥-삼년산성까지 가는 길을 걸을 것이다. 그게 미진하면 말티재 고개를 넘어 속리산으로 가서 법주사 입구의 오리숲을 피날레로 걸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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