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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보여행 6일차(9. 15) - 지리산 둘레길 마지막(?) 구간(운봉-주천)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9. 27. 08:42

 

9. 15(화) 청하게 맑은 날.

 

터미널 맞은 편 약국 앞에서 운봉행 버스를 탔다. 버스는 자주 오는 편인데, 운봉까지는 30분 가량 걸렸다. 운봉우체국 앞에서 내리려하자 젊은 기사 양반이 지리산 둘레길 가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답하니 자기 친구 기사들 네 사람도 오늘 아침 주천에서 출발해 운봉으로 걸어오고 있단다. 그러면서 서천리 기점은 좀 더 가야한다며 자기가 그곳에 내려주겠다는 것이다. 왜 안되겠어? 감사한 일이지...그가 내려준 <신기교>라는 다리 앞에서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길바닥에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제대로 알려줬구나, 안도하며 오늘의 걷기를 시작한다.

 

무슨 강인지는 몰라도 제법 넓은 시내를 따라 기분좋은 흙길을 한참 가자 오늘의 첫 이정표 말뚝이 나온다. 그런데 웬걸? 말뚝 명찰을 보니 오늘 우리가 걸을 운봉-주천코스를 넘어 더 동쪽의 인월에서 운봉으로 오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버스 기사가 우리에게 약 1.5km 정도 여분의 길을 팁으로 준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돌아온 운봉 읍내에 있었다. 인터넷 안내에는 운봉우체국 앞에서 내리라고 되어 있었는데 그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기점을 모르고, 말뚝도 찾을 수가 없었다. 고민끝에 파출소에 가서 물어보니 친절하게 방향을 일러준다.

 

이 구간의 두번 째 애로는 구 양묘장으로 들어가는 길을 놓치기 쉽다는 것이다. 나만 그런지는 몰라도 코스가 설마 문이 있는 양묘장안으로 들어갈 것이라고는 생각못했는데 이정표는 그 입구의 길 건너편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생각을 하며 걷다가 무심결에 지나쳤는데 뒤따라 오던 김선배가 발견하고는 나를 불러세웠다. 혼자였다면 마냥 계속갈 뻔 하였다. 양묘장 안을 통과하자 다시 강변의 흙길이다. 걷는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반가운 길, 띵호아다.  시내 양편으로 지그재그 왔다갔다 하던 길이 행정마을의 서어나무숲으로 연결되었다. 수백 그루는 족히 될 서어나무들이(나는 사실 처음 보고 듣는 나무였다) 구불구불 올라간 몇백년의 연륜을 갈무리한 채 기품있게 서있다. 하얀 색의 나무 줄기들이 열병하듯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신령스러운 분위기마저 감돌 정도였다.

 

 

사고는 행정마을을 벗어나 흙길이 끝나고 다시 아스팔트 도로를 만나자마자 발생하였다. 조금 더 진행하다가 오른쪽으로 100m 가량 안쪽의 숲에 우리보다 먼저 가던 세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도 무심히 지나친게 탈이었다. 우리는 말뚝을 미처 못본 채 "왜 저 사람들이 저 안에까지 들어가 쉬고 있지? 그만 갈려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올바른 길이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두 사람 다 이정표를 놓친 것이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씩씩하게 그들을 지나쳐 가서 오른쪽의 제방 위에 올라가 <주촌저수지>를 호기롭게 구경하고 계속 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아까 버스기사가 말했던 그의 친구 네 사람을 길에서 만나 그의 인사까지 전해주면서 말이다.

 

그런데 2km 쯤 갔는데도 다음 이정표 말뚝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는 '계속 직진이니까 굳이 만들 필요가 없었겠지' 하다가 정령치와 남원가는 길이 갈라지는 도로 이정표가 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아, 우리가 길을 놓쳤구나' 싶었다. 김선배는 이미 너무 많이 지나쳐왔기 때문에 계속 도로를 따라 주천까지 가자는 주장도 잠깐 했지만 결국 다시 돌아가자는 내 주장에 동의했다. 그대신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 길을 놓쳤던 가장마을 숲까지 가는게 아니라 멀리 산자락 위로 보이는 두 마을을 노치와 회덕마을로 간주하고(물어볼 사람도 없었고, 우리 지도는 너무 간소했다), 논두렁길을 가로질러 그 쪽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도로 아래의 논두렁길로 내려서자 처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콘크리트로 포장된 넓은 농로가 나타나서 의외로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언덕 위 노치에서 내려오는 농로와 지방도로의 합류 지점에서 이정표 말뚝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마을에서 노치마을까지의 2km 가웃을 건너뛴 채 회덕마을에 들어섰다.

 

시간은 이미 12시가 넘었는데 식당이 없다. 어제밤 급히 본 인터넷 기행후기에는 분명 이 부근에 칡냉면집이 있다고 했는데 동네 할머니들은 무슨 도깨비같은 소리 하냐는 식이다. 나중에 보니 문제의 그 '칡냉면집'은 이곳이 아니라 여기서 무려 6.4km를 더 가야 하는 주천면소재지에  있는 것이었다. 오보는 사람을 굶어죽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 후기를 쓰는 사람은 정확하게 써야 한다는 것을, 나도 후기 쓰는 사람으로서 새삼 절감한다. 하지만 걱정마시라. 우리는 아사하지 않았다. 이럴 때를 대비해 첫날부터 계속 넣어 다닌 쿠키가 제 역할을 만나 빛을 발했고,  마침 어제 밤 김선배의 주장으로 남원에서 샀던 복숭아와 포도도 배낭에 남아 있었다. 내심 조금만 사지 내일 먹을 것까지 산다고  투덜거렸는데, 사람은 내일 일을 모르는 거라는 옛 말이 무섭도록 실감나게 다가왔다.  

 

회덕마을(520m)에서부터 구룡치까지는 산 속 오솔길을 타는데 2.4km의 솔숲이 멋진, 환상적인 길이었다. 구룡치(580m)에서 내송마을(220m)까지는 잠깐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가파른 내리막길인데 역시 숲길이라 햇볕없이 시원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처음이 가팔랐던 수철-동강 구간과는 달리 오늘은 운봉고원에서 구룡치까지 2/3 가량을 서서히 오르락내리락하다가 구룡치에서 급하게 내려가는 반대의 코스였다. 나로서는 오늘 구간, 특히 회덕-구룡치 사이의 길이 가장 좋았다. 내송마을로 내려오는 길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오는 젊은 남자가 있었는데 도로에서 들어오는 이정표를 놓쳐 길을 찾느라 고생했다며 툴툴댄다. 나무 말뚝의 색깔이 자연친화적인 것은 좋은데 주위 풍경과 너무 어울려버려 눈에 잘 안띄는 결점이 있다. 말뚝 한 가운데에 태극 문양을 칠한다던지 하면 다소 보완이 될 터인데 싶었다.    

 

주천면 소재지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45분. <지리산 칡냉면>이라는 간판이 유난히 크게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문제의 그 '물칡냉면'을 곱배기로 시켜 배불리 먹고나서 남원행 버스를 탔다. 남원터미널에서 1시간을 기다려 버스를 타고 구례에 도착하니 오후 6시가 가까웠다. 이곳은 터미널 부근에 모텔이 없어 10분을 걸었더니 비로소 모텔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잡은 숙소는 도로변의 <그리스텔>. 신축건물이라 아주 깨끗한 게 마음에 든다. 주인아주머니에게 세탁기로 탈수를 부탁했더니 그러지 말고 빨래를 갖고오면 당신이 세탁까지 해주겠단다. 교회에 다니신다는데 이 분은 진짜 하느님을 믿는 분같으다. 감사히 후의를 받아들이고 우리는 인근의 <온천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왔다. 음식이 맛있어 전라도를 실감한다.

 

지금 일지를 올리는 곳은 모텔에서 다시 10분을 걸으니 나온 구례 중심가(?- 그냥 내 감이다)의 다크 PC방. 오늘은 길을 잃고 헤매면서 1km 가량 더 걸어 기사분의 팁까지 포함하면 17km 정도를 걸은 셈이다.   

 

출처 : 김영춘 BLOG
글쓴이 : 아차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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